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97화
‘겉모습보다 맛의 조화를 훨씬 중시하는 여자. 너무 단 건 싫어했지.’
이전 데코레이션 페어에서도 본 적이 있던 심사위원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체적으로 혹평을 하는 타입이었다. 진혁이 선호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강유솔이 중얼거렸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것보다 더 예쁘네.”
스텔라 위스커스가 금발에 벽안의 미녀이긴 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가치는 외모에 있지 않다. 진혁은 강유솔에 대한 최저의 평가를 마이너스로 조정했다.
‘정말 별 볼 일 없는 놈이군.’
“그리고 이분이 디저트 팩토리의 주인이자, 디저트의 황제. 아드레아노 존부입니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거기에 반짝이는 펄이 들어간 검은색 양복을 입은 아드레아노 존부가 나타났다. 남미의 피가 섞여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썹이 짙은 그가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디저트 꼬미와 수 여러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2억 원의 상금을 받으실 한 분. 제 정식 제자가 되어 디저트 팩토리 압구정점을 맡으실 한 분을 찾습니다. 그 한 분이 여기에 계실까요?”
참가자들이 다 함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열정적인 그 박수에, 진혁 역시 한몫을 했다.
‘최대한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보여 보자고.’
강유솔과 일본인 여자 역시 열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희주가 손을 들어 올렸다. 순간적으로 조명이 다시 꺼졌다.
“첫 번째 미션은 추석입니다.”
이희주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불이 들어왔다. 그가 옆으로 비켜서자 거대한 스크린에 단풍으로 물든 가을 산이 나타났다. 그리고 두 글자가 떠올랐다.
<추석>
외국인 참가자를 배려하기 위하여, 통역이 영어로 설명을 덧붙였다. 진혁은 머릿속으로 몇 가지 메뉴를 떠올렸다.
‘가을 단풍. 차례상. 성묘.’
시골 마을. 감나무에는 감이 열리고, 까치들이 그 위에 올라선다. 시골에 머무는 노부모가 귀향하는 자식들을 반긴다. 얼마 전 진혁과 진혁의 가족들은 고향에 내려가 외가를 방문했다. 아침 9시 뉴스에 나왔다며 집안의 경사라고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았다. 그리고 진혁은 그때 특별한 디저트를 만들어 제공했다.
‘그때로 할까.’
그렇다. 그는 백수십 년 만에 외가 쪽 식구들을 다시 만났다. 그때 외할머니와 이모들을 위해, 이미 한 번 추석을 표현하는 디저트를 만들어 드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번에 강남의 H&J 카페 앤 베이커리에서 개점 준비를 하면서 가을풍 디저트를 세 종류 개발했다. 그것들을 합쳐서 그 이점을 최대한 살릴 셈이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 ◈
기본 재료방은 넓었다. 알파벳 순으로 정리된 재료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속에서 바로 걸어가서 필요한 것을 집어오는 진혁은 퍽 눈에 띄었다. 그는 이미 무엇을 만들지 결정했고 그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되었다.
일본인 여자가 손을 뻗어 바닐라 시럽을 집었다. 진혁은 바닐라 시럽에 손을 뻗다가, 그 옆의 메이플 시럽을 집었다. 그녀가 웃었다.
“저 때문에 바닐라에서 메이플로 변경하신 건 아니죠?”
진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한국말을 하는군요.”
“원숭이하고는 할 필요가 없죠.”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 원숭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여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키코입니다.”
“임진혁.”
옆에서 시럽을 살피고 있던, 붉은 곱슬머리를 한 키 큰 백인 남자가 끼어들었다.
“리처드 베이커.”
자기소개를 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미식축구 선수처럼 거대한 체격의 남자가 싹싹하게 얼굴을 들이대자 유키코도 임진혁도 뒤로 물러났다. 유키코가 웃음을 터트렸다.
“Hi, Richard.”
리처드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씩 웃고서는 초콜릿 시럽을 집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유키코 역시 바닐라 시럽을 가지고 일어났다.
“진혁 씨도 힘내요.”
그녀는 어색해하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낮은 가죽구두가 울려 또각또각 소리가 났다.
진혁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어떤 성격인지 종잡을 수가 없군.’
저 여자가 바닐라 시럽을 써서 어떤 디저트를 만들더라도, 진혁이 만드는 업그레이드 홍시 단호박 타르트보다 더 맛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주영모와 아드레아노 존부는 위에 있는 심사위원석에서 내려다보면서 출연자들이 무엇을 하는지 관찰했다. 반면 스텔라는 출연자들 사이를 직접 걸어서 돌아다니면서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찰했다.
주영모가 13번을 보면서 혀를 찼다.
“13번, 엘리사 크레센트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고요. 컨셉 점수를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무지개색으로 앞치마를 둘러 눈에 확 띄는 갈색 머리 여자였다. 그녀는 팔팔 끓인 설탕으로 알파벳 글자를 만들고 있었는데 대단히 팝아트적인 감성으로 보였다.
“저걸 어떻게 추석이라고 할 수 있겠느냔 말이야.”
반면 아드레아노 존부는 좀 더 기본적인 것을 살폈다. 키 175cm 정도, 한국인 남자 요리사를 응시하며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3번 이중철 참가자는 케이크 반죽을 케이크 판에 부을 때 아무것도 칠하지 않았습니다. 저 상태라면 굽고 나서 빵을 꺼낼 수가 없을 텐데요.”
“옆에 스프레이를 가지고 왔는데 뿌리는 걸 깜빡했나 보군.”
첫 TV 출연과 사람들의 시선, 무대에서의 압박에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는 이들은 적지 않다. 긴장감이 고조되면 더욱더 그렇다.
그중에서도 유달리 차분한 이가 있었다.
최고급 프랑스산 밀가루와 신선한 달걀. 홍시와 메이플 시럽, 정제된 사탕수수 설탕. 소금과 인스턴트 드라이 이스트. 자신이 가져온 재료들을 오른쪽에 쌓아두고 진혁은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메라는 그런 임진혁을 클로즈업해서 살폈다. 심사위원들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무엇을 만들지 결정했나 보군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짧게 말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신선한 달걀을 고민하지 않고 바로 집는데요?”
현재 냉장고에 놓인 버터와 달걀, 우유는 한두 종류가 아니다. 여러 종류일 뿐만 아니라 전부 신선도가 다르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것이 신선하고 왼쪽에 있는 것이 오래된 물건이다. 일부러 다양하게 갖추었는데 놀랍게도 진혁은 신선한 것들만 골라 바로 가져갔다. 재료의 생기(生氣)를 한눈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달걀만이 아니야. 밀가루도 햇밀을 바로 집었는데, 그게 우연인지 어떤지는 두고 봐야지.”
주영모가 말했다.
“지금 스케치북에 아이디어를 그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바로 움직이고 있어.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타입인지, 아니면 정말로 계산을 다 끝내고 움직이는지는 결과를 두고 봐야 알겠지만.”
주영모가 한 말을 통역이 영어로 바꾸어 들려주자, 아드레아노 존부가 말했다.
“저 쉐프를 전에 본 적이 있는데 솜씨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어디서 보았길래요?”
“대학생 대회에서. 그런데 여기에서 또 보다니 재미있는 일인데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18번!”
그녀가 외치자 18번 참가자가 반죽하던 손을 멈추고 얼굴을 들었다. 그는 오른쪽에 준비해둔 스테인리스 보울을 떨어뜨릴 뻔했다. 등에는 식은땀이 가득한 상태로,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 강유솔이 고개를 들었다.
“예, 예?”
“18번 참가자. 탈락입니다.”
스텔라 위스커스가 차갑게 말했다. 강유솔이 눈을 크게 떴다.
“제, 제가, 아직 빵을 다 만들지도 못했는데요. 제가 만든 빵을 맛보시면,”
“손을 씻지 않고 반죽을 하고. 그 더러운 빵을 지금 우리들에게 맛보라는 건가요?”
강유솔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었다. 그는 아까 어린 애송이에게 한마디 한 이후로, 몸이 좋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오한이 들고 벌벌 떨려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솔직히 서 있는 것도 힘겨웠다. 그래도 주방에서 오래 서 있었던 경력이 있어, 거의 머릿속이 백지가 된 상태로 어떻게든 습관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는 홍동백서라 하여 사과와 배를 활용한 컵케이크 두 개를 나란히 만들 계획이었다. 하지만 스텔라가 호통을 치자 더 이상 행동하지 못하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양손에 반죽을 쥔 채 그대로 수도꼭지 아래에 손을 갖다 댔다. 손과 함께 반죽이 씻겨나간다. 그 광경을 본 스텔라의 미간이 좁혀졌다.
“반죽을 물로 씻기까지! 당신은 자격이 없습니다. 여기서 나가세요.”
“죄, 죄송합니다.”
어깨를 움츠린 강유솔은 반문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그대로 손에 밀가루와 반죽을 묻힌 채 무대 뒤로 나갔다. 한 명이 어이없이 탈락했다. 심지어 요리가 끝나기도 전에.
한창 자신의 요리에 집중하고 있던 다른 참가자들은 힐끗힐끗 곁눈질을 하며 강유솔을 훔쳐보았다. 경연장 자체에 무거운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진혁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감잎을 갈아 넣은 얇은 파이지 반죽이 원하는 만큼 녹색을 띠지 않았다. 그는 녹색 식용 색소를 조금 더 집어넣어 원하는 색깔이 나올 때까지 다시 주물렀다.
‘좋아, 이 색깔 정도면 되겠다.’
그리고 찹쌀떡 반죽을 하면서 뜨거운 물을 조금씩 넣는다. 이 떡의 반죽은 다른 반죽과 달라서, 뜨거운 물을 넣어가면서 하지 않으면 굳어 버린다. 반죽을 마친 진혁은 방금 만들어진 반죽을 길게 늘여서 점성을 확인하고 오른쪽에 두었다. 네모난 틀에 넣어 각진 모양을 만들 셈이다. 세 번째 냄비에서는 코코넛 무스를 만들기 위해 새하얀 코코넛을 물에 풀어 익혀간다.
‘그리고 기다려야지.’
파이지가 발효되어 숙성되고, 팥이 익어가는 시간 동안 진혁은 팔짱을 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붉은색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리처드 베이커가 양팔로 반죽을 길게 잡아 늘였다. 마치 수타면을 만드는 것처럼 힘찬 움직임이었다. 그는 초록빛 눈동자에 웃음을 담고서 반죽을 끓는 물에 그대로 집어넣었다. 어떤 음식이 될지 상상도 되지 않는, 제과제빵과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기묘한 동작이다.
‘수제비라도 만드나? 꼭 중화요리 같군.’
머리를 높이 올려묶고 쉐프 모자를 쓴 유키코는 흰 목덜미를 드러내고서 머랭을 쳤다. 그녀는 방금 만든 머랭을 달걀노른자 반죽에 넣었다. 밀가루를 체치고 있는 것을 보니 무엇을 만드는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붉은 즙을 팔팔 끓이고 있었다.
‘나가사키 카스텔라에, 설탕에 졸인 딸기인가? 그걸 어떻게 추석으로 꾸며낼 셈이지.’
다들 하얀색 쉐프 복을 입고 있는 가운데, 현란한 무지개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한국인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무지개라도 만들 것처럼 색색의 색소를 배합했다. 열여섯 가지는 될 것 같은 현란한 색깔의 반죽들이 숙성되기를 기다렸다.
부지런히 달걀을 부쳐내고 있는, 보통 키에 안경을 쓴 한국인.
검은 곱슬머리에 코가 오뚝한 이탈리아인은 당근과 양파, 오이와 셀러리를 가늘게 채 썰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살피며 진혁은 차분히 기다렸다,
“앞으로 30분.”
‘지금 당장 숙성시켜버릴 수도 있지만, 카메라와 심사위원들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손을 쉬고 있는 진혁의 옆에, 스텔라 위스커스가 다가왔다. 통역이 함께 따라와 한국어로 설명해 주었다.
“손을 놓고 있네요.”
“기다리는 중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바삐 손을 움직이고 있는데 신경 쓰이지는 않나요?”
진혁이 빙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숙성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바로 오븐에 빵을 집어넣었다. 동글동글한 빵 하나와 녹색 빵 하나. 그리고 조그마한 갈색 빵.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빵들이 그가 의도한 모양 그대로 구워져 나왔다. 그는 그 위에 얇게 버터를 발랐다.
바닥 역할을 할 거대한 정사각형 모양의 녹색 과자. 그 위에 동그마한 녹색 빵을 올린다. 녹색 반구는 봉긋하니 솟아올라, 진혁이 의도했던 대로의 모양이 되었다.
그 앞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하얀색 코코넛 무스 케이크가 양갱처럼 우뚝 섰다.
진혁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그 모양이 드러나자, 옆에 있던 한국인들이 눈을 크게 떴다.
“묘지…….”
“무덤 모양의 디저트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