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0화
“유키코 김. 지금 자네 다음으로 유력한 우승 후보지. 나마무라 베이커리에서 노동 장학생으로 제빵을 시작했어.”
“한국에서 제빵을 시작했어요?”
“명문 도쿄제과학교 출신인데, 무슨 이유에선지 몇 년 전 갑자기 서울에 와서 나마무라 베이커리에 취업했어. 서울 생활이 5,6년 됐는데 한국말은 꽤 유창하게 하네.”
백진영이 서류를 뒤적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이걸 삼촌이 다 조사한 거예요?”
“내가 이런 걸 어떻게 조사하냐?”
백정흠이 핀잔을 주었다.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 섭외될 정도의 인물은 보통 어느 정도 알려져 있어. 기존에 했던 인터뷰라든지. 호텔 홍보 광고에서 언급한 경력이라든지. 여기 유키코 김 같은 경우는 한일 혼혈에 미모가 되니까, 나마무라 베이커리 개발팀 팀장으로 제빵 잡지에서 몇 번 인터뷰도 하고 그랬어. 그런 것들을 모아서 한 번에 정리한 거지.”
그가 다른 종이들을 하나씩 넘겼다.
“출연자 목록은 이미 촬영 현장에서 공개되었으니까. 누군지만 알면 어렵지는 않은 일이야.”
백진영이 마지막 종이를 보며 웃었다.
“진혁이 네 것도 있다.”
“제 건 어째서?”
“지금 이렇게 우리가 다른 출연자들의 정보를 찾아보는 것처럼, 그들도 네 정보에 목말라할 거야. 지금까지 너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공개되었는지 네가 알아둘 필요도 있지.”
“흠, 맞는 말씀입니다.”
진혁은 자신의 정보가 적혀 있는, 사진이 첨부된 서류를 읽어보았다.
“향인 대학교 출신, 소망 베이커리 연수, 데코레이션 페어 수상, H&J 카페 앤 베이커리 헤드 쉐프.”
“그래. 그리고 네가 유명해졌던 9시 뉴스 건에 카스텔라 개발 건까지.”
“녹색 농부 조합하고 함께 하고 있는 건은 알려져 있지 않나 보네요?”
“그냥 카페에서 샐러드를 받아서 팔고 있는 정도? 너희 어머니께서 아예 지분을 인수해서 같이 하고 있는 건 사람들이 알 수가 없지. 나야 의형에게 직접 들었지만.”
“제가 추구하는 것은 유기농, 자연적인 프리미엄 음식…… 그리고 특기는 푸드 카빙(Food carving)에 크로캉부슈.”
“네가 데코레이션 페어와 뉴스에서 보여준 모습이니까.”
백진영이 말했다.
“완전히 잘못 알려져 있는데? 요즘은 세계 각국의 기본 빵에 소스를 배합하는 작업 중이잖아, 너.”
“기본 빵을 만들고 있다고?”
“바게트와 베이글, 치아바타와 난. 북유럽의 크넥브뢰드까지, 주식용 빵들을 한 번씩 만들어 봤지요.”
진혁이 싱긋 웃었다.
“세상에 식사용 빵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내가 너무 아는 것이 없었나 싶기도 하고. 소금과 밀가루, 이스트만 사용하고서도 이렇게 다양한 질감의 빵을 만들 수 있다니, 재밌더라고요.”
“소스라면?”
“기본 빵에 찍어 먹거나 발라먹을 수 있는 것들을 배합해 봤어요. 멕시코식 과카몰리나 살사 소스. 사워크림, 으깬 감자나 부드러운 버터, 발사믹 식초를 뿌린 올리브유, 그리고 직접 만든 잼 종류들까지.”
“잼을 만들었어?”
“이번에 조금씩 테스트용으로 만들어 봤어요. 만들기 쉽잖아요? 설탕과 꿀, 과일만 졸이면 되니까. 시험장에서도 분명히 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살구 잼과 블루베리, 라즈베리에 딸기, 복숭아와 포도까지 전부 시험해 보았습니다. 밀크티와 녹차 잼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백정흠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나 녹차 좋아한다.”
“시험장의 기본재료실에 말차를 비롯한 녹차와 얼그레이, 잉글리쉬 브랙퍼스트를 비롯한 다양한 차와 커피가 구비되어 있었거든요.”
백진영이 부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
“진짜 좋겠다. 마음대로 써볼 수 있겠네.”
“그래서 차와 커피를 응용한 디저트도 조금 연습해 볼 참입니다.”
백정흠이 단호하게 말했다.
“연습 좋지. 연습해서 사무실에도 좀 보내주게.”
“삼촌?”
백진영이 의문을 표했다.
“삼촌 다이어트 하시잖아요. 숙모가 빵은 안 된다고 하던데.”
“흠흠, 흠. 그래도 의조카가 회사 홍보를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는데 내가 거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지. 진혁이가 만든 빵을 시식하는데 콜레스테롤 수치가 대수냐?”
“당연히 대수죠! 숙모한테 말씀드릴 겁니다?”
진혁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는 발효 효모 빵을 중심으로 건강 빵을 만들어 볼 셈입니다. 우리꼬맹이밀로만 만들어 봤기 때문에.”
“시험장에는 우리꼬맹이밀 가루가 없어?”
“예. 그래서 거기에 준비되어 있던, 프랑스 쪽 밀가루로 연습을 좀 해봐야겠어요.”
진혁이 수첩을 꺼냈다. 그가 밀가루 브랜드들을 하나둘씩 읊었다.
“젤리스 사의 T45부터 T135까지, 온갖 밀가루가 다 준비되어 있더군요. 국내는 바게트 만들 때 T55 밀가루를 자주 쓰니까 다른 밀가루들은 아예 구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건 좋았습니다.”
“그럼 그 샘플들을 구해 봐서 써봐야겠군.”
“그렇죠. 샘플로 소량씩 써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이력서를 한 장씩 넘겨 보던 백진영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사람, 전에 마케팅 안영윤 부장님이 크게 봤던 그 사람 아니에요?”
“아닌데. 닮긴 했는데 더 어려.”
“음?”
진혁이 서류를 받아보았다.
“루이스 강? 어디선가 본 얼굴 같은데.”
“무대에서 봤겠지.”
프로필을 보더니 진혁이 웃었다.
“그놈 형이구나.”
◈ ◈ ◈
며칠 전, 촬영이 끝난 직후의 일이다. 빠리의 한 빵집 앞에서 한국인 청년이 국제 전화를 받았다.
“루이 형? 무슨 일이야. 나 출근해야 해.”
강 마리오.
한국에서 방송을 통해 프랑스식 정통 제빵을 선보이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던 SNS 스타.
그는 대회에서 처참하게 참패한 다음 방송을 중단했다.
강남의 화웅 카페 앤 베이커리에서 정말로 배울만한 스승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쉐프는 연락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제빵을 배우기로 했다.
빠리 제 13 대학 앞의 오래된 가게에서 빵을 배우기 시작한 지 이제 일주일. 원하는 시간에 만들고 싶은 빵을 만들던 때와 달리, 매일같이 엄격한 쉐프 아래에서 혹독하게 일을 배우는 중이다.
“형처럼 맘 좋은 상사 만나서 한국에서 노닥노닥 텔레비전 출연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고. 용건만 말하고 빨리 끊어.”
“화웅에서 일하는 쉐프 알려 달라며?”
강 마리오가 반색하며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기쁨에 가득 차 그가 외쳤다.
“알아냈어?! 어떻게!”
“이번에 나랑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더라고.”
스카이프 영상 통화 건너편에서 강 마리오가 입을 크게 벌렸다.
“그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 나간다고?”
남동생이 놀라는 모습을 보며 루이스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촬영 전까지는 극비야. 너한테만 몰래 알려 주는 거라고.”
“어디의 어떤 사람이야?! 그 사람 빵 진짜 맛있어. 20년 차쯤 된 쉐프겠지? 형처럼 스위스에서 공부했어?”
루이스가 말했다.
“아니, 한국인이야. 네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그럴 리가 없어.”
강 마리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한국인 쉐프 중에서 그 정도 빵을 만드는 사람은 다 알아. 주영모 쉐프님이나, 몬드베이커리 총 쉐프님이나. 그분들 스타일은 아니었어.”
루이스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임진혁. 이러면 아나?”
“그 손재주가 좋은 미친 새끼?”
마리오는 격렬한 분노를 표현하며 한 손을 주먹 쥐고 붕붕 돌리다가, 그만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격렬한 반응을 보고서 루이스가 물었다.
“미친 새끼? 무슨 일이 있었어?”
“갑자기 내 옷을 빌려 가서 고이 돌려줬다고! 깡패 같은 놈이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특이하네. 이번엔 얌전했어.”
“그 사람이 화웅 쉐프라고? 그럴 리가 없어. 걔는 초콜릿이랑 푸드 카빙만 전문으로 한다고. 경력도 나하고 비슷하단 말이야.”
“솜씨가 좋아. 손도 빠르고.”
“농담하지 마, 형. 나 지금 출근해야 돼.”
마리오가 짜증 내며 전화를 끊었다.
“별 시답잖은 농담하려고 이 새벽에 국제 전화를 걸어? 하여튼 장난기는 알아줘야 해.”
대륙 건너편에 있는 루이스는 통화가 끝난 스마트폰을 응시했다. 그가 피식 웃으며 전화기를 덮었다.
“텔레비전 보고 놀라면서 기분 나빠할까 봐 미리 알려준 건데, 안 믿네.”
그가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임진혁, 1라운드에서는 초콜릿 모델링이나 푸드카빙은 아예 솜씨를 보여주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있다, 이건가? 어쨌든 2라운드에서는 쉽지만은 않을 거라고. 나도 있고, 리처드도 있고.”
◈ ◈ ◈
“서래마을 샹송 페스티벌에서 브레드 케이터링을 해주셨으면 해요. 당일 1시간 정도만 해주시면 되고, 콜드브레드로 해도 상관없으니까요.”
손님 정지숙의 소개로 오게 된, 서래마을 샹송 페스티벌. 매년 가을마다 열리는 이틀짜리 축제다. 그는 둘째 날 점심의 출장 뷔페를 맡았다.
“직접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이것도 다 경험이니까요.”
다행히 학교도, 소망 베이커리도 쉬는 날이다. 아버지가 흔쾌히 대신 H&J 카페 앤 베이커리에 하루 와주시기로 해서 여기에 올 수 있었다.
‘프랑스 빵들을 시험해 볼 수 있으니까.’
그는 이번에 정통적인 프랑스 빵들을 구워 가져왔다. 일부러 가게에 내놓지 않는 메뉴를 선정해서 만든 것은 연습을 겸해서이기 때문이다.
“급하게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많은 종류를 준비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정지숙은 하얀 테이블보 위에 깔린 빵 종류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전에 맛보았던 바게트도 맛있었는데, 다른 빵들도 만만치 않군요.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바게트 먼저 드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일 담백한 맛이니까요.”
메인인 퐁당 쇼콜라는 진하고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다. 거기에 타르트 타탱, 디저트인 마들렌과 크림 브륄레, 다쿠아즈까지 총 여섯 종류를 준비했다. 정지숙은 빵을 향해 달려드는 손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들렌과 다쿠아즈는 따로 포장 판매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들어오고 있어요.”
“100개 이상 주문하신다면 제작할 의향도 있습니다만, 그 이하로는 아무래도.”
“좋아요, 제가 따로 주문할게요.”
“일주일 전에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때 머리가 반쯤 벗어진, 양복에 넥타이를 맨 중년 백인 남자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정지숙이 유창한 프랑스어로 반갑게 인사하며 남자에게 진혁을 소개했다.
“Monsieur, voici mon ami Lim. Il est patissier et boulanger.”
바로 진혁에게 설명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빵과 제과를 함께 하는 능력 있는 쉐프라고 말씀드렸어요. 주한 프랑스 대사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