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96화
‘해를 끼칠 만한 일은 아니야.’
오히려 호의에 가득 찬 시선이다. 그는 명함을 받아 쉐프복의 팔 위쪽에 달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지금은 다른 분들께도 빵을 나눠드려야 하니, 이후에 따로 연락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늦어도 이번 주 목요일까지는 연락해주세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시간이어도 괜찮으시다면 오늘 저녁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진혁이 자리를 뜨고, 다른 손님들에게 바게트를 나눠 주는 사이 정지숙은 심호흡을 했다.
‘서래마을 샹송 축제의 케이터링.’
사실 굳이 진혁에게 맡기지 않아도 될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만드는 다른 빵을 먹고 싶었다. 아랫사람들에게 시켜서 교섭하면 될 것을,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직접 제안을 한 이유는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란 자신이 있어서였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미각을 칭찬받은 것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남편, 두 번째가 이 어린 쉐프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미각이 까다롭다며 불평했지만, 이 남자는 자신이 예민하고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 ‘구별할 수 있음을’ 알아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었다.
‘서래마을 샹송 축제에는 프랑스 대사를 비롯해 한국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이 많이 나오니까.’
크게 와인 사업을 하고 있는 자부터, 한국에 팔리는 프랑스 제 밀가루를 독점하다시피 해서 판매하는 자까지, 빵집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사람들을 많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면 더 좋은 빵을 만들 수 있겠지.’
정지숙은 방금 받은 빵에 포크를 가져가려다가 내려놓았다. 바게트는 손으로 먹는 것이 맛있다.
손끝에 닿아오는 따뜻한 감촉은 지금 빵이 먹기에 좋은 온도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살짝 벌린 입술 안으로 빵 조각을 욱여넣었다. 보드랍고 보송보송한 하얀 빵속의 감촉이 혀에 닿고서, 단단하고 바삭바삭한 겉껍질이 입천장에 닿아왔다. 하지만 껄끄럽거나 입천장을 긁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이를 움직여 씹기 시작하자 빵 속과 껍데기가 합쳐져 또 다른 맛을 자아냈다.
‘단단하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고, 떡보다 부드럽고 빵보다 단단해.’
가장 단순한 빵. 소금과 이스트, 밀가루만을 사용한 이 식사용 빵은 잔재주나 기교를 부리기 어렵다. 재료가 적은 만큼 기본기가 튼튼해야 맛있는 빵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바게트는 100% 합격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짜지 않으며 달지 않고, 겉은 단단하면서 속은 부드러워.”
그녀는 감탄하며 칭찬했다.
그런 그녀를 저쪽 멀리서 김가영이 부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좋겠다. 나도 임 쉐프님 바게트 먹고 싶다.’
물론 손님 하나만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빵을 먹기 전에 긴장한 듯 머뭇거리던 손님들 모두 진혁의 바게트를 입안에 넣고서는 표정이 바뀌었다. 굳은 표정이 저절로 풀리고 미간이 펴지며 입술을 벌린다.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편안해지며 어깨를 펴고 심호흡을 한다. 천국이라도 갔다 온 것처럼 태평한 얼굴이 된다.
곧 손님들이 일어나서 데스크로 다가왔다.
“바게트 특별 주문은 안 되나요?”
“너무 맛있어요.”
“저 이것 좀 사 가고 싶은데, 바게트 얼마에요?”
“언제부터 메뉴에 추가하실 계획이세요?”
카운터에 다가오는 손님들을 보면서 김가영은 당황했다. 그녀는 조금 전에 임진혁이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되풀이했다.
“아시다시피 시식용으로 가게 안에 계신 분들께만 특별히! 드린 제품이니까요. 확실히 정해지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이건 바게트를 정식으로 판매하지 않으면 항의가 들어올 각인데?’
김가영은 힐긋 임진혁 쉐프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상냥하게 질문을 받아 주던 임 쉐프는 이 자리에 없다. 평소에 손님을 대할 때는 항상 미소와 친절함을 보여주지만, 요리를 할 때는 전혀 다른 사람 같다.
꼿꼿이 편 허리와 넓은 어깨, 그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물 흐르듯 연계하는 동작.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감출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그녀는 국립극장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발레단이 와서 하는 공연을 본 적이 있었다. 십수 년, 길게는 수십 년의 연습 끝에 도달한 완벽한 공연이었다. 가느다란 실개천이 흐르는 것처럼 우아하였다가도 한순간에 폭포가 몰아치듯 강한 힘으로 몰아붙여 한시도 시선을 뗄 수 없게 한다.
임진혁 쉐프의 요리는 그 공연과도 같았다.
‘이러니까 임 쉐프한테 못 물어보고 나한테 와서 물어보지.’
김가영은 혀를 찼다. 저 우아하고 힘이 있는 공연을 중단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임진혁은 어느샌가 가게 손님들에게 범접하기 어려운 스타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임 쉐프님처럼 반죽을 하려면 진짜 십 년은 넘게 수련해야 할 것 같아.’
김가영이 무슨 생각을 하든 관계없이, 진혁은 옆에서 다시 새로운 반죽을 시작하였다. 조금 전에 바게트를 했으니, 이제 응용 편의 음식을 다시 할 차례다.
‘초식에 허초를 섞듯이 관계없는 동작을 이것저것 섞어서 무공의 묘리가 보이지 않도록.’
그는 레시피 책의 응용 편을 펼쳤다. 그중 영국 요리 편이 눈에 띄었다.
“치킨 파이는 한 번 해봤으니까, 셰퍼즈 파이를 해볼까. 속만 수비드로 익히면 재미있게 될 것 같은데.”
셰퍼즈 파이는 파이지 위에 잘게 간 양고기와 야채를 섞고 그 위에 매쉬드 포테이토, 즉 으깬 감자를 올려놓고 굽는 요리를 말한다. 치킨 파이에 민스드 미트 파이까지 요리해 본 진혁이다. 셰퍼즈 파이만 끝마치면 비프 웰링턴을 포함해서, 영국식 파이 요리는 전부 해본 셈이 된다.
“키드니 파이는 내장탕을 즐기는 아버지께서 좋아하셨으니까.”
내장을 매운 양념과 함께 섞어 익혀내자 어른들이 선호하는 맛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양고기를 잘게 다져서.”
그는 집중해서 손을 움직였다. 호신강기를 사용하면서 반죽하면 반죽이 바로 산산이 조각나기 때문에 강기를 거두고 맨손만을 쓴다. 그는 오늘도 파이지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얇게 파이지를 뽑아냈다. 그 기세는 자신만의 예술 작품에 집중하고 있는 장인과도 같다.
손님들은 진혁의 주변에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구경을 했다. 정지숙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람을 잘 봤어. 나이가 어려서 그렇지, 장인이야. 장인.’
노력하는 젊은이를 보면 언제나 즐겁다. 그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음식이 저절로 기대되었다.
‘꼭 샹송 축제에 초대해야겠어.’
27장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일주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고 촬영 첫날이 되었다.
촬영 첫날, 무대에 오른 임진혁은 다른 스물세 명의 참가자들을 살폈다.
자신을 포함한 24명의 요리사.
절반 정도는 동양인이지만, 나머지는 명백하게 외국인으로 보인다. 공통점은 모두 새하얀 쉐프복을 차려입었다는 것, 그리고 오른손과 왼손에 굳은살이 배겨있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 요리를 해온 자들이 저절로 갖게 되는, 세월의 흔적이다. 23쌍의 손들을 보고서 진혁은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아.’
검을 잡은 이들의 손에 생기는 굳은살과, 요리용 칼을 잡은 이들의 손에 생기는 굳은살. 이들은 전부 각자의 주방에서 자신만의 빵을 만들기 위한 길을 오 년 이상 걸어온 자들이다. 이 요리사들은 모두 자신만의 방식을 갖고 있을 테고, 진혁은 그들에게서 배울만한 점들을 뽑아올 수 있을 것이다.
천안투마공으로 근육의 움직임을 살피고, 놀라운 오감을 이용해 사용하는 재료가 무엇인지, 그리고 분량까지 알아내면 그들의 평생 비결을 순식간에 가져올 수 있다. 같은 주방에 선다면, 유튜브나 방송에서 숨기는 부분까지 파악이 가능하다.
‘그리고 오늘 이 중에서 절반이 탈락하지.’
천장 이곳저곳에 설치된 카메라들이 출연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긴장해 있는 사람들 가운데 혼자 편안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는 임진혁은 확연히 눈에 띄었다. 유난히 눈에 띄는 큰 키에, 모델처럼 곱상한 얼굴이라 더 그렇다.
옆에 서 있던, 짧은 머리의 동양인 남자가 목소리를 냈다.
“어디 쉐프지? 못 보던 얼굴인데.”
진혁은 동양인 남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진혁보다 머리 둘은 작은 키에, 온몸이 근육질이다. 요리만이 아니라 근육을 만들기 위한 운동을 따로 계속해온 몸매다. 흔히 보디빌더 몸매라고 하는, 보여주기 위한 근육이 꽉 차 있는 체격을 보고서 진혁은 머릿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외공을 익힌 것도 아니고, 보여주기식으로 만든 저런 물 근육을 갖고 뭘 한담.’
그는 진혁에게 말을 건 것이 아니었다. 진혁의 옆에 서 있던 긴 머리의 동양인 여자에게 질문한 것이었다.
평범한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동양인 여자는 150cm 정도로 보였다. 카메라를 의식했는지,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는 묶지 않고 그대로 풀어서 늘어뜨렸다. 요리를 할 때는 팔에 팔찌처럼 끼고 있는 머리끈으로 묶어 올릴 것이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더니 유창한 외국어로 말했다.
“無?口を.”
뜻은 모르지만 어느 나라 말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보이는 고르지 않은 치열까지 고려하면 그녀의 국적을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왜국에서 왔나?’
“뭐야. 쪽바리야?”
동양인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더 이상 여자에게 말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 서 있던 진혁에게 말을 걸었다.
“난 백제 호텔의 수쉐프인 강유솔인데. 어디 호텔에서 왔어?”
진혁은 굳이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아예 못 들은 것처럼 쳐다보지도 않자, 강유솔이 한 번 더 물었다.
“내 이름 못 들어봤어?”
진혁은 강유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찔끔한 강유솔은 눈을 껌뻑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자기소개를 했으면 대답을 해야지.”
‘친절하게 자기 정체도 알려 주는군.’
현대에 와서, 진혁은 이런 식으로 본격적으로 시비를 거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지렁이가 짖어 대는 것을 보는 것처럼 신기한 기분이 들어 진혁은 강유솔을 응시했다. 조금 전과는 다른 위압감을 느낀 강유솔이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얼굴도 어려 보이는데, 어디서 건방지게.”
그는 오직 자신만을 향한, 지극히 미약한 살기에 노출되었다. 떨면서 말하는 목소리에는 힘없이 공포만이 가득했다.
‘조금 더 하면 지리겠는데.’
진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대 위에서 다른 참가자가 소변을 보면서 기절하는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진혁이 상관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원치 않았다.
‘이 녀석은 나중에.’
그때 사회자 이희주가 마이크를 들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
낭랑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무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여러분은 한국과 미국에서 선정되어 오신, 특별한 분들입니다.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수련을 쌓아 두각을 나타내고 계신 분들이시죠. 여기에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 여러분들께서 이미 알고 계실, 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순간적으로 불이 꺼지고, 다양한 빛깔의 조명이 내리쬐었다. 점멸하는 빛이 잠시 멈추었고, 이희주의 옆에 검은색 탁자가 솟아올랐다. 아니, 검은 린넨으로 덮인 탁자였다. 그 위에는 세 명의 심사위원이 웃고 있었다.
“한국 제빵계의 대부이신 주영모 쉐프십니다. 종류를 가리지 않는 제빵의 달인으로 다양한 레시피북을 출판하셨죠.”
“주영모다. 싹수 있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스텔라 위스커스, 호주 베이킹 협회의 부회장이십니다. 디저트 체인의 여사장이자 초콜릿의 달인이시죠.”
“반갑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가장 빛나는 보석들인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실시간 통역이 스텔라 위스커스의 말을 바로 통역해 주었다. 진혁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