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99화
28장
다 같이 박수를 치면서 임진혁을 바라보았다. 유키코가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은 조금 의외였다. 반면 일그러진 얼굴도 박수를 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가장 훌륭한 맛의 조화를 보여주신 분은, 8번 임진혁 쉐프입니다.”
“컨셉 면에서는 조금 애매모호하지 않나, 라고 생각했지만 사회자분께서 이것은 추석이 맞다. 라고 단언해 주셨죠.”
“예, 이 옆에 있는 낫의 디테일까지 살렸으니까요. 자칫하면 설날로 보일 수도 있는 제사상입니다만. 여기 올라와 있는 가을 과일들을 보면 딱 추석이라고밖에 할 수 없지요.”
이희주가 웃었다.
“코코넛 무스의 부드러운 맛과 놀랍게 잘 어울리는 라이스 케이크의 질감, 라이스 케이크 안에 숨어있는 홍시. 반죽에 섞여 있는 쌉싸름한 감잎까지, 모든 맛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특히 쌉싸름한 감잎의 맛이 없었다면 홍시가 지나치게 달게 느껴졌을 수도 있어요. 단호박과 감잎을 적절히 투입한 것이죠. 아주 좋았습니다.”
“첫 번째로 통과한 임진혁 쉐프는 다음 라운드에서 혜택을 한 가지 받게 됩니다.”
“다 같이 박수 쳐 주세요!”
임진혁은 앞으로 나아가서 심사위원들 옆에 섰다. 다른 사람들은 기대감과 초조감, 불안감에 뒤섞인 얼굴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부러워하는 모습에 진혁이 미소 지었다.
‘좋아. 시작은 괜찮군.’
“두 번째 통과자는…….”
그는 다음 통과자들이 하나둘씩 불려 나오는 동안, 편안한 표정으로 계속 서 있었다. 김산호 PD는 놓치지 않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 ◈ ◈
카메라가 멈추었다. 점수판을 받아든 아드레아노 존부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
“왜 이렇게 거지 같냐. 제대로 하는 사람이 둘, 셋?”
스텔라 위스커스가 거들었다.
“전체적으로 빵과 과자들 수준이 높지는 않았어요. 창의적이지가 않아. 적당히 기존에 만들어 왔던 디저트를 겉모양에만 끼워 맞추려고 허둥거리고.”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주영모 쉐프가 말했다.
“추석이라는 테마이기 때문에 한국인 쉐프들이 라운드 1에서는 선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발렌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 할로윈에는 호텔에서 한정 디저트 같은 것을 내놓지만 추석이나 설에는 전통 음식 판매에 주력하니까. 그래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한국인들에게 대단히 유리한 주제라고 생각했는데 더 괴상한 것들을 내놨어. 그래도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일 줄은.”
아드레아노 존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라리 새해 첫날 같은 걸 하는 게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주영모 쉐프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도 그중에 주목할 만한 사람이 좀 있었죠. 나는 유키코 김이 눈에 들어왔는데, 어떠셨습니까? 나마무라 베이커리 서울점의 수석 쉐프. 한국인과 일본인의 혼혈이라고 들었는데. 송편도 알고 있고, 한국에서 오래 살지는 않은 거로 아는데 컨셉은 잘 잡았다고 봅니다.”
스텔라 위스커스가 턱을 괴고서 말했다.
“유키코 김은 그 무능해 보이는 긴 머리부터 잘라야 돼. 요리하는 데 방해되는데, 쓸데없이 그런 털뭉치를 머리에 달고 다니면 안 된다고.”
“머리가지고 뭐라고 하진 말죠. 제대로 틀어 올려서 쉐프 모자 안에 넣었잖아요?”
“맛의 균형도 못 잡았어. 단맛이 애매하고 카스텔라도 맛이 흐렸거든.”
“흠.”
스텔라가 말했다.
“똑같이 맛이 별로더라도, 디자인 감각은 브라이언 신이 좋았어요. 맛까지 제대로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보기에는 제일 좋았는데 아쉬웠죠?”
주영모가 대답했다.
“그 차례 피자 말이죠. 저도 괜찮게 봤습니다. 이력이 어떻게 되죠?”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올라갔죠. 지금은 벨라지어 호텔의 수쉐프로 일하고 있죠. 경력이 아주 좋습니다.”
김산호 PD가 거들었다.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이번 방송을 통해 부모님을 찾고 싶어 하고 있어요. 저희도 적극 도울 생각입니다.”
“아무리 안타까운 사연이 있어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 못하면 탈락이에요.”
스텔라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거야 그렇죠.”
아드레아노 존부가 눈을 깜빡였다.
“그 정도 디자인 감각이면, 맛에만 조금 더 신경 쓰면 금방 올라올 텐데.”
“그는 부모님에게 말을 하고 싶다며 한국어도 꾸준히 공부해 왔어요. 꽤 하더라고요.”
지금까지 언급된 후보들의 사진을 내려놓으며 아드레아노 존부가 말했다.
“나는 루이스 강이 마음에 드는데.”
그가 동양인 청년의 사진을 집어 들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단맛과 짠맛의 조화를 확실히 했으니까. 모양은 별로였지만 맛은 제일 좋았지. 이 중에서 실력은 탑클래스라고 해야 할걸.”
“신예 쉐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죠.”
“그, 마리오 강의 형입니다.”
김산호 PD가 말했다.
“마리오 강?”
“전에 대회에서 한 번 탈락한 다음에 요즘은 안 하고 있긴 한데. 한국의 SNS에서 제빵으로 유명한 아마추어 베이커입니다.”
“방송에서 화제는 되겠군.”
“스토리 이야기를 하면 서니 윌슨을 빼놓을 수 없죠. 제일 짧고 인상적인 경력이니까요.”
“그 의사?”
“예.”
네 사람이 서니 윌슨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주영모가 말했다.
“의사라면 그냥 병원에 취업해서 일하면 되지, 왜 여기에 있냐고.”
“그러니까 더 재미있는 배경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이미 탈락한 사람은 아무 쓸모 없어요.
스텔라가 고개를 저었다. 서니 윌슨이 만든 브라우니 케이크는 실수가 없는, 평범한 맛이었다. 다만 그뿐이었다.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들과 비교하면 견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방송상의 스토리를 위해서라고 해도, 쉐프 경력이 1년 미만인 사람이 통과한 것 자체가……. 김산호 PD가 일부러 조작한 건가요?”
“아닙니다. 1차 테스트는 훌륭하게 치렀는데, 문화적인 컨셉 자체를 못 잡은 게 아닌가 싶은데.”
주영모가 물었다.
“문화적 컨셉이라고 하면…… 원래 우승 후보였던 안토니오 칼루치오는 어떻습니까?”
“컨셉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는데.”
“확실히 브루스케타는 잘 구웠어요. 표면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고, 토마토 소스도 잘 어울렸죠. 셀러리 하나 깎아 놓고 소나무니 어쩌니 하면 웃길 뿐이죠. 단풍으로 우길 거면 단풍 하나만 가지고 밀어붙이든가.”
“그러게.”
“아직까지 제일 주목할 만한 사람은…….”
“저는 브라이언 신이라고 생각해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유키코 김이지.”
주영모 쉐프가 고개를 저었다.
“루이스 강이지. 한 명 더 꼽자면, 임진혁?”
아드레아노 존부가 이야기하자 스텔라가 웃었다.
“임진혁이요? 죽은 사람의 무덤을 만든 사람?”
“컨셉이 조금 괴상하긴 했는데, 맛은 좋았어.”
주영모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스텔라가 고개를 저었다.
“어디, 두고 보자고요. 그는 이번에 컨셉이 조금 아슬아슬했지만 아주 맛있었으니까요. 다음 컨셉은 컨셉이 없는 거니까 더 잘할 수도 있죠.”
◈ ◈ ◈
한 번 텔레비전 촬영을 했다고 해서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다음 촬영까지 일주일.
진혁은 그동안 차분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요리의 범주를 늘려나갔다.
“촬영은 잘했냐.”
아버지가 전화한 것도 5일 만이었다. 진혁이 일부러 무거운 목소리로 뜸을 들였다.
“말씀드리기가 좀.”
“어떻게 되었길래…… 아니다. 그래,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해라.”
염려가 가득한 목소리. 약간은 서운할 정도다.
‘다음 라운드에서 특권도 하나 획득했는데.’
<특권>
한 라운드에서 압도적으로 우수한 점수를 냈을 때, 다음 라운드에서 <특권>을 하나 가질 수 있다. 지난 시즌 1에서 첫 번째 라운드의 특권은 다음 라운드에서 재료를 제일 먼저 선택하는 것이었다.
‘메리사 리는 초콜릿을 골라 갔지.’
뛰어난 전략이었다. 그녀가 초콜릿을 골랐기 때문에 2인자였던 유명한 쇼콜라티에는 자신이 제일 잘 다루는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빵을 만들어야 했다. 결국 우승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쇼콜라티에는 2회전에서 어이없이 탈락했다.
그 이후에도 각 라운드마다 제일 좋은 점수를 얻은 자는 특권을 하나씩 얻었다. 1라운드에서 절반을 탈락시키고, 이후에는 제일 점수가 낮은 2명씩 패자부활전을 하여 한 명씩 떨구어지는 방식이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야겠지. 그러려면 정보가 필요하고.’
“어떻게 되었는지는 TV에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진혁이 자못 심각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백정흠이는 만나 봤냐?”
“아직요. 의삼촌이 저를 찾으셨나요?”
“너한테 할 말이 있다더라. 아마 촬영 건 같은데.”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부탁한 일이 있거든요.”
‘잘 됐군.’
진혁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 ◈
영업을 마치고 청소를 다 하고 나면, 직원들을 먼저 보낸다. 방송에 나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연습을 하고 싶다고 했다.
“도대체 몇 시까지 연습을 하는 거야. 나오는 것도 새벽에 나오면서.”
백진영이 커피를 타주었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이라는 품종을 새로 들였는데, 요즘 새로운 향을 내본다고 이것저것 블렌딩해보는 중이다. 그가 물었다.
“오늘 저녁에 삼촌이 들른다고 했는데, 나도 같이 있어도 되나?”
“상관없지.”
“앗싸!”
백진영이 주먹을 쥐며 기뻐했다.
“삼촌이 바빠서 요즘 만나기 힘든데, 진혁이 곁에 있으면 자주 볼 수 있단 말이지.”
“그래도 조카잖아?”
진영이 웃었다.
“사촌 형하고 누나들도 제대로 못 뵙고 있을걸? 요즘 사업 확장한다고 바쁘셔. 우리가 완전히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고 있잖아.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다며 공장을 늘리고 있거든.”
“텔레비전에서 홍보 좀 잘 해봐야겠네.”
“그렇지. 너의 역할이 크다.”
농담을 주고받는데 백정흠이 들어왔다.
“많이 기다렸나?”
“아니요. 방금 문 닫고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1라운드에서 좋은 소식 있었다고 들었다.”
평소 입고 다니던 작업복과 달리, 몸에 꼭 맞는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백정흠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순박한 시골 농부처럼 활짝 웃었다. 닳고 닳은 사업가라고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니까. 아주 잘했어.”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긴! 네가 이긴 사람들이 어떤지 네가 몰라서 그래.”
그가 품에 끼고 온 대봉투를 들어 보여주었다.
“네가 부탁한 거다.”
“감사합니다.”
백정흠이 서류 봉투를 열고 종이를 꺼냈다. 진혁이 <특권>을 받았을 때 조사를 부탁했던 결과물이다.
“이름과 경력, 사진을 넣으니까 이력서가 되어버리는군요.”
진혁이 감탄해서 말했다. 그는 낯익은 얼굴이 미소 짓고 있는 사진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