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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102화 (102/656)

제 102화

타입 45인 밀가루는 프랑스에서 제일 흔하게 쓰이는 밀가루다. 종자가 단단한 계열의 백밀을 분쇄한 가루로 슈를 만들거나 빵을 만들 때 많이 쓰인다. 단백질은 10%를 함유하고 있다. 반면 타입 55 밀가루는 단백질 11.5%를 함유하고 있으며 옛 프랑스인들이 ‘부드러운 밀(farine de gruau라고도 불리던)’이라고 하던 제품이다. 즉 프랑스의 밀가루는 기본적으로 숫자가 낮을수록 입자가 굵고 무기질의 함량이 높고, 도정이 덜 된 것이다.

아버지는 바게트를 만들 때 타입 55 밀가루를 사용하면 된다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단순히 단백질의 비율만이 아니라, 무기질과 회분의 함량도 달라.’

그래서 타입 45를 박력분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과자를 구우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온다.

“타입 55 밀가루로 구운 바게트는 확실히 껍질이 바삭해져. 하지만 강력분으로 구운 바게트는 그것보다 더 쫄깃쫄깃한 맛이 나지. 바삭함은 덜해지고.”

그래서 진혁은 타입 55와 타입 45의 밀가루를 특정한 비율로 섞어, 조금 더 쫄깃하고 껍질이 바삭바삭한 바게트를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최근에 대성한 천안투마공이 큰 도움이 되었다.

십이 성의 심안(心眼)은 아주 짧은 미래를 순간적으로 예지할 수 있다. 본래 광안마는 이 무공을 사용하여 싸움 상대의 투로와 초식을 꿰뚫어보았다. 어디서 암기가 날아올지, 어느 방향으로 칼을 휘두를지 안다면 싸울 때 유리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진혁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이 무공을 사용했다.

‘구워지고 난 다음에 어떤 형태가 될지, 미래를 미리 들여다볼 수 있다니.’

인간이 어떻게 움직일지 파악하기 위해 소비하는 에너지보다, 밀가루를 구웠을 때 어떻게 될지 미래를 들여다보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가 훨씬 적다.

‘전투와는 다르지.’

전투에서는 단 1초 사이로 생사(生死)와 승패(勝敗)가 결정된다. 상대가 초식을 사용하며 검을 휘두를 때, 그걸 힘으로 받아칠지 맞서 흘려보낼지 피할지에 따라서도 반응이 달라진다. 거기에 신법과 보법, 주변 환경까지 포함하면 필요한 정보와 변하는 결과값은 수없이 많다.

전투와는 달리 주방에서는 통제할 수 있는 수가 더 많다. 그래서 진혁은 들여다봐야 하는 미래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밀가루가 반죽이 되어 열기를 흡수하고 공기를 담은 채 부풀어 오를 때, 변화를 준 것은 오직 다른 타입의 밀가루 양이다. 반죽 시간, 반죽의 양, 달걀과 드라이 이스트의 양은 전부 동일하다. 심지어 반죽을 할 때 움직인 손짓의 횟수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육체를 손끝까지 정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그만이 해낼 수 있는 신기다.

‘단지 다른 타입의 밀가루 양만 바꾸면서 실험해 보니까 금방 됐지.’

바삭바삭하고 쫄깃한 바게트를 만들고 싶을 때는 45:55의 비율로 밀가루를 섞으면 된다. 쫄깃함 없이 속이 연하기만 하고 바삭한 바게트를 굽고 싶을 때는 30:70의 비율.

다른 빵을 만들려면 또 다른 배합비율을 알아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밀가루를 배합하며 천안투마공을 사용한 결과 그는 타입 35부터 145까지, 밀가루의 성질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밀가루는, 잘 익히면 얼마든지 바삭바삭해질 수 있지. 하지만 이 밀가루가 100%라면 불가능해. 반 정도는 다른 밀가루가 채워줘야 해.’

이미 시험 족보를 전부 익혀서 어떤 문제가 나오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수험생처럼, 자신만만하게 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바게트에만 그치지 않는다.

‘식빵을 구울 때는 다른 타입의 밀가루 두 종류를 섞어서 25:75의 비율로.’

밤 식빵과 호두식빵, 고구마 식빵을 만들 때 어떤 비율로 하면 좋을지, 일일이 재료를 사용해서 시험해 보지 않아도 된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한 후 만들어내면, 거의 100%에 가깝게 예상한 대로 맛이 나왔다.

‘방송 준비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아직 박력분과 치즈, 초콜릿 등 다른 재료를 더한 결과물까지 시뮬레이션할 수 있게 되려면, 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진혁은 자신했다.

‘다음에는 치즈를 다루는 방법을 제대로 익혀보지.’

어떻게 수련하는지 올바른 방향을 알았다. 잘못된 길로 가는 것보다, 느리더라도 옳은 길로 꾸준히 가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한다. 정종 무공과도 같은 상승의 길이 요리에도 있고, 진혁은 그 방법을 알아냈다.

‘이제는 하기만 하면 돼.’

그때 전화기가 울리려는 조짐이 보였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알림을 켜 놓을 필요도 없군.’

전화기가 바로 울리기 시작했다. 울리기 시작하는 ‘조짐’이란 전화가 진동하기 전, 기지국에서 항상 발송하는 파동의 파형이 바뀌는 현상이다. 그의 심안(心眼)은 이제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수준에 달해 이런 이능을 보이는 것도 가능하다.

진혁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족과 사업상 파트너, 그리고 직장 동료들 정도다. 진혁은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어머니가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혁이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진희가 병원을 그만둔다고요?”

“그래.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하던데, 어떤 일인지는 이야기를 해주지를 않네.”

옆에서 아버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혁이도 지금 중요할 땐데, 뭐 그런 걸 일일이 전화해서 말하고 그래.”

“여보!”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소리 죽여 말하고서, 진혁에게 다시 말했다.

“진혁아, 시간 되면 진희한테 한 번쯤 전화해서 얘기 좀 들어 줘. 나나 네 아빠한테는 얘기 안 해도, 너하고는 사이가 좋으니까 얘기를 할 수도 있잖니? 말하고 나면 기분도 좀 나아질 테고.”

진혁이 눈썹을 양미간으로 모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니, 그건…….”

저보다는 어머니가 더 잘할 것 같다고 거절하려던 찰나였다. 어머니가 심각하게 말했다.

“진희도 이제 다 컸고, 어린애가 아니니까 자기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겠지. 어린애도 아닌데 엄마가 따라다니면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잖니. 그래도 어른스럽고 자기 일은 알아서 하던 애가 갑자기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니까 걱정이 되는구나. 우리 진혁이가 얘기 정도만 들어 줬으면 좋겠어.”

걱정이 듬뿍 묻어나는 어머니의 목소리다. 이 목소리는 그전에 들어본 적이 있다.

‘전신마비가 되어서 누워있을 때, 어머니가 나에게 저런 식으로 말을 걸었지.’

의사가 어머니에게 아들의 청각이 살아있으며 뇌파가 움직인다고 알려주기도 전부터 어머니는 진혁의 곁에 머물러 이야기를 했다. 마비가 되어있어도 살아있기만 하면 된다며, 어머니는 다정하게 아들에게 속삭였다. 목이 쉴 때까지 끊임없이, 손발을 주무르고 귓가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진혁을 임신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뱃속에서 발로 걷어차는 아이였어서 몸 밖으로 나왔을 때 한숨 돌렸다든지, 처음 기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걷기 시작했을 때. 학교에 가고, 군대에 가고, 아버지와 함께 하던 빵집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어머니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마비되어 누워있던 시간은 길고 끔찍했다. 무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치던 시간 역시 길고 끔찍했다. 하지만 파출부 일을 하면서 밤마다 찾아와 귓가에 들려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있어서, 그 목소리를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어서 진혁은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목소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엄마.”

진혁이 미간에 내 천(川)자를 그리며 찡그렸다.

“그래, 잘 부탁해.”

전화를 끊고 난 후 진혁이 투덜거렸다.

“차라리 누굴 죽이라거나 어떤 집단을 궤멸시키라거나, 이런 의뢰가 차라리 쉽지. 이런 유의 의뢰는 내 담당이 아니라 환희당 담당이라고.”

환희당은 고위직 관리를 비롯해 필요한 사람을 유혹해 정보를 빼내거나 입교하도록 권유하는 부서다. 이름난 기녀와 악사 등이 다수 소속되어 있다. 진혁은 다른 7개 당과는 긴밀하게 교류했으나 환희당은 그리 가까이하지 않았다.

진혁은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저장되어 있는 사람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이왕 해치울 거 지금 끝내버려야지.’

그는 그중 세 번째, 부모님 다음으로 저장되어 있는 임진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사용자의 사정으로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진혁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이 더 깊어졌다.

‘일하는 중인가 보군.’

지금 당장 어떤지 확인하러 가야 할까?

촬영일까지는 이틀 정도 시간이 있다. 그는 우선순위를 가늠해 보았다.

무림맹과의 일전을 준비할 때는 인명보다 작전의 효율성을 중시했다. 그에게 정말로 중요한 사람들은 그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 이 세계에서, 진혁은 가족들의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설정해놓았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진희.

동생과 촬영, 어느 것이 더 먼저 오는지는 당연하다. 그는 쉐프의 새하얀 조리복을 벗고서 검은색 후드를 눌러썼다.

‘병원에 가 볼까.’

진희가 일하는 곳이 어딘지는 저번에 들었다. 소망시에서 한참 아래쪽에 위치한 광주광역시의 국립사랑병원이다. 이사할 때 이삿짐을 옮기는 것까지 도왔기 때문에 어떻게 가면 되는지도 알고 있다.

‘서울시에서 광주광역시까지는 천안과 익산, 정읍을 찍고. 철도를 따라 달려가면 되겠군.’

그의 길을 가로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초상비를 이용해 허공으로 날아오른 진혁은 새처럼 날렵하게 신법을 사용해 광주로 향했다.

천안.

고층빌딩에서 창문을 닦고 있던 청년이 머리 위에 느껴지는 그림자를 보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김 씨! 저기 방금 뭐가 지나가지 않았어?”

“까마귀겠지.”

“그것보단 한참 큰데…….”

“헛소리하지 말고 마저 닦아. 아직 닦을 창문이 많다고.”

청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다시 창문을 닦기 시작했다.

익산시,

꽃사과 농장.

남자는 잘 익은 사과를 하나씩 따서 광주리에 넣고 있었다. 하나, 둘, 셋. 흠이 있는 사과는 골라내서 다른 바구니에 넣어야 한다. 멀쩡한 사과가 하나 있으면 흠과는 여섯 개가 넘는다.

“올해 농사도 망쳤나?”

한숨을 푹푹 쉬며 바닥을 내려다보는 그의 앞에 희미한 그림자가 비쳤다. 허민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돌고래처럼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하늘을 가르며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여보! 저기 좀 봐. 하늘에 돌고래가 있어.”

“미친 소리 하지 말고 사과나 마저 따요. 내일 납품할 분량은 있어야지.”

“진짜 있었는데. 내가 조기 야구회에서 뛰면서 공 좀 잡아 봐서 동체 시력은 좋다고.”

남자는 아쉬워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조금 전에 보였던 그림자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구름을 잘못 봤나 보죠. 어서 이 상자도 마저 채웁시다.”

남자는 다시 사과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무성한 잎새가 바람에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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