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01화 (101/656)

제 101화

29장

진혁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지숙이 통역을 계속해주었다.

“오랜만에 고향의 맛을 느끼셨다고 하시네요. 혹시 명함은 없으신지요?”

진혁이 바로 명함집에서 명함을 꺼냈다.

“물론입니다.”

“나중에 비서를 통해 따로 연락주신다고 하셨어요.”

정지숙이 웃었다.

“제 입맛에만 맛있는 게 아니라고요. 대사님도 인정하셨어요.”

그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타르트 타탱에 들어간 사과는 일부러 씹힘맛을 살리려고 덩어리를 남겨놓으신 거죠?”

“맞습니다.”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달지 않아요. 설탕량을 조절하셨어요?”

“아니요, 다른 맛을 추가했지요.”

진혁이 웃었다.

“그건 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정지숙이 타르트 타탱을 한 조각, 다시 입안에 물었다. 다디단 캐러멜 향을 입은 사과는 부드럽고 상냥하게 졸여졌다. 파삭파삭한 파이지와 함께 입안에 넣으면 과자와 사과가 조화를 이루어 춤추는 것처럼 신이 난다. 거기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향기는 알 듯 말 듯 했다.

“알코올 기운이 다 날아가서 모르시는 걸 거예요. 칼바도스를 추가로 넣어서 사과 향을 더했습니다.”

“아!”

정지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각을 대단히 섬세하게 풍부하게 느끼시는 것 같아요.”

그녀가 손짓했다.

“이분은 미스터 랑비에입니다. 한국으로 밀가루를 수출하시는 사업을 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랑비에와 정지숙이 아주 가까이 다가섰다. 짧게 양쪽 뺨을 갖다 대고 입으로 쪽 소리를 낸다. 유럽식 인사인데, 진혁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랑비에가 다가가자 진혁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프랑스 대사보다 사실 실질적으로 필요한 인맥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 사람과 뺨을 맞대고 싶지는 않다. 진혁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랑비에가 손을 내밀었다.

“랑비에입니다. 젤로스라는 회사의 한국 지부를 맡고 있죠. 오늘 빵은 정말로 맛있습니다. 바게트가 최고입니다.”

그는 프랑스어 억양이 섞인 한국어로 천천히 말했다. 낯익은 회사 이름을 듣고 진혁이 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H&J 카페 앤 베이커리 역시 젤로스 사에서 밀가루를 받아서 쓰고 있습니다. 매일 납품만 받다가 이렇게 책임자님을 만나게 되니 반갑군요.”

“이 훌륭한 빵들이 우리 밀가루로 만들어졌다니 아주 반갑군요.”

랑비에가 힘차게 진혁의 손을 움켜쥐었다. 펜을 많이 잡아 인이 박인 손은 따뜻했다.

“H&J 카페에서 점점 더 밀가루를 가져가는 양이 늘어나던데. 이런 맛이라면 놀랄 일도 아니죠.”

랑비에는 숨김없이 감탄을 토해냈다.

“혹시 T55가 아닌 다른 밀가루들도 취급하십니까?”

진혁이 묻자 랑비에가 대답했다.

“공식적으로는 취급하고 있지 않지만, 본사에서 샘플을 구해 올 수는 있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은 90% 이상 T55를 선호하니까요. 드물게 45번을 쓰는 곳도 있지만, 다른 번호대는 특이한 일 없이는 거의 사용할 일이 없습니다.”

진혁은 그 특이한 일이 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디저트 서바이벌 쇼의 시즌 2 촬영 같은 걸 말하는군.’

“제가 여러 가지 빵을 실험해 보느라, 다양한 밀가루가 필요한데 젤로스사의 밀가루라면 좋겠습니다.”

랑비에가 진혁의 양손을 붙잡고 열렬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제가 특별히 소량씩 샘플을 판매해 드리죠. 제가 개인적으로 프랑스에 다녀올 때 준비해 오겠습니다. 어떤 종류가 필요한지 이야기해 주시죠.”

진혁이 짧게 대답했다.

“35번부터 135번까지, 1kg씩 전부 필요합니다. 당연히 가격과 수고비를 따로 드리죠.”

“Bien sur(물론이죠)! 다음 주까지 가져다 드리지요.”

랑비에는 텅 비어 있는 바게트 바구니를 힐긋 곁눈질하며 안타깝게 말했다.

“바게트가 아주 훌륭합니다. 바게트를 사러 매일 가고 싶을 정도입니다.”

정지숙이 덧붙였다.

“안타깝게도, H&J는 바게트는 팔지 않아요. 치킨 파이와 베이컨 파이라는 퓨전 빵에, 오페라와 밀푀유, 그리고 몽블랑 같은 달콤한 간식류를 주로 팔지요.”

“Oh mon Dieu!”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느님 맙소사. 이런 빵을 팔지 않는다니. 어째서입니까?”

진혁이 대답했다.

“베이커리보다 파티쉐리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커피와 차에 곁들이는 간식 종류를 주로 하고 있어서죠.”

랑비에가 간곡하게 말했다.

“그럼 바게트는 아예 취급하지 않으실 예정입니까?”

“가게의 방향 자체가 달라지니까요.”

지금은 간식류의 빵을 주로 취급하면서 음료를 판매하고 있다. 주식용 빵까지 함께 취급하게 된다면, 카페로서의 정체성보다 빵집의 기능이 더 강해질 것이다. 진혁은 백진영의 음료 역시 H&J 카페 앤 베이커리의 정체성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시점에서는 식사용 빵을 추가할 생각이 없었다.

“꼭, 꼭 추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맞아요. 저번에 바게트 시식할 때도 다들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

정지숙이 거들었다. 그녀는 저쪽에 놓인 빈 바구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봐요, 제일 먼저 사라진 빵이 바게트잖아요. 바게트 빵을 파는 빵집은 많지만, 맛있는 바게트를 파는 곳은 드물어요. 임 쉐프님이 결론을 내리실 일이지만, H&J에서 꼭 바게트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진혁이 대답했다.

“고려해 보겠습니다.”

정지숙이 소개를 마치고 드디어 빵을 먹으러 자리를 비웠다. 이미 비어버린 바게트 바구니를 보고 아쉬워하면서도, 크림 브륄레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해치운다.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마지막의 퐁당 쇼콜라까지 맛본다.

‘역시 미각은 나쁘지 않아.’

어설픈 음식 평론가보다 정지숙의 평이 훨씬 낫다.

‘인맥도 만만치 않고.’

주한 프랑스 대사와 젤로스 사의 한국 지부장까지, 어디까지 인맥이 펼쳐져 있는지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진혁은 주눅 들거나 어색해하지 않고 무덤덤하고 자연스럽게 정지숙을 대했다.

‘빵만 잘 굽는 게 아니라, 사람이 커.’

정지숙은 하얀 접시 위의 새까만 퐁당 오 쇼콜라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케이크 위에는 새하얀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새끼손톱만 한 초록색 잎이 올려져 있다.

‘민트 잎과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라. 잘 어울려.’

이열치열.

뜨거운 것에 뜨거운 것을 더하여 이긴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뜨거울 정도로 따끈따끈한 퐁당 오 쇼콜라 위에 놓여 있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전혀 녹지 않고 있었다.

‘아까 가져왔으니까 벌써 녹아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한 거지.’

그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퐁당 오 쇼콜라에는 1성의 염화 기공이 적용되어 있다. 퐁당 오 쇼콜라의 중심부에 자리한 염화기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있는 ‘열’을 전부 끌어들여 빵이 따뜻하도록 유지한다. 열을 전부 빼앗긴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인간이 포크를 들이대기 전까지 차가움을 잃지 않았다. 최적의 맛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진혁이 퐁당 오 쇼콜라 하나하나에 진기를 심어둔 덕분이다.

정지숙이 포크를 들어 귤 크기의 작은 초콜릿 케이크를 반으로 조각내자, 안에서 꾸덕한 초콜릿이 주륵 흘러내렸다. 표면은 브라우니처럼 기포를 품은 초콜릿 케이크지만 안쪽은 점점 더 액체화되어 있다. 이대로 접시를 들어 올리면 흘러내리는 초콜릿을 그대로 마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포크로 바닐라 아이스크림 절반과 초콜릿 빵 조각을 집어 올려 입안에 넣었다.

“따뜻하면서 차가워.”

초콜릿은 뜨겁고 아이스크림은 차갑다. 두 가지 온도가 입안에서 섞이며 폭발적인 단맛이 입천장과 혀와 잇몸을 감쌌다.

“어떻게 온도를 이렇게 유지하죠?!”

희열이 척추를 타고 뇌까지 치솟는다. 달콤한 쾌락에 눈물까지 고일 정도다. 정지숙이 눈을 깜빡이며 묻자 진혁이 대답했다.

“기업 비밀입니다.”

“아하하하하!”

그녀가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임 쉐프님의 빵은, 정말 최고예요. 그리고 이 아이스크림은 완전히 처음 먹어보는 맛이에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만들었으니까요. 다른 데서는 보신 적이 없는 게 당연하죠.”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H&J에서는 하지 않는 메뉴잖아요? 세상에. 따로 케이터링을 부탁하지 않았으면 어떡했을 뻔했어.”

정지숙이 단언했다.

“저와 친구, 함혜숙이가 유화 전시회를 열 거예요. 거기에서 특별한 분들을 모시고 작은 행사를 할 건데, 그때 꼭 케이터링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진혁이 대답했다.

“일정이 가능하다면요.”

랑비에가 크게 웃었다.

“미시즈 정이 케이터링을 부탁한다고 하는데 바로 승낙하지 않고, 거절할 수 있다니 대단합니다. 역시 윈도우 베이커리는 오래 비울 수가 없죠?”

“예. 아무래도 저 혼자 있다 보니까, 쉬는 날이 아니면 어렵습니다.”

“제가 임 쉐프님 가능하신 날로 맞춰 보죠.”

정지숙이 손가락을 꼽았다. 진혁이 웃었다.

“그래 주신다면 감사하죠.”

이번 샹송 페스티벌에 참가하면서 따로 받은 돈이 H&J 카페 앤 베이커리의 일주일 치 매출을 가볍게 넘는다. 심지어 H&J 카페 앤 베이커리의 매출이 적은 것도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훌륭한 인맥도 생겼지.’

백정흠이 자신의 인맥을 통해서 밀가루 샘플을 얻어오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진혁이 더 이렇게 바로 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30장

“엄마.”

“진희야, 어쩐 일이야?”

샌드위치 가게에 방문한 진희를 보고서, 장은효 여사가 반갑게 웃었다. 진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진호가 가게를 지키고 있는 거야?! 목줄도 없이?”

“목줄은 싫어하더라고. 진호가 우리 집 고양이인 거 남들 다 알아. 영물이야, 영물. 말도 알아듣고.”

“그래도 다칠까 봐 걱정되는데…….”

“아침마다 따라와서 저기 있다가, 동네 한 바퀴 돌아오고, 그리고 엄마 퇴근할 때 같이 돌아가. 진짜 아들 같아.”

“엄마가 그렇게까지 얘기하면.”

진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엄마아.”

“왜, 우리 딸아.”

“난 너무 무능한 것 같아.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하고.”

“무슨 일이야?”

훌쩍거리기 시작한 진희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장은효가 놀라 물었다.

“괜찮아?”

“요즘 너무 힘들어. 난 눈치도 없고…….”

딸이 아예 흐느끼기 시작하자 은효가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엄마한테 다 얘기해봐.”

◈          ◈          ◈

사흘 후.

받은 밀가루로 이것저것 시험을 해본 결과, 진혁은 마음에 드는 결과를 얻었다.

“타입 45 밀가루를 한국의 박력분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보통 타입 55를 한국의 중력분, 타입 45를 박력분으로 생각해서 만들라고들 한다. 하지만 진혁이 실제로 실험해 보았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 밀가루는…… 보통 빵을 만들 때 사용하는 강력분이 단백질 13% 이상. 과자를 만들 때 쓰는 박력분이 단백질 10% 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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