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94화
‘생각보다 귀찮아.’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맞춰주어야 하는 점이 많았다. 방송 현장에는 방송의 법칙이 있었다. 광안마 같은 녀석이 있다면 귀찮은 일을 일일이 하지 않아도 되도록 중간에서 잘라 주었을 것이다. 쓰잘데기없는 인터뷰 질문에 답변하면서 깨달았다.
‘이 TV 프로그램은 부모님께서 보실 것이고, 그러니까 부모님께서 보셔도 괜찮을 만한 성실하고 좋은 대답을 해야 한단 말이지.’
어머니께서는 너를 믿는다고 하셨다. 그러니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
마지막 촬영까지 계속한다고 하면 총 14주. 1주에 1일. 발효가 필요한 경우에는 2일씩 방송에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섭섭해 하지 않을 만큼만, TV에 조금 나왔다가 적당히 사라져야지.’
“난 그냥 좋은 재료 공짜로 많이 써 보고, 프로페셔널 쉐프들이 만드는 기법도 좀 구경하고. 크게 한바탕 놀다 올 거야.”
진혁이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진희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런 마음가짐이면 괜찮겠다. 나도 너 응원하는 거 알지?”
“알지.”
“야, 그런데 치킨은 왜 안 오는 거야? 제대로 시킨 것 맞아? 벌써 30분도 넘게 지났잖아. 아까 금방 온다며.”
진혁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내가 확인해 볼게.”
이곳에는 2성 수준의 환영마라진이 쳐져 있어, 진혁이 허락한 이가 아니면 입구를 찾을 수 없다. 그 안에서는 전자기기도 작동하지 않으므로 치킨 배달원은 영문을 모르고 갇혀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이건 미안하게 됐군.’
아니나다를까, 바깥쪽 환영마라진에 한 명의 인간이 들어있었다. 두 겹으로 이루어진 진의 안쪽까지 들어왔다면 진혁에게 경보가 울렸겠지만, 이런 바깥쪽 진도 통과하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경보조차 울리지 않게 되어 있다.
진혁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꼬맹이밀 농장 댁…… 김근관 씨네 아들. 여기서 뭐 하냐.”
“임진혁?! 여기 오면 안 돼.”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김은동이 양팔을 휘저었다. 파랗게 질린 얼굴색으로 미루어보건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여기는 이상해. 괴물이 있…….”
금괴를 지키는 것처럼 소중하게 가슴에 통닭 박스 2개를 안고서 그가 비틀거리며 움직이려 애썼다. 마지막까지 진혁이 이곳에 오면 안 된다고 외치다가 김은동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곤란하게 됐군.”
진혁은 김은동의 백회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미세한 양의 진기를 흘려보내어 체내에 자리한 두려움을 몰아냈다.
환영마라진으로 인해 발생한 공포와 혼란을 전부 날리고 난 후에는 손목을 짚어 내관혈을 더듬었다.
“하는 김에 업무 스트레스까지 같이 날려주지.”
어깨를 흔들어 깨우자 김은동이 눈을 번쩍 떴다.
“어어? 어?!”
“2102호입니다. 치킨 시킨.”
“진혁 군?!”
놀라고 당황한 은동의 모습에 진혁은 잠시 그를 지켜보았다.
‘안 까먹었나?’
“내 이름까지 알고 있어?”
천천히 짚어가며 물어보자 은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코레이션 페어에서 같은 조였잖아.”
‘조금 전에 있었던 10분간의 일을 잊어버리도록 제재를 가했는데, 잘 됐군. 섭혼술까지는 쓰지 않아도 되겠어.’
섭혼술은 인간의 이지를 제압하여 말을 듣게 하는 기술의 일종으로, 연약한 인간의 정신 전체를 갉아먹을 위험성이 있다. 최근 십 분여 간의 일을 잊게 하려고 아주 약한 충격을 주었는데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환영마라진에서 공포는 제거하고 그냥 혼란만 느끼도록 해두어야겠어.’
아무래도 현대사회에서는 지나치게 효과가 좋은 모양이다. 중원에서는 삼류 무림인이 함부로 발을 들여놓지 못할 정도로 설치해 놓은 약한 진도, 일반인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로 느껴지는 듯싶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군.”
“이것도 인연인데. 다시 만나서 반갑다.”
김은동이 손을 내밀었다. 혼란스럽고 어지럽고 놀랐을 텐데도 도와달라는 말보다 먼저 진혁을 생각해 도망치라고 했던 녀석이다.
‘생각보다 인성은 나쁘지 않네.’
그러고 보니 직업군인을 하다가 그만두고 제빵사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했던가, 아산 우리꼬맹이밀 농장의 농장주인 김금관이 자기 아들에 대해서 했던 말을 어렴풋이 기억해낸 진혁이 물었다.
“군인 하다가 제빵 한다던 큰아들. 왜 여기서 통닭을 배달하고 있어?”
“그야, 음…….”
김은동이 말을 흐리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내가 실력이 못하다는 걸 알아서?’
데코레이션 페어에서 봤던 임진혁. 그는 은동에게 있어서 크나큰 충격이었다. 자신이 어느 정도 제빵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전국 대회 수준에서 자신의 솜씨는 먹히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3대째 소중히 여겨온 우리꼬맹이밀 역시 그의 손에서는 맛있는 빵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진혁은 그 밀을 맛있는 빵으로 재탄생시켜, 농장이 다시 도약할 수 있게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우리꼬맹이밀은 프랑스나 미국산 밀과 달라서 맛있는 빵은 만들 수 없다고 포기했었는데 말이지.’
그래서 그는 제빵에 대해서 더 공부하기 위해 일단 돈부터 모으기로 했다.
“나는 너보다도 빵도 못 만들고……, 학비를 모으려면 좀 더 서울에서 돈을 모으려고 했지.”
은동이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던 진혁이 명함을 내밀었다.
“꼭 제빵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아무 아르바이트나 하려고 하는 거면, 여기에도 원서 내 봐. 사장이 면접을 보고 통과해야 하겠지만.”
H&J 카페 앤 베이커리. 사람의 이름은 없이, 가게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약도만이 있다. 하지만 그 약도에 있는 위치는 누가 봐도 제일 좋은 길목, 강남역에서 가까운 상권이다.
“뭐야, 네가 추천해 주는 거야?”
김은동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건 봐야 알지.”
닭을 받아들고 돈을 지불한 다음 진혁이 엘리베이터 복도 위, 시계를 가리켰다.
“그런데 안 돌아가 봐도 괜찮아?”
시계를 본 김은동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지.”
그는 황급히 인사를 하고서 오토바이 헬멧을 다시 집었다.
“이 헬멧은 언제 또 이렇게 금이 간 거야? 다시 사야겠네.”
김은동은 투덜거리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다시 방 안으로 돌아온 진혁은 따끈따끈하게 김이 솟는 치킨을 내밀었다.
“여기, 닭 먹자.”
“신난다!”
이미 상을 펴놓고 있던 진희가 환하게 웃으며 컵에 콜라를 따랐다.
“우리 진혁이가 서울에서 금의환향하기를.”
“꼭 환향해야 하는 거야?”
“그럼 소망시로 돌아오지 않을 셈이야?”
“그건 봐야 알지. 부모님을 모셔올 수도 있으니까.”
“우와, 꿈이 큰데.”
진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버지가 그 가게를 두고 여기로 오시겠어? 자식보다 더 아끼는 가게잖아. 소망시에는 아버지의 평생이 담겨 있다고.”
진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서울은 또 다르지. 대도시가 다르긴 달라. 편찮으실 건 아니지만. 병원도 가깝고 문화공간도 많아. 어머니도 올라오고 싶어 하시더라.”
진희가 놀리듯 말했다.
“우리 진혁이 생각이 많이 바뀌었네? 전에는 서울이 공기가 더러워서 너무 싫다고 하더니.”
“있으니까 또 익숙해지더라고.”
가게와 집에는 오행진을 설치해두어 바깥의 탁기가 범접할 수 없다. 성능이 좋은 자체 공기 청정기를 설치한 것과도 같다. 진혁이 빙긋 웃었다.
“닭부터 먹자고. 식겠다.”
“나, 나. 간장 닭부터 먹을래!”
진희가 심각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요리 만화책에서 봤어. 뷔페에 가면 제일 먼저 순하고 맛 약한 것부터 먹고 나서 양념 된 고기를 먹으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간장 닭부터.”
진혁이 중재했다.
“그럼 후라이드부터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
“……그냥 간장부터 먹어.”
아직 식지 않아 따끈따끈한 간장 치킨의 닭 다리 살을 죽 잡아 늘이자 모락모락 김이 올랐다. 손가락을 호호 불어가며 한입에 넣은 진희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맛있다.”
“괜찮네.”
“네 치킨 파이만큼 맛있네.”
“그건 꼭, 우리 아버지보고 날 닮았다고 하는 것 같잖아.”
“그것도 그러네. 그런데 네 치킨 파이가 워낙 맛있어서. 웬만한 치킨은 먹어도 이 맛을 따라오지를 못해.”
진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영광이네.”
그녀가 텔레비전을 켰다.
“그럼, 디저트 서바이벌 시즌 1을 보자고. 오늘 나랑 같이 달리는 거야.”
“뭐?”
진혁이 눈을 깜빡였다.
“왜?”
“시즌 1을 봐야 2에서 어떤 미션이 나올지 알 수 있을 거 아니야? 스타일을 같이 분석해 보자고.”
진희가 입에 닭 다리를 물고 가져온 USB를 TV에 꽂았다. 이전에 들었던 적이 있는 낯익은 오프닝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가 신이 나서 말했다.
“내가 시즌 1은 종방까지 실시간으로 봤어. 우리나라에 이식해 오면서 시스템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어떤 식으로 나올지 테마 별로 분석해왔다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이건 내가 편집해 온 거니까 같이 보자고!”
신이 난 진희를 보고 진혁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 그래.”
◈ ◈ ◈
진희를 보내고 이틀 후.
가게는 여느 때처럼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임 쉐프님, TV에는 언제부터 나와요?”
베이컨 파이와 치킨 파이가 한정적으로 판매되는 시간인 10시, 아예 작정하고 그 때 시간을 맞춰서 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빵이 없어지기 전에 미리 사 가려는 주변 회사 직원부터 인근 법률 사무소의 사원들까지, 한둘이 아니다. 일부러 손님이 몰리는 시간을 피해서 점심시간이 아닌 그 조금 전 시간으로 지정했는데도 그렇다.
“스케줄을 보긴 봤는데, 아직 나오려면 멀었어.”
진혁이 간단하게 답변해주었다. 전날 미리 해둬도 되는 준비를 해두었다. 오늘은 오픈 키친에서 손이 많이 가는 빵을 만들어 볼까 싶어서였다.
‘테마 별로 빵이라.’
진희가 만들어온 총집편은 테스트 종류만 붙여 놓은 것으로,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시행한 기존 테스트들을 대상으로 했다.
‘발렌타인데이를 테마로 해서, 컨셉에 어울리는 맛있는 디저트 만들기.’
다들 초콜릿을 기반으로 만드는 와중에 사랑 자체를 디자인한다며 남녀의 초콜릿 상을 완성한 사람도 있었고,
‘나는 그것보다는 지구 멸망 후 300년을 케이크로 표현해 보라는 쪽이 더 재미있었지만.’
주제를 주고 이에 대해서 만들게 한 다음, 두 명씩을 떨어뜨린다. 그들은 둘이서만 패자부활전을 치른다. 아드레아노 존부의 훌륭한 디저트를 맛본 후 3시간 안에 똑같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
‘제일 중요한 레시피는 주지 않고.’
가장 기본적인 레시피를 주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해내야 한다. 하지만 대개 시간의 압박에 쫓긴 출연자들은 엉뚱한 시도를 하다가 디저트를 아예 망쳐 버리고는 했다. 진혁은 그 패자부활전이 제일 쉬워 보였다.
‘맛을 보면 대충 따라 만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패자부활전이 제일 재밌어 보인다고 했다가 진희가 부정 탄다며 구박했다.
<테마에 맞추어서 창조적인 컨셉을 만드는 것과 자기가 자신 있는 무기가 있는 것, 두 개 다 해보라고.>
진희가 했던 이야기가 생생하다.
“맛으로도 모티브를 표현할 수 있게, 다양한 맛을 전부 다 다루어 보라고 했던가. 틀린 말은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