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95화
홍시와 단호박, 밤과 고구마, 닭고기와 베이컨. 치즈케이크와 타르트.
그는 지금까지 만든 빵의 종류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내가 만들어 본 종류 자체가 너무 적다.’
빵을 분류한다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소금과 밀가루, 물과 이스트 즉 제일 ‘기본적인 재료만을 사용한(lean)’ 빵과 버터와 달걀을 포함해 다양한 재료를 ‘풍부하게(Rich)’ 사용한 빵으로 나뉜다.
‘나는 기본 빵은 거의 만들지 않았어.’
식감에 따라서는 ‘부드러운(Soft)’ 빵과 표면이 딱딱하고(Hard) 속이 부드러운 빵으로 또 나눌 수 있다. 보통 소프트 계열과 하드 계열이라고 통칭한다.
‘린 하드 계열 빵은 소망시에서는 잘 팔리지도 않았으니까.’
소망시에 거주하는 이들 자체가 연령이 높고, 부드러운 식감을 선호한다. 정확히는 진혁의 어머니인 장은효 여사가 딱딱한 빵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식사용 빵으로 많이 쓰이는 치아바타나 베이글, 바게트와 같은 빵들은 만들 일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린 소프트 계열의 식빵 정도?’
무공으로 치자면 찌르기와 베기, 막기를 수련하지 않고 이후의 상급 초식만 수련한 셈이다. 진혁은 동체 시력과 후각, 미각 등 육감을 포함한 모든 신체능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누군가 만든 빵을 한 번 먹으면 재료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미각. 빵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근육의 움직임까지 따라 해서 그대로 재현해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육체 능력. 그렇지만 백수십 년 전에 수업 시간에 한두 번씩 만들어 보았던 빵을 모델 없이 갑자기 내서 만들라고 한다면?
‘이번에는 기초 테스트를 머랭 치기로 했지만 그건 단순히 운일 뿐이야. 테스트로 바게트 만들기 따위가 나왔으면 문제가 됐을 수도 있으니까.’
기초 체력을 기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에 린 하드 계열의 빵을 포함해서, 종류별 빵을 한 번씩 다 만들어 보자.’
그래서 그는 페이스트리 쉐프들 사이에서 인기라던 ‘주영모의 제과 대백과 101선’을 가져왔다. 흉기로 써도 좋을 만큼 두꺼운 풀컬러 도해 책이다. 그는 목차를 대강 훑어보았다.
‘1번부터 101번까지. 주영모의 레시피를 전부 만들어 본다.’
하루에 10개씩, 열흘 내에 전부 만들어 볼 참이다. 일하는 틈틈이 하나씩 1인분의 레시피를 만들면 될 것이라 여겼다.
기본 빵을 응용한 레시피는 제쳐놓고 일단 다섯 개의 기본 빵부터 시작할 것이다.
‘일단 바게트와 버터 롤, 브리오슈와 크루아상.’
그는 책을 펼쳐놓고 흘깃 훑어본 다음, 바게트 빵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을 골라냈다. 흔히 그냥 ‘바게트’라고만 부르지만 바게트 빵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중량과 길이, 그리고 쿠프라고 부르는 칼집의 모양에 따라서 다섯 개로 나뉜다. 1kg의 무게에 55cm의 길이, 칼집이 5개 있어야 하는 드 리브르(Deux livres). 그리고 650g의 반죽 무게에 68cm의 길이로 날씬하며 칼집이 5개 있어야 하는 빠리지앵(Parisien). 그 외에도 바게트(Baguette), 바타르(Batard) 그리고 제일 작고 가벼운 피셀(Ficelle)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다.
‘바게트 반죽을 할 때는 조리대에 반죽을 내리치지 않는다라.’
진혁은 차분히 주영모가 설명해 놓은 대로 따라갔다. 바게트를 만들 때는 글루텐 생성을 억제하기 위해서 단백질을 적게 함유한 프랑스산 밀가루를 쓰기도 하지만 반죽하는 방식도 바꿔야 한다. 빵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 여러 번 치대어 글루텐이 많이 생기도록 하는 방법과는 정반대다.
‘대단히 기본인데 배운 기억이 안 나.’
진혁은 기분 좋게 드라이 이스트를 반죽 위에 뿌리고 발효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와중에도 쉬지 않는다. 이번에는 취미용 빵이 아니라 순수하게 가게를 위해서 만드는, 치킨 파이용 반죽이다.
‘이때는 마음껏 치대서 좀 더 글루텐이 많이 만들어지도록.’
바로바로 응용하니까 머리에 좀 더 쏙쏙 들어오는 느낌이다.
‘이 방송 출연, 나가기로 하길 잘한 것 같아.’
진혁이 살짝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저 매일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새로 한다는 느낌이 신선해.’
밤마다 수련하는 무공은, 극마의 경지를 이룬 이후에는 답보 상태에 있다. 밤마다 자기 전, 습관적으로 운기조식을 하며 머릿속으로 초식을 되밟는다.
무엇을 위해서 강해져야 하는가.
그전에는 목표가 명확했다. 돌아가기 위해서, 가족들을 다시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현재는 전과 다르다. 가족을 되찾기 위해서 더 강해질 필요는 없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종류의 힘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그것이 경제력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병원비로 돈을 있는 대로 빨아먹었을 즈음에는 집안이 비참함 그 자체였어.’
그래서 그는 가족이 모두 풍족해지기를 원했다. 어머니가 파출부 일을 그만두고 아버지가 일일 매출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의 경제적 여유만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돈이 있다고 모두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지.’
어느 시점부터는 돈,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진혁은 그런 면에서는 가족들이 모두 성공을 향한 길을 가고 있다고 느꼈다.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대학의 실습교수로 일하기 시작하며 기쁨을 되찾았고, 어머니도 파출부 일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꾸렸다. 진희는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간호사가 되어 병원에서 계속 일하고 있으며 자신은 빵을 굽고 있다.
‘좋은 재료를 쓴, 정교한 기술이 필요해서 고급스러운 맛있는 빵을 만들고 있지.’
빵집에 오는 손님 중에서 크림의 종류를 알고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슈크림과 생크림, 커스터드 크림을 구분하기는커녕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다.
‘손님이 크림이나 빵에 대해서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지. 하지만 빵을 많이 먹어 본 사람들은 내 빵을 먹는다면 자신이 맛본 크림이 이전에 먹었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어째서 다른지 궁금해할 거야. 그리고 이름을 물어볼 수도 있겠지.’
그 재료가 가지고 있는 최상의 맛을 끌어내는 것.
생크림을 먹어 본 사람이 먹어 보고서 이게 생크림이 맞냐고 의문을 가질 정도로 신선하고 맛좋은 생크림.
진혁은 그런 재료를 사용해 정말로 재료 본연의 맛을 끌어낸, 최상의 수준에 이른 빵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에 있어서 그에게 ‘무(武)’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제빵을 거들뿐!
“반죽 안에 들어가는 공기층의 양을 조절했으면 좋겠는데.”
강기를 반죽 안에 집어넣으면 반죽이 터져버린다. 산산이 조각나서 튀어 오르는 반죽을 보고 싶지 않다면, 강기가 아닌 다른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
“역시 열이 최고인가?”
염화기공을 빠르고 안정적인 오븐 대체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고온의 불꽃으로 물을 다루어 생성해 낸 많은 양의 수증기를 가지고 여러 차례 실험해 보았다. 굽지 않고 찌면 맛의 성질 자체가 달라진다. 고심 끝에 염화기를 통해 요리한 빵이 구워진 것이 아니라 쪄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고온이 아닌 저온을 이용해 고기와 야채가 익도록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성공했다.
‘수비드.’
놀랍게도 이는 이미 연구되어 사용되고 있는 요리 기법이었다.
‘비닐로 밀봉한 고기를 저온으로 오랜 시간 요리해서 맛을 살리는 방법이지.’
고기가 수분을 잃지 않고 가능한 최저의 온도로 익게 하면, 육즙이 풍부해져 최고의 맛을 끌어낼 수 있다. 진혁의 경우에는 기막으로 둘러싸고 안쪽에 열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검에 기를 담으면 검기가 되고, 손에 담으면 수강이 된다. 그리고 허공에서 기를 발출하는 경우 이를 강기라 하는데, 그는 강기를 얇은 막의 형태로 발출하여 고기를 감싸는 방법을 개발해냈다.
무림사에 존재한 적이 없이 전무후무할 일이다.
‘사부는 술잔을 데우거나, 얼음을 얼려 버리고 말았지.’
주로 다른 고수들이 있는 곳에서 자신의 내공이 얼마나 심후한지 자랑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광안마가 알았다면 쓸데없는 데에 능력을 낭비하지 말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을 것이다.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바게트는 전부 익었다. 다섯 종류의 딱딱한 빵이 구워진 정도를 살피던 진혁이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괜찮은데.”
“그 바게트, 파시는 건가요?”
저쪽에서 서성거리던 여자 손님이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품위있는 여성이다. 이전에 시부스트 크림의 맛을 구분해내는 등 일반인으로서는 꽤 뛰어난 미각을 보여주어, 기억에 남았다.
‘정말로 단골손님이 됐군. 나쁘진 않아.’
손님 한 명이 묻자 다른 손님들도 오픈 키친 조리대로 다가섰다.
옆에 서 있는 다른 손님들도 궁금해하고 있다.
“바게트 여기서 안 하시던데, 다음부터는 파실 계획인가요?”
“이건 시험 삼아 구운 것이라 손님들에게 팔기는 어렵습니다.”
진혁이 곤란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드시고 평가를 해 주신다면, 시식용으로 조금씩 나눠 드릴 수는 있습니다.”
진혁은 바게트를 조금 잘라 접시에 담았다.
“드셔 보시고 어떠신지 이야기해 주십시오.”
뒤에서 백진영과 김가영, 서창덕이 아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가게 안에 있는 손님들은 언뜻 봐도 서른 명이 넘는다. 이왕 나누어 주기로 했으니 한두 사람만 줄 수는 없고 모든 사람에게 줘야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직원들에게 돌아갈 양은 없다.
“자리에 계시면 모든 손님분께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빠리에서 느꼈던 향이 나.’
탁자에서 얌전히 기다리며 정지숙은 기대감에 구둣발로 바닥을 톡, 톡 쳤다. 방금 본, 갓 구운 바게트 빵의 생김새는 프랑스에서 유학할 때 보았던 빵들과 대단히 유사했다. 잘 구운 바게트 빵은 겉모양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바삭바삭해 보이는 껍질에 하얗게 부풀어 오른 쿠프, 가운데에서 양옆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게 황금 비율을 이룬 빵을 제일로 친다. 그리고 임 쉐프가 구워낸 빵의 생김새는 최고급으로 쳐야 마땅했다.
‘책을 보고 쿠프의 생김새까지 완벽하게 재현할 정도니 맛도 좋을 거야.’
정지숙은 임 쉐프가 계속 책을 넘기고 있던 것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주영모의 레시피 책은 빵에 관심이 있었던 그녀 역시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저 빵이 단지 레시피 책을 한 번 보고 그대로 모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따가 바게트 빵을 갖고 올 때 자연스럽게 제안을 하면 되겠어.’
오늘 이 가게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따로 진행하는 행사에 그를 초청하여 맡기고 싶은 일이 있었다.
곧 하얀 쉐프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임진혁 쉐프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한 걸음씩 그가 가까워질 때마다 정지숙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머, 내가 이 나이에 왜 이러지.’
“한 입 드셔 보시겠습니까.”
엄지손가락 크기로 잘게 잘린 바게트 빵은 연한 상아색 속살을 드러냈다. 공기가 충분히 들어가 부푼 덕분에 실처럼 부드럽게 찢긴 하얀 속빵은 단숨에 군침에 돌만큼 맛있어 보였다. 그녀가 자신의 앞에 놓인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제안 드릴 것이 있어요.”
정지숙은 은빛으로 글씨가 양각된 고급스러운 명함을 내밀었다. 진혁은 명함을 바로 받지 않고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