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93화
몇 마디 물어보면 집 안에 있는 숟가락 개수까지 말할 기세로 신나게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는데 진혁은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수줍어하며 말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대답을 숨기며 말을 피하자는 것도 아닌데 속에 있는 말은 꺼내지 않는다. 이렇게 방송에 나가면 아무리 잘생겨도 재미없을 수밖에 없다. 이희주는 수첩을 뒤적이며 마지막 질문을 하였다.
“페이스트리 쉐프로서 앞으로의 포부는 어떻습니까?”
진혁은 생각했다.
‘마치 제과제빵 학과에 들어갈 때 입시 면접 같군.’
얼마 전에 아버지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있어 대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가 차분히 대답했다.
“누가 먹어도 맛있는 빵을 만들어 대접하는 것입니다.”
예상외의 답변에 이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들어왔던 목표들은 대부분 수치로 계산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최고의 프랜차이즈 빵집을 만든다.’ 거나 ‘세계에도 통할 수 있는 한국 빵을 개발한다.’ 거나 ‘편의점에도 깔릴 수 있는 디저트를 개발하여 판매한다.’는 둥 상업적인 목표가 대부분이었다. 진혁이 말하는 목표는 마치 어린아이가 잡고 싶어 하는 파랑새처럼 희망적이면서 모호해 보였다.
“누가 먹어도 맛있는 빵이라면, 어떤 빵이죠?”
진혁이 어린아이에게 말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정말 맛있는 음식은, 자신이 싫어하는 종류라고 해도 맛있기 마련이죠. 빵을 싫어하는 사람도 한 번 먹으면 계속 먹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맛있는 빵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독특한 포부네요. 잘 들었습니다.”
그가 수첩을 넘기며 물었다.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자신만의 시그니처 메뉴를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진혁이 대답했다.
“처음에 스스로 메뉴를 만들고 그걸 아버지께서 받아들인 것이 시그니처 메뉴인가, 싶었는데. 제가 개량했다고는 해도 다른 사람의 메뉴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게 정말로 나를 잘 나타낸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이후에 몇 번인가 만든 케이크나 쿠키, 디저트들이 있지만…….”
그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아직은 제 시그니처 메뉴를 만들어가는 중이라고 해두죠.”
◈ ◈ ◈
“아까 임진혁 쉐프, 어땠어요? 동작이 진짜 깔끔하죠? 화면발 잘 받는다니까요.”
김산호 PD가 신나서 떠드는데 주영모 쉐프는 조용했다.
“그 애, 정말 경력이 1년밖에 안 되는 게 맞나?”
“음?”
“연륜이 있어 보이던데. 아니면 제빵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라도…….”
30년 이상 한국 제빵계의 어른으로 있어 왔던 주영모는 후배에게 주눅 들어보았던 경험이 없다. 그는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이희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뷰에 답변하는 태도가 전혀 긴장한 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인터뷰를 많이 해본 건 아니었거든요. 그냥 원래 성격이 그런 거 아닌가? 별로 긴장하지 않는 타입.”
김산호 PD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주 쉐프님, 그 나이에 연륜이 있을 수가 없죠. 10살 때부터 판소리를 전수받은 무형문화재 계승자도 아니고.”
“군대를 막 갔다 왔대요. 그래서 지금 제빵 일은 힘들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이희주가 덧붙였다. 잠시 이희주와 김산호가 눈빛을 교환했다.
“그거야, 뭐 당연한 거고.”
“유학파나 외국인은 다녀오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 장면은 편집하지 말고 꼭 내보내야겠는데?”
“다른 장면들 봐서 알아서 자를게요. 얘가 어디까지 버티나 보고.”
“하긴. 의외로 금방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아버지 가게에서 일했다며? 어렸을 때부터 제빵을 배워서 꾸준히 해왔을 수도 있지. 어쨌든 보통 사람은 아니야.”
두 스태프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진혁의 경력에 대해 곱씹고 있던 주영모가 중얼거렸다.
“우승 후보라고 생각하세요?”
김산호 PD가 물었다.
“우승 후보는 당연히 아니지. 젊은 것도 아니고 어리잖아. 완전 애송이구만.”
주영모가 으르렁거렸다.
“물론 그 머랭을 평생 동안 머랭만 쳐 온 사람처럼 잘 쳤지만 말이지. 그것만 가지고서는 알 수 없다고. 무를 엄청나게 잘 써는 할머니가 있다고 해서 그 할머니를 김장의 달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
주영모가 촬영장을 정리하는 스태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깍두기와 배추김치를 비롯한 모든 김치 김장의 달인인 우리 할머니는 무를 잘 썰지만 말이지.”
“필요조건이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니군요.”
“뭐야, 왜 갑자기 나한테 수학을 들이대? 나는 수학을 안 했다고. 제빵 전문학교를 나왔단 말이야.”
“저는 생각보다 대단히 무난하다는 느낌이었는데.”
김산호 PD가 말했다.
“잘생기고 뭔가 성격이 있으면 화면이 잘 나올 텐데, 얌전하고……. 흠, 여자 팬은 좀 생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유머 감각이 있거나 끼가 있는 타입은 아니라서 또 어떨지.”
“자네가 바로 맞은편에서 보지 못해서 그래.”
“네?”
“끼가 있는 게 아니고, 위엄이 있어. 저 나이에 어떻게 그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잘 모르겠던데요.”
“허 참, 이 사람이 보는 눈이 없어!”
“사실 그는 다른 라이벌들하고 비교해보면 한참 처지잖아요? 리처드는 요리 명문 학교 출신에 경력도 좋잖아요. 강 루이도 라스베이거스에서는 내로라하는 탑클래스 쉐프고.”
“하긴. 다들 쟁쟁한 사람들만 모였으니까. 2라운드까지만 버텨 주면 적당하지 않을까.”
◈ ◈ ◈
촬영이 오전 내로 끝나 오후에는 예정대로 역에서 진희를 맞이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 사흘 휴가를 받아 서울로 올라온다며 재워 달라고 했던 진희다.
소망시에 들렀다가 올라온 진희는 캐리어를 두 개나 갖고 있었다. 하나는 끌고 하나는 밀고 하면서 천천히 올라오는 그녀를 보고서 진혁이 혀를 찼다.
‘저 정도는 가볍게 들 수 있어야 할 텐데. 근력 훈련을 병행하지 않아서 그런가?’
“뭘 그렇게 무겁게 들고 온 거야?”
진혁은 바로 캐리어를 빼앗아 자신이 들었다.
“무거운 건 아니고 손이 모자라.”
“그래.”
진희가 등에 멘 배낭까지 벗겨서 자신이 메고서 진혁이 물었다.
“서울에서 고작 이틀 자고 가는데 왜 이렇게 짐이 많아?”
진희가 노려보았다.
“이게 내 짐 같아? 다 네 짐이야! 엄마가 너 먹으라고 반찬, 너 춥다고 이불, 짐을 완전 바리바리 싸줬어.”
“미안하다.”
진혁이 사과했다.
“저번에 내가 짐이 필요 없다고 엄마가 싸준 거 다 두고 나왔는데,”
“그거 말고 다른 것들이래. 너한테 꼭 필요한 거라고 하던데?”
“그래, 그래.”
기차 서울역에서 강남의 오피스텔까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서 진희는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그래도 진혁이 덕에 쉬는 날에 방구석에 처박혀 있지 않고 이렇게 서울까지 나와보고. 임진희 많이 출세했다!”
“다 내 덕분인 줄 알아.”
잘 지내고 있다고 계속 연락을 받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면서 소식을 전해 듣는 것과는 또 다르다. 방에 도착한 진희는 순식간에 짐을 내려놓고 있어야 할 곳에 정리해놓았다. 냉장고에는 식량이 꼭꼭 채워졌다. 밑반찬인 김치에 큰이모가 직접 만든 고추장과 된장처럼 가족적인 음식은 시작일 뿐이었다. 서랍장에는 라면과 스팸, 햇반과 인스턴트 설렁탕. 옥수수 통조림과 캠벨 수프캔, 참치캔 등 유통기한이 넉넉한 레토르트 음식이 꽉 찼다.
진희가 짐을 다 풀어놓고서 혀를 찼다.
“이 정도면 전쟁이 나도 너랑 나 둘이면 한 달은 버틸 수 있겠다.”
“어머니께서…… 날 많이 걱정하시는구나.”
라면은 진혁이 맛있다고 했던 브랜드만 골라서 들어가 있다. 참치는 밥에 비벼 먹을 때 맛있다고 했던 고추 참치캔뿐이다. 하나씩 골랐을 어머니의 마음 한 조각 조각이 선명하게 느껴져서 진혁은 그저 웃었다.
“고맙다고 전해드려.”
진희는 옷가지와 이불까지 서랍장에 꼼꼼하게 개어 넣었다.
“네 짐인데 너는 왜 그냥 가만히 서 있어?”
“난 네 짐인 줄 알았지.”
실은 진희가 손 빠르게 이것저것 하길래 어디까지 하나 싶어서 구경했다. 멀뚱하게 서 있는 진혁을 보면서 진희가 얼굴을 구겼다.
“부모님이 계시던 집에서는 이것저것 먼저 나서서 하고 설거지도 하더니! 너의 본성이 이제야 드러나는구나, 이 악당!”
“악당까지야.”
“이 죄는 양념 반 프라이드 반 치킨으로 갚아라!”
“정말로 그거면 돼?”
“응.”
진혁은 백진영이 주었던 배달 치킨집의 팸플릿을 가져왔다. 인근 치킨 가게의 브랜드를 본 진희는 눈이 뒤집혀서 결론을 바꾸었다.
“간장 치킨도 맛있어 보이고, 데리야끼 치킨도 좋아 보이는데? 그리고 다이어트도 해야 되니까 오븐 치킨이면 좋겠고…….”
고민은 10분이 넘게 계속 이어졌고, 결국 진혁이 말했다.
“그냥 다 시켜. 너 한 마리 나 한 마리 먹자.”
“앗싸!”
생맥주와 함께 사이다도 추가로 시켰다. 닭 배달이 오기를 기다리며 두 사람은 TV를 보기 시작했다.
“야, 너 TV에는 언제 나와?”
텔레비전 앞에서 뒹굴며 진희가 물었다. 병원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에서는 그냥 백수 같다. 고등학생 때의 체육복을 입고 아침에 감지 않은 머리를 하고 편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진혁이 픽 웃었다.
‘저건 아주 옛날 사고당하기 전하고 달라진 게 전혀 없네.’
“일단 입단 테스트 같은 걸 간단하게 찍은 거고, 그다음에는 주중 하루씩만 촬영한다고 했어. 다행히 우리 가게가 쉬는 날이 정식 촬영 날이라서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아.”
“그럼 다음 달이면 TV에서 볼 수 있는 거야?”
“3주? 4주? 촬영을 하고 난 다음에 바로바로 실시간으로 나오는 게 아니래.”
“그것도 시간이 걸리는구나. 촬영하고 나서 편집하고 자막 넣고 하는 것도 시간이 걸리나 보네.”
진희가 쿠션을 무릎 위에 얹고서 말했다.
“내가 너한테 디저트 서바이벌 쇼, 그렇게 같이 보자고 할 때는 시큰둥해 하더니. 이번에 아빠가 너 TV 나가는 거 엄청나게 걱정한 건 알아?”
“알지. 직접 얘기해 주셨어.”
“그런데도 나가기로 결정한 거야?”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이야기하는 진희의 눈가에 가득한 걱정을 보고서 진혁은 문득 깨달았다. ‘휴가가 그냥 생겨서 서울에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구나. 일부러 시간을 내서 온 거야.’
진혁이 걱정되어 일부러 오프를 받아 내서 여기에 와 있다. 이러니저러니 불평해도 그녀는 항상 진혁을 위한 시간을 내주었다. 군대에 있을 때는 면회를 왔고 병원에 있을 때는 찾아와서 보호자로서 자리를 지켰다.
“경험 삼아 나가면 좋지. 홍보도 되고.”
“네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누가 널 악의적으로 편집하거나 악성 루머가 돌고 그러면 어떡해.”
“별걱정을 다 한다. 그 정도로 내가 주목받지도 않을걸?”
진혁은 주목받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나가서 우승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실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아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막상 촬영 현장을 경험해 보니 생각이 좀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