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90화
“지금이야 진혁이 네가 학교 대회에서도 우승하고 가게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또 TV 경연장이라는 건 환경 자체가 전혀 달라. 카메라가 지켜보고 있는 무대 위에서는 자연스럽게 긴장을 많이 하게 되지. 진혁이 네가 촬영을 많이 해본 것도 아니고.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해.”
아버지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철우 녀석 통해서 듣기로는 저번 시즌하고 달리 이번에는 아예 콕 집어서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수쉐프 등을 대상으로 모집을 했다고 들었어. 5년 차도 한 명 있긴 한데, 이 사람도 10년 차랑 같은 수준의 테이스팅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하던데.”
내부사정까지는 몰랐던 백정흠이 놀라워하며 물었다.
“진혁이 경력이 어느 정도 되지?”
“얘가 지금 유명세는 있긴 한데 알려진 것에 비해서 경력은 매우 짧지. 이제 군대 제대하고 일 년 되어가잖아?”
“그렇죠.”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걱정스럽게 조언했다.
“너 여기 나갔다가 괜히 마음 상할까 봐 아버지는 걱정이 된다.”
아버지의 심장 박동수가 늘어난 것은 진혁이 텔레비전에 나왔으면 하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경력 있고 경험이 풍부한 쉐프들 사이에서 시련을 겪거나 패배할까 봐 염려해서 그런 것이었다. 진혁이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아마 걔네들도 네 경력을 모를 거야. 네 솜씨를 보면 이제 1년 차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좋거든. 아까 PD가 네 경력을 묻지는 않았어?”
“네.”
“그래. 굳이 나갈 것 없어.”
아버지가 염려하는 모습을 보이자 진혁이 말했다.
“이번에 한 번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백정흠 사장이 진혁의 양손을 움켜쥐며 말했다.
“내가 이번에 빵빵하게 지원해 주지.”
“아니, 진혁아. 정말로 괜찮겠니?”
아버지가 양미간을 찌푸리는데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경험 삼아서 이런 것도 해보는 거죠. 제안이 안 들어왔으면 모를까, 이왕 제안이 들어왔는데 피하기는 싫네요.”
“그래, 네가 정 그렇다면야.”
아버지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진혁을 보았다.
“네가 하고 싶으면 해야지.”
“예.”
진혁은 생각했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최소한 저번 대회처럼 다들 수준이 낮지는 않겠지.’
진희가 졸라서 같이 보았던 디저트 서바이벌 쇼 시즌 1.
한정된 재료를 사용해 짧은 시간 동안 긴박하게 창의적인 빵을 만들어야 하는 테스트들.
시즌 1의 우승자인 메리사 리는 거액의 상금을 받고 아드레아노 존부의 디저트 팩토리에 수쉐프 대우로 스카우트되었다.
이메일로 받은 대회 상세사항을 보던 진혁이 혀를 찼다.
‘벌써 직장을 옮길 생각은 없으니 우승은 하면 안 되겠어.’
적당히 가게를 홍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빠질까, 하고 고민하던 진혁은 그 아래에 있는 조항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래에서 일하는 건 안 해도 되는 거군. 그럼 상금을 노리는 쪽으로 하지.”
◈ ◈ ◈
H&J 카페 앤 베이커리의 주방.
모두 가고 나서 홀로 그 자리에 서서 진혁은 스마트폰을 켰다. 자동 촬영 모드로 한 다음에 저쪽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방송용 제빵을 연습해야겠어.”
그는 여태까지 오픈 키친에서 해 왔던 제빵 기술을 돌이켜 보았다.
“일반인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제빵…… 은 사실 느린 속도로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을 보여주는 거였고.”
지난 열흘간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이것저것 반죽을 하는 것보다 파이지를 얇게 뽑아내어 순식간에 빙글빙글 돌려서 꼬거나 하는 것이 더 인기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굳이 파이지 만드는 일을 남겨두었다가 낮에 천천히 작업하곤 했다.
“인간의 눈이 확인할 수 없는 속도라고 해도, 카메라로 촬영한 다음에 나중에 돌려 보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 수 있다고 하던데.”
이전에 데코레이션 페어에 출전했을 당시, 그는 초콜릿에 향을 내기 위해 고추를 갈아서 섞었다.
“맛을 숨길 생각에 보이지 않게 움직여서 고추를 갈아서 섞었더니, 정말로 고추를 갈아서 섞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나중에 말이 나왔었지.”
TV 카메라가 잡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신속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봐서는 알기 힘들 정도로는 빠른 속도. 그는 그 속도를 알아내고 싶었다. 문득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 낸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허허실실의 묘리를 섞으면 좋겠는데?”
검법을 사용할 때 실제 초식의 사이사이에 가짜 움직임을 섞어 움직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허초라 한다. 그는 이것을 응용하여 마치 반죽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움직임을 선보일 생각을 하였다.
‘반죽을 주무르는 와중에 숨김맛을 사용할 재료들을 준비하고, 몰래 섞어 넣으면 되겠어.’
진혁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는 천마강림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인을 모방한 엇갈리는 걸음을 이용하여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반죽을 하는 것처럼 움직이지만 사실은 파프리카 파우더를 가져왔으며, 반죽 사이에 가루를 섞었다. 이 행동은 모두 붉은 불을 깜빡이고 있는 스마트폰 카메라 앞에서 이루어졌다.
‘일반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카메라로 돌려서 보면 티가 나는 속도여야 해.’
그는 두어 번 녹화하며 연습을 해본 다음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되겠어.”
◈ ◈ ◈
소망시, 진혁의 본가.
임운정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로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바로 내려왔어요?”
장은효가 남편을 반겼다. 이제는 아기고양이라고 하기 힘든, 덩치 큰 고양이가 폴짝 뛰쳐나왔다.
“진호야. 아빠 왔다.”
임운정이 짐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장은효가 물었다.
“아들은 어때요? 잘 있어요?”
“진혁이야 언제나처럼 잘하고 있지. 당신은?”
“오늘 샌드위치 분량 추가 주문 들어왔어요.”
기쁨에 가득 찬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임운정이 운을 뗐다.
“설득을 해서 TV에는 나가지 않는 쪽으로 하게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내가 걔 자존심을 건드렸나 봐. 별로 관심 없어 보이더니 갑자기 한다고 하더라고.”
“무슨 TV요?”
장은효가 남편의 코트를 받아 옷걸이에 걸면서 물었다.
“내가 말 안 했나?”
임운정이 말했다.
“아드레아노 존부의 디저트 서바이벌 쇼. 시즌 2를 한국에서 촬영한다고 하는데, 진혁이에게도 출연제안이 들어왔다고 하더라고. 아니다. 출연제안이 아니고, 정확히는 출연 후보 제안. 일단 테이스팅 테스트를 통과해야지 출연을 할 수 있는 방식이래.”
장은효가 손에 들고 있던, 옷걸이에 걸린 남편의 코트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우리 아들이 존부의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 나간다고요?!”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여보! 내 코트!”
“어머, 미안해라.”
그녀가 화색이 도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우리 아들이 존부의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 나간다고! 정규 방송에! 아침 9시 방송 뉴스에 SBC 정기 프로그램까지. 진혁이 완전히 출세했네요.”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코트를 다시 주워서 먼지를 털었다. 옷을 제대로 옷장 안에 걸어둔 장은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무 좋다. 너무 좋은 일인데, 왜 나가지 말라고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그게…… 사실은 그 프로그램이 진혁이 나갈 레벨이 아니야.”
임운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철우 녀석에게 들었는데 최소한 10년 차 이상을 데려오려고 했다더라고. 다들 테이스팅 테스트를 통해서 기본적인 베이킹 스킬과 함께 카메라테스트를 하긴 한다는데, 제일 경력이 적은 애가 최소한 5년 차인 것 같았어.”
“고구려 호텔의 황 쉐프요?”
“응, 황철우 놈 제자가 그 오디션 제의가 들어왔다고 들었거든.”
“허참.”
은효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우리 애는 이제 제대로 일한 지 일 년 됐나?”
“그 정도 됐지.”
“강남 가게에서 일한 지도 며칠밖에 안 됐고.”
“그 얘길 들으니 걱정이긴 하네요.”
야아오오오오오오옹. 고양이가 폴짝 뛰어올라 은효의 어깨 위에 앉았다. 인간의 감정을 알고서 위로하려는 듯 뺨을 부벼대자 장은효가 웃음을 터트렸다.
“파하핫! 얘, 간지러워. 엄마 간지럽다. 꼬리로 코 간질이지 말아라. 꺄악!”
그 모습을 보고서 임운정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고양이를 안아 올려 자신의 품에 안았다.
“우리 막내 진호, 요즘 애교가 많이 늘었어요.”
“온종일 혼자 집 지키느라 외롭진 않고?”
“…….”
장은효가 눈을 깜빡이면서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게, 저.”
“어?”
“여보, 사실은 할 말이 있는데…….”
그녀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운정이 이야기를 듣고 놀라서 눈썹을 치켜들었다.
“진호가 매일 아침 따라와서 같이 출근을 한다고?”
“응.”
“아니, 문단속을 잘하면 되잖아?”
“엄청 잽싸게 따라오고 되게 얌전해.”
“얌전해도 음식을 만드는 데에 동물이 있으면 어떡해.”
“가게 안에는 안 들어와. 처음엔 따라 들어오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하니까 문밖에서 지키고 있어.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아는지 고양이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임운정이 고양이를 안아 올리며 눈을 마주쳤다.
“우리 진호, 왜 엄마 가게까지 따라와? 집에 있는 게 심심해?”
고양이는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호박 같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임운정이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엄마 지키려고 따라오니?”
야아오오오오오옹.
소리높여 우는 모습이 꼭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다. 장은효가 고양이를 다시 받아 안으며 웃었다.
“말을 다 알아듣는다니까요.”
“영물이네, 영물이야.”
“우리 집 보물이에요. 요즘 진혁이도 집에 없어서 외로운데, 이 녀석이 있어 줘서 쓸쓸할 틈이 없다니까요.”
“그 진혁이 녀석 말인데.”
걱정스럽게 임운정이 무언가 말하려고 하자 장은효가 말을 끊었다.
“여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진혁이가 하겠다고 한 거면 무슨 생각이 있을 거예요. 알아서 잘할 거라구요.”
“하지만…… 걔는 아직 어린애야.”
“군대도 갔다 온 성인인걸요.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벌써 어른이 다 됐어요.”
그녀가 눈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설령 TV 프로그램에 나가서 실패하면 좀 어때요. 아직 젊으니까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요. 젊을 때 실패하는 게 더 좋아요. 나이 들어서 실패하면 타격이 크지만요.”
“……그것도 그렇지.”
임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