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98화
시한폭탄처럼 붉은색으로 선명하게 빛나는, 전자시계의 남은 시간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몇 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심사위원 셋이 사회자와 함께 동시에 외쳤다.
“5, 4, 3, 2, 1”
“다 되었습니다! 여러분, 양손을 들어 주십시오!”
요리사 전부가 일제히 양손을 번쩍 들었다. 심사위원이 하나씩 호명하기 시작했다.
“1번, 유키코 김.”
이름이 불린 유키코는 자신이 만든 디저트를 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성씨를 듣고서 진혁은 생각했다.
‘김 씨라고? 한국계인가?’
“디저트에 관해서 설명해 주세요.”
그녀는 심사위원의 앞에 디저트를 사뿐히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송편들이 소복하게 놓여 있었다. 녹색과 흰색, 노란색과 분홍색. 어딜 봐도 송편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송편 모양의 카스텔라입니다. 밤양갱과 사과양갱, 그리고 배 양갱을 갈아 넣었어요.”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조그맣게 구멍이 송송 나 있는 점을 통해서 송편이 아니라 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작은 빵 중 하나를 집어 들고서 주영모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심사위원들을 위해 설명해 주었다.
“송편 모양이군. 이건 추석에 빚는 전통적인 한국의 떡입니다.”
스크린에 온갖 모양으로 빚어진 송편 사진이 떠오르며, 외국인 심사위원 두 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양을 잘 살렸군요.”
맛을 본 스텔라 위스커스가 평했다.
“펙틴과 물을 24시간 이상 불렸으면 더 좋았을 텐데. 주어진 시간이 총 3시간이라, 불리는 데만 한 시간, 식히는 데에 한 시간 반을 썼군요. 카스텔라보다 양갱을 만드는 데에 더 시간을 오래 썼어요.”
“3시간을 들인 만큼의 맛인지 볼까요.”
심사위원이 송편 카스텔라를 하나씩 집어 들어 맛보는 동안, 진혁은 편안한 마음으로 그 광경을 구경했다.
‘임기응변은 나쁘지 않아. 종이를 잘라 틀 자체를 만들어서 송편 모양으로 만들어지도록 순식간에 준비했지. 이 테마를 예상하고 준비해온 사람이야.’
심사위원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스 킴.”
아드레아노 존부가 유키코를 호칭하자, 갑자기 한국인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통역이 옆에서 ‘미스 김’이라는 호칭이 한국에서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 주고 나서 아드레아노 존부가 눈썹을 약간 치켜세웠다. 유키코가 서둘러 말했다.
“유키코라고 불러 주세요, 미스터 존부.”
“부드럽게 씹히는 카스텔라 맛에 밤양갱의 질감이 잘 어울리네요.”
스텔라가 살짝 웃자, 조금 전까지 굳어 있던 유키코 역시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주영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입맛에는 양갱이 덜 달아요.”
유키코의 입술이 떨렸다. 손끝부터 천천히 몸을 떨면서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주영모가 다시 말했다.
“요즘은 웰빙을 생각해서 만든다고 하니까. 이 정도 덜 단 맛이라도 양갱이라고 할 수는 있지.”
시큰둥한 그 말에, 아드레아노 존부가 평을 덧붙였다.
“카스텔라가 담백한 만큼 양갱에 좀 더 맛을 포인트를 주어야 하지 않았나. 맛이 비어있다는 느낌이 없지는 않습니다.”
심사위원들이 말하는 목소리는 원래 당사자 외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조절되어 있다. 하지만 진혁에게는 전부 다 들렸다.
‘생각보다 평가가 낮은데.’
진혁은 팔짱을 끼고서 여자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녀는 이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표정을 숨길 줄 모르나.’
유키코가 들어가고, 곧 두 번째 사람이 심사를 받았다. 2번은 아까 이것저것 야채를 채 썰고 있던 이탈리아인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진한 눈썹, 거기에 인상적인 콧수염까지. 잊기 쉬운 얼굴은 아니다. 그는 단풍 모양으로 깎아 올린 당근과 각진 토마토소스를 얹은 브루스케타를 만들었다. 오른쪽에는 작은 셀러리를 깎아 만든 소나무를 올려서 색상의 조화를 꾀했다.
주영모 쉐프가 물었다.
“안토니오 쉐프. 이게 추석하고 무슨 상관이죠?”
“가을 숲을 테마로 해서 단풍나무와 소나무를 만들었습니다…….”
“만들기 쉬운 거로 고민 없이 적당히 골라 만든 것처럼 보이는군요. 무엇보다 이 소나무와 단풍나무의 크기 차이가 너무 커요.”
“숲이라기보다 가을 정원 느낌이군요.”
맛을 보기도 전에 혹평을 받은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4번, 5번, 6번.
특별히 인상에 남는 작품은 없었다. 진혁은 7번이 들고나온 음식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똑같은 송편을 테마로 했는데 유키코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들었다.
“차례 피자입니다.”
‘차례상 피자라.’
파인애플과 소시지, 페퍼로니와 올리브, 피망 등 다양한 재료를 올려 구운 화이트 씬 피자. 모차렐라 치즈는 테이블보 역할을 하도록 듬뿍 깔려있고, 그 위에는 체다 치즈 접시가 올라왔다. 배 모양으로 깎아 놓은 파인애플과 사과 모양이랍시고 갖다 놓은 그린 올리브, 그리고 대추 모양으로 조그맣게 깎아 놓은 블랙 올리브 모두 체다 치즈 접시 위에 올라가 있다.
“브라이언. 체다 치즈하고 파인애플이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나요? 모양을 신경 쓰다가 맛을 잃어버리는 건, 아마추어들에게는 흔한 실수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프로페셔널 쉐프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죠.”
브라이언이라고 불린, 안경을 쓴 한국인 남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진혁의 차례가 되었다.
“사랑스러운 녹색 반구군요.”
스텔라가 이야기하자 주영모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무덤입니다.”
“무덤이라고요?!”
“무덤?”
스텔라 위스커스와 아드레아노 존부가 놀랐다. 주영모가 설명했다.
“이 앞에 서 있는 하얀 케이크는 비석이고, 그 앞에 있는 작은 상과 그 위에 올려진 건포도와 말린 살구, 견과류는 차례 음식을 표현했군요.”
“맞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 쉼터인 묘지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것인데 이렇게 케이크로 만들 생각을 하다니.”
주영모가 인상을 찡그리자 아드레아노 존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텔라가 말했다.
“할로윈에 해골 모양이나 관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건 조상의 묘는 아니지 않습니까?”
“조상의 묘는 다른가요?”
“그럼 주 쉐프는 이 케이크가 추석이라는 테마를 잘 표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나요?”
“……그건 아니죠.”
주영모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옆에 있는, 이 막대 과자에 꽂힌 사탕 말입니다. 벌초용 낫이에요. 추석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서 풀을 자르거든요. 일 년에 두 번, 명절 때마다 해야만 하는 일이죠.”
“그럼 표현을 잘했다는 뜻이로군요.”
스텔라가 이야기하자 주영모 쉐프가 머뭇거렸다. 그건 또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동안 아드레아노 존부가 말했다.
“컨셉에 대해서는 한국인인 주 쉐프가 생각하는 게 맞을 수 있지. 하지만 일단 맛부터 보죠.”
“그래요.”
아드레아노 존부는 먼저 조그맣게 잘린 비석 코코넛 무스 케이크에 포크를 가져갔다. 그는 본래 폭신폭신하고 촉촉한 식감의 음식을 즐겼기에, 먼저 무스 케이크부터 맛보고자 했다.
“코코넛의 맛과 향을 아주 잘 살렸군요. 바닐라를 함께 넣어서, 코코넛이 너무 진하지 않으면서 고유의 맛을 풍기게 북돋웠어.”
혀에 와 닿는 촉촉한 질감까지, 아주 만족스럽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면 A를 주었을 것이다.
그는 그 옆에 있는 녹색 봉분에 포크를 가져갔다. 옆에서 이미 녹색 케이크를 먹고 있었던 스텔라가 눈을 크게 떴다.
“이 중간에 있는 하얀 층이 뭘까요.”
그녀가 입을 벌리며 말했다. 분홍빛 입술에는 크림이 잔뜩 묻어 있었다.
“쫄깃쫄깃하고 부드럽고, 씹는 맛이 있는 음식이군요. 이게 이 안쪽에 들어있는데 대단히 맛있어요. 대체 뭐지?”
“라이스 케이크입니다.”
주영모가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떡이라고 하죠. 쪄낸 밀가루로 만든 음식입니다. 떡을 한 겹 안쪽에 밀어 넣었네요.”
“라이스 케이크는 한국 음식점에서 먹어 봤는데, 너무 쫀득거려서 별로였어요.”
“그래서 아주 적은 양을 넣어서, 크림과 함께 어울리게 만들었군요.”
주영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얇게 해놓은 떡은 저도 처음 봅니다. 새로운 시도군요.”
“나쁘지 않아요. 네모난 빵 위에 올려놓은 견과류나 건포도도 빵하고 잘 어울리구요. 세 종류의 음식이 사탕 낫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서 나쁘지 않네요. 저는 좋아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칭찬하였다. 아드레아노가 말을 이었다.
“이 코코넛 무스 케이크. 바닐라와 코코넛 무스가 조화롭군요. 아주 좋아요.”
스텔라와 주영모가 놀라서 아드레아노를 보았다. 두 사람 다 그가 ‘아주 좋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들어보았다.
“컨셉에 대해서는 내가 무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이 맛은 통과할 수밖에 없는 맛입니다.”
“맞아요. 주 쉐프는요?”
주영모는 접시를 핥고 있었다.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이 깨끗한 접시를 보면 아실 수 있죠?”
셋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혁은 피식 미소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호평을 받은 이들도 있고 악평을 받은 이들도 있다. 울상을 한 이들, 자신만만한 표정을 한 이들 모두 무대에 섰다.
단체 사진이라도 찍을 것처럼 각자 자신의 번호가 쓰여 있는 발판 위에 올라서 있는 그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하나씩 비추어졌다. 뜨거운 조명이 내리쬐자 무대 위는 열기로 가득 찼다.
“더워서 땀이 줄줄 흐르네. 당신은 안 더워요?”
유키코가 물었다. 진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은데.”
두 사람이 짧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신경질을 냈다.
“여기에 떠들러 온 것도 아니고. 시끄러워.”
곧 조명이 반짝이며 심사위원들이 다시 앞으로 나왔다.
“이번에 24명 중 12명이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요?”
참가자 모두가 함께 대답했다.
“예.”
“Yes.”
“지금 여기서 탈락해서 돌아가게 되신다고 해도 그건 여러분이 무능한 쉐프라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이번에 만들었던 음식이 우리의 기준과 맞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음 기회에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실 수 있으리라 믿으며, 여러분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사회자 이희주가 차분하게 말하고 뒤로 물러나자 주영모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번 1라운드에서 제일 맛있는 빵을 만드신 분은!”
그가 의미심장하게 뜸을 들이며 이야기했다.
“이 중에서 제일 어리신 분입니다.”
참가자들은 서로 두리번거리면서 누가 제일 어린지 살폈다. 진혁은 멀뚱히 서 있었다. 안토니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가……?”
누가 봐도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인 그가 진지하게 농담처럼 말하자 다들 웃었다.
주영모 쉐프가 이름을 읽었다.
“임진혁 쉐프입니다.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