제 103화
허공을 달리고 있던 진혁은 생각했다.
‘다음부터는 좀 더 빨리 달려서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해야겠군.’
광주 사랑병원은 광주역에서 그리 멀지 않다. 입원 병상만 1,000개가 넘는 거대 병원으로 광주광역시에서 최고의 병원이라고 할 수 있다. 진희는 졸업하자마자 이곳에 입사해 바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얘가 기숙사에 있는지, 병원에 있는지도 모르네.’
진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미 작은 환골탈태를 이룬 녀석이니까. 기를 탐색하는 것은 이 정도 거리에서라면 식은 죽 먹기지.’
진혁은 천천히 눈을 감고 주변 환경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주 오래된 석회벽,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와 끝없이 쏟아지는 일에 지친 의료진들까지.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탐색했으나 진희는 병원에도, 기숙사에도 없었다.
“설마 본가에 있는 건 아니겠지?”
진혁은 혹시나 해서 기감을 좀 더 넓게 퍼트렸다. 그러자 장례식장 옆, 벤치 한구석에 앉아있는 진희를 찾을 수 있었다.
‘저기에 있었군.’
흔들리는 어깨 아래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진혁은 일부러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기다렸다.
“하아.”
곧 진희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얼굴은 마스카라가 흐르고 분도 번져서 엉망진창이었다. 옆에 다가온 다른 여자가 진희에게 말을 걸었다.
“진희야. 여기 휴지 있어. 얼굴 좀 닦아.”
진희가 이를 갈면서 말했다.
“수연이는 그 새끼 때문에 죽은 거야.”
다가온 친구가 한숨 쉬며 말했다.
“세상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스물네 살밖에 안 됐는데 자살이라니. 너무 아까워.”
“수연이 걔만 죽은 것도 아니야. 뱃속 아이까지 둘이 죽었다고. 태아 부검이라도 해서 친자 확인 소송이라도 하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야.”
“친자 확인 소송은 살아있는 애로 하는 거지. 지금 수연이 명예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어. 부모님 넋 나가신 것 좀 봐…….”
“수연아, 왜 그랬어……. 나한테 말이라도 하지…….”
진희가 흐느꼈다.
“내가 사수인데, 고민하는 거 하나 눈치 못 챘어. 기숙사 방도 같이 썼는데…… 그냥 신규간호사라서 일이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모르는 척 넘어갔다고.”
친구가 진희의 눈가에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깨를 안으며 조용히 말해주었다.
“박승범 그 자식, 안과 과장님 딸하고 결혼 전제로 만나고 있다는 소문 돌더라.”
"그런 놈이 감옥 가서 사형을 받아야 돼."
“그래,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친구가 진희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걸로도 부족해. 임신한 여자친구하고 양다리 걸치다가 자살하게 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병원에서도 잘려야 돼. 안과 전공의 1년 차 신분도 잃어버리고 의사 면허도 박탈당해야 된다고.”
“그래, 그래. 그러니까 너도 밥 좀 먹자.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알았어.”
자초지종을 파악한 진혁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진희의 이름 모를 간호사 친구에게 감사했다.
‘고마운 일이군. 어머니가 부탁한 위로는, 저 친구가 대신해주고 있어.’
위로를 하는 것보다 해결을 하는 것이 훨씬 쉽다. 진혁은 진희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줄 능력이 있었으며 정보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맘때 즈음에 이런 일이 있었군. 그래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웠던 거였어.’
회귀 전.
원래 이때쯤 진혁은 병원에 입원하고, 진희와 어머니가 병원을 오가며 간호를 할 때다. 아버지는 가게를 되살리기 위해서 돈을 빌리려고 친척 집을 오갈 즈음이다. 그는 자리에 누워서 간호사가 틀어놓은 라디오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진희가 우울해 했던 것은 기억나지만,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그녀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회귀할 줄 알았으면 당시에 주변에 좀 더 신경을 써서 기억하려고 애썼을 텐데.’
사지가 마비되어 있던 몇 년간은 거대한 늪에 잠긴 것처럼 무겁고 어두워, 굳이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 질척거리고 불쾌하며 어두운 감정은 진혁이 중원에서 다른 어린아이들을 짓밟고 노력할 수 있는 발돋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때를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혁은 심호흡을 했다. 이미 지난 일, 섭리가 어떤 변덕스러운 마음을 먹고 자신을 이리로 보냈는지 아직도 알 수 없다. 그저 거친 물살이 흐르는 강물에 다른 이들과 함께 흘러내려 가며 이 안에서 최대한 떠오르기 위해 발버둥 칠 뿐이다.
‘내가 무공의 경지를 더 높인다고 하더라도 내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이 있지.’
현대 과학은 과거에 비해 놀랍도록 발전했고, 핵폭탄은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학살할 수 있다. 무공이 고강한 1인은 검을 휘둘러 백 명을 순식간에 살해할 수 있지만 플루토늄이 일으키는 핵분열 반응보다 약하다.
‘나쁘지 않아.’
진혁은 자신이 세상에서 오롯이 강하지 않은 이 세상, 자신을 얽매는 가족들이 있는 이 현재가 마음에 들었다. 지금보다 더, 신화경 너머 무공의 새로운 경지를 이루면 위대한 섭리에 손을 뻗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도 더 이상 수련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다.
신선의 경지에 달하면 인간의 욕망은 희미해지고, 현계를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온다.
‘아직은 여기서 할 일이 많지.’
그래서 그는 아직 그 경지에는 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화경의 무인인 그는 쌍둥이인 진희가 어째서 저렇게 괴로워하고 있는지 공감하지 못했다.
‘고작 한 명의 인간이 죽었다고 해서 저렇게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감정을 낭비하다니. 퍽 가까운 인간이었나 보군.’
진희에게 있어 자신이 돌봐야 할 신규간호사의 죽음은 인생에 처음 닥쳐온 크나큰 위기였다. 그녀는 수없이 많은 환자들의 죽음을 경험했지만 동료의 죽음은 처음 겪었다. 진혁이 겪었던 과거에서 그녀는 가족의 사고에 이어 동료간호사의 자살까지 겪었지만 진혁의 병원비를 내려면 일하지 않을 수 없어 병원을 그만두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녀가 병원에서 일하지 않아도 이미 가족들이 성공해서 일할 필요가 없다.
‘병원에서 일하는 게 너무 좋아서, 계속 일하고 싶다더니……. 그런 건 아니었군.’
그때는 그냥 돈이 필요해서 일해야 했던 거고, 가족들이 죄책감을 느낄까 봐 일이 좋다는 핑계를 댔던 것이다.
‘진희가 변했어.’
진혁은 그 변화를 민감하게 눈치챘다. 가족의 생계와 병원비를 책임지기 위해 빡빡하고 힘들게 살던 진희는 이제 없다. 여전히 가족을 사랑하고 책임감이 강하지만, 이전보다는 좀 더 여유가 있다. 직장에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일을 그만두려는 모습은 그가 기억하던 진희와는 다르다.
‘아까 친구와 같이 아사히 맥주를 마시고 있었지.’
그녀는 비싸다는 이유로 일제 맥주는 마시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자기는 맥주 따위는 먹지 않는다고 했던 모습이 선하다. 어쩌다가 먹을 일이 있으면 무조건 제일 싼 국산 맥주를 골랐다. 그래서 진혁은 그녀가 국산 맥주를 즐기는, 저렴한 입맛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짜장면을 싫어한다고 하셨지.’
흘러간 옛 노래가사를 떠올리며 진혁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니도 아니고 진희가 그럴 줄은 몰랐다.
‘병원 다니는 게 편하고 재미있다고, 계속 다닐 거라고 우기는 동안 저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그녀는 참고, 참고, 참으면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처럼 견디면서 가족들에게는 티 내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나도 토할 것 같이 짜증 났지만 어떻게든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가게에서 이익을 내 보려고 아등바등했지.’
성공적으로 샌드위치 가게를 이끌어가고 있는 어머니와, 빵집을 운영하며 제과제빵 학과의 실습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아버지. 두 분 모두 성공해서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고 있지만 진희는 아니다.
‘진짜 빵집이라도 하나 더 차려줘야 하나.’
진혁은 박승범이라는 자가 언제, 어디에서 일하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먼저 잠입할 통로를 파악하기 위해, 병원 구조를 살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1층 로비에서 병원 지도를 들여다보며 주변 어디에 CCTV가 없는지 살폈다.
‘흠……. 큰 복도와 간호사실 쪽에는 거의 있군.’
그는 찬일을 죽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친구의 아들이 갑자기 죽어버렸더라면 크게 상심했을 것이다.
‘세상의 균형. 그리고 흐름.’
죽이는 것은 쉬우나 아버지를 위로하는 것은 어렵다.
세상에 수많은 범죄자가 있고 혼인을 빙자하여 간음한 자 또한 많다. 그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죽이는 것은 공권력이 할 일이지 진혁이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진희를 울려서 어머니까지 신경 쓰게 했으니. 이건 죽을 죄야.’
병실과 검사실에는 CCTV가 없다. 하지만 모든 복도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진혁이 가려고 하는 안과 병동은 2층 외래에 있다.
‘의국은 보통 병동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그는 비상계단에 설치된 CCTV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 가지 방안을 떠올렸다.
하책은 벽을 타고 올라가는 방법이다. 이는 CCTV 모니터링을 하는 이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지만 대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쳐다보게 된다.
중책은 원래 이곳에 존재하며, 당연하게 이쪽으로 와야 하는 외부인으로 변장하는 방법이다.
기루라면 손님으로 변장하고, 병원이라면 환자로 변장하면 된다.
하지만 손님의 호패를 확인하지 않는 기루와 달리 병원은 환자의 신원을 확인한다.
아무 기록도 남기고 싶지 않은 진혁에게는 좋지 않은 방법이다.
상책은 원래 이곳에 존재하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인물로 변장해서 녹아드는 방법이다.
‘택배 기사.’
진정한 은잠술은 투명화가 아니다. 설령 마법 같은 능력으로 인간이 육체를 투명하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투명한 인간은 인파 사이에서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지만 부피감과 중량감이 있어 움직일 때 인간들과 부딪히게 된다.
중원의 살수가 괜히 만두를 파는 상인이나 객잔의 점소이로 변장하는 것이 아니다.
배경에 그대로 녹아들기 위한 수단으로 그것이 제일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 대한민국에서 눈에 띄지 않고 어디에나 갈 수 있는 직업은 그것이다.
‘코팡 당일 택배.’
마침 광주시에는 그 회사의 지부가 있다.
진혁은 택배 회사의 창고에서 잠시 기사들의 옷을 빌려올 생각이었다.
그가 잠깐 택배사를 방문하여 노란 조끼와 야구 모자를 빌려오는 데에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 도로 원래 있던 곳에 갖다 놓으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