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89화 (89/656)

제 089화

회의실에 있었던 촬영팀 멤버들이 조용해졌다. 능력 있고 인맥 넓고 영어도 잘하는 김산호의 유일한 단점은, 다혈질에 금방금방 화를 낸다는 점이다. 어깨가 넓고 덩치가 큰 그가 화를 내면 소심한 사람은 바로 기가 죽었다. 김산호가 박하연을 노려보며 말했다.

“다리가 부러졌으면 휠체어 타고 녹화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팔이 부러졌으면 아예 무대에 오르지도 못하지! 팔 얘기를 먼저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양은냄비라는 별명처럼, 김산호 PD는 곧 감정을 추스르고 가라앉혀 차분하게 말했다.

“예비후보.”

“1번, 고구려 호텔의 수쉐프인 마동운이 원래 후보였는데, 리츠칼턴으로 직장을 옮겨서 장기간의 촬영은 할 수가 없답니다.”

“2번, 리스웨이브 오너 쉐프도 어렵다고 합니다. 연락됐을 때는 이미 세계 대회에 나간다고 장기간 해외에 나갈 일정을 잡아놨다고.”

“적당히 데려올 사람 없어? 후보군도 제대로 안 갖춰놓고 뭐 했어!”

양은냄비는 곧 다시 끓어올랐다. 이번 쇼는 미국의 PD와 협조하면서 국제적인 디저트 체인을 소유하고 있는 디저트의 황제, 아드레아노 존부를 모시고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런 만큼 미국에 맞서서 실력을 보여줄 만한 능력 있는 한국인 쉐프를 원했다. 최소한 8~9년 이상 호텔이나 윈도우 베이커리에서 실력을 쌓은,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진 쉐프라면 더 좋다. 거기에 TV에 나와도 화제가 될만한 비주얼이라면 금상첨화다. 당연히 10년 차 이상의 페이스트리 쉐프 중에 TV 출연에 관심이 있으면서 외모까지 어느 정도 되어주는 이는 많지 않았다.

“예비 탈락자들을 대기군으로 편성해 놓았으면 재깍재깍 관리를 했어야지!”

막내 박하연이 어깨를 웅크리며 최대한 몸을 작게 했다. 조금이라도 눈에 덜 띄고 싶다. 당장 구멍이라도 있으면 파고 들어가고 싶다. 하지만 이곳은 방송국 회의실. 어디 도망칠 데도 없다.

‘어디 이민주가 그렇게 어이없이 사고를 당할 줄 알았나.’

주눅 들어있는 박하연을 보며, 박하연의 사수인 임종태가 말했다.

“우리 아침 9시 뉴스에 나왔던 페이스트리 쉐프가 한 명 있는데. 그 사람한테 컨택해 보면 어떨까?”

김산호가 호기심을 보였다.

“9시 뉴스에 페이스트리 쉐프가 나와? 왜?”

“시골 노인네 결혼식에서 엄청나게 화려한 퍼포먼스를 펼쳤더라고요.”

임종태가 스마트폰 화면을 엄지손가락으로 슥슥 넘겨 보더니 곧 페이스북의 링크를 찾아주었다.

“나는 페북에서 봤는데, 원래 출처는 소망시청 트위터더라고.”

동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하면서 김산호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야. 이 사람은 누구야? 얼굴 생긴 것 좀 봐라. 우리 모델들 다 찜쪄먹겠네.”

하지만 그가 정말 놀란 것은 그다음이었다.

”이 미친 짓은 뭐지. 이 사람 페이스트 쉐프 맞아? 마술사 아니야?“

크로캉부슈에 캐러멜 시럽을 폭죽처럼 뿌리는 영상을 보고 그가 단숨에 말했다.

“얘 누구야. 연락처는 알아?”

“이 사람 연락처는 모르는데, 동영상을 찍은 담당 직원 연락처는 알아냈어요. 5분 내로 통화하기로 했습니다.”

“좋아, 임종태같이만 하라고.”

박하연은 옆에서 고개를 내밀고 영상을 같이 보았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촬영장 막내는 SNS를 볼 시간이 많지 않다. 하지만 낯익은 얼굴을 보고 그녀가 놀라 외쳤다.

“H&J 카페 앤 베이커리 앤 카페의 쉐프님이신데요?”

“하연이 아는 사람이냐?”

“아는 사람이라기보다……. 강남에 있는 디저트 카페에 빵이 맛있는데 얼굴이 더 맛있게 생긴 쉐프가 있다고…….”

막내들끼리 모여 있는 단체 채팅방에 올라온 사진을 본 적이 있던 그녀가 말을 흐렸다.

“그래, 우리 막내가 간만에 쓸만한 짓을 좀 했네. 소망시청 직원이랑 통화할 필요는 없어. 여기 강남에 당장 가보자.”

“당장요?”

“시간이 없잖아. 이 외모면 방송에 나오면 입 다물고 서 있기만 해도 시선을 끌게 되어 있어. 이런 원석이 또 어디에 있겠어.”

“예…….”

◈          ◈          ◈

H&J 카페 앤 베이커리.

진혁은 언제나처럼 오픈 키친에서 빵을 만들고 있으며 백진영은 커피를 내린다. 김가영이 계산대에 서 있고 서창덕은 손님들에게 서빙을 하던 중이다. 계산대에 서 있던 줄을 밀어내고 오픈 키친 조리대 앞에 선 손님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TV 출연 후보로 테이스팅 테스트를 받아보시지요.”

그것은 권유도 무엇도 아닌, 명령에 가까운 어조였다. 자신에게 명령조로 말하는 인간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은 진혁이 차분히 대답했다.

“TV 촬영요? 지금은 손님들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이야기하기에 적절치 않은 시간입니다만.”

그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고민이라고는 단 1초도 없이 돌아온 그 대답에 김산호 PD가 할 말을 잃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당연히 바로 수긍할 줄 알았는데.’

‘진짜 잘생겼다.’

그 옆에 선 박하연은 철없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성격도 장난 아닌데? 박 PD님을 저렇게 말 한마디로 석상처럼 만들어버릴 수 있다니 대단해.’

진혁은 오픈 키친에서 케이크를 장식하고 있었다. 작고 귀여운 크기의 바닐라시트지 위에 짤주머니로 생크림을 올려놓는다. 밀푀유를 만드는 마지막 작업이다. 수십 개의 케이크 위에 크림을 짜 올리는 그의 동작은 리듬감 있는 댄서처럼 흥겨웠다. 가게 안에 풍기는 묘하게 삼림욕장같이 상쾌한 기운도 즐거운 기분을 더해주었다. 이틀간 밤을 새워서 다음 주의 촬영준비를 하던 중에 여기에 와서 처음에는 괴로웠는데, 신기하게 카페 안에 들어서자 조금 기운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박하연이 생각했다.

‘여기에 사람이 많이 올만도 해.’

옆에서 특이한 형태의 기계로 커피를 내리고 있던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저희 쉐프에게 무슨 일이십니까?”

“별거 아니에요, 형.”

“저는 SBC의 김산호 PD입니다. 이번에 아드레아노 존부와 함께하는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 출연 후보로 선정되셔서 관련 오디션에 관심이 있으신지…….”

김산호 PD는 꿋꿋이 말을 꺼냈다. 백진영이라는 명찰을 단, 바리스타의 동공이 커졌다.

“디저트 서바이벌 시즌 2 한국 편이요?”

“예.”

“저희 진혁이가 후보로 선정되었다니…… 흠…… 선정될 만하죠.”

“임 쉐프님이라면 충분히…….”

옆에 서 있던 다른 직원들도 거들었다. 보통은 방송국에서 나온 사람 앞에서 기죽어 하면서 방송에 잘 나오게 해주세요 하면서 카메라를 의식하게 되는데, 완전히 반대였다. 임진혁 쉐프가 이렇게 대단하니까 방송에서 나오지, 하면서 다들 자연스럽게 수긍하고 있다.

‘대단한 사람이야. 상황을 자기 마음대로 이끌어가고 있어.’

백진영이 물었다.

“진혁아. 어때?”

“방금 거절했는데 같은 이야기를 또 하게 하는군요.”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갑자기 묘하게 오싹한 느낌이 나서 박하연은 어깨를 움츠렸다. 눈치 없는 김산호가 말을 이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면 부모님도 좋아하시고…….”

‘요즘 세상에 누가 부모님이 TV 나오면 좋아한다는 말에 넘어와?’

박하연은 김산호를 힐끔 보았다. 하다못해 인기를 끈다는 말이라든가, 가게 홍보가 될 것이라든가, 할 말이 그렇게 많은데 누구나 자기처럼 부모님 타령을 하면 좋아하는 줄 안다. 하지만 의외로 그 말은 효과가 있었다.

“!”

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9시 뉴스에 올라갔다면서 부모님에게 연락이 왔지.’

부모님만이 아니다. 먼 친척들, 사촌들과 숙모, 이모들에게서 연락이 잔뜩 왔었다. 부모님과 진희의 연락을 빼고서는 전부 건성으로 받았지만, 부모님은 꽤 기뻐했었다. 백진영이 진혁을 힐끔 바라보았다가, 김산호에게 넌지시 말했다.

“아드레아노 존부의 디저트 서바이벌 쇼라면, 저희 화웅에서도 이번에 오븐을 협찬하고 있습니다.”

“여기 H&J가 화웅 제과제빵기계공업에서……?”

“예.”

다짜고짜 영업시간 중에 찾아온 것은 너무 급해서 그렇다며, 김산호 PD는 몇 번이고 사과하고 돌아갔다. 그러면서도 오늘 내로 꼭 연락을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결국 그날 저녁 가게 문을 닫을 시간, 조카에게 소식을 들은 백정흠 사장이 찾아왔다. 놀랍게도 임운정과 함께였다.

“아버지, 멀리까지 오셨네요. 오늘은 학교 수업이 있으신 날이잖아요?”

“아니야. 개교기념일 휴일이었어.”

“그렇군요.”

“넌 네가 다니던 학교 개교기념일도 모르냐?”

진혁은 언제나처럼 군대 핑계를 댔다.

“군대 갔다 오면 다 까먹어요, 그런 건.”

직원들을 먼저 보냈다. 모두 퇴근해버리고 남은 빈 가게의 테이블에 네 명의 남자가 사업 의논을 할 때처럼 둘러앉았다. 백진영이 직접 내린 음료를 가져왔다.

“운정이 아저씨는 커피를 안 드셨죠? 단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으니까,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밀크티는 어떠십니까? 따뜻한 거로요.”

“고맙다.”

“진혁이는 유자차. 그리고 삼촌은 언제나처럼 아인슈페너.”

“고마워.”

진혁이 구워 둔 빵은 없었다. 오늘도 남은 것까지 전부 팔려버렸기 때문이다. 진혁이 물었다.

“간단하게 뭐라도 구울까요?”

“아니야. 이따가 가서 밥을 먹지.”

“고기도 좋죠.”

“그래요.”

백진영이 음료를 내리는 동안 아버지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래, 텔레비전에 출연 제의를 받았다고.”

“예.”

진혁이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관심은 있냐?”

그는 아버지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혁이 웃었다.

“별로 없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관심이 생기네요.”

‘아버지가 갑자기 찾아올 만큼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무리 개교기념일이라고 해도, 아버지는 바쁜 사람이다. 그는 가게에서 빵을 만들어야 하니까 기본적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다. 가족이 다치거나 자신이 다치거나 하는 응급상황이 아니면 꿋꿋이 가게를 지키며 빵을 굽는 사람이다.

‘실습 교수 일을 할 때는 나나 일봉이 어떻게 일하는지 확인을 한 다음에 진행하셨지.’

이제 일봉에게 완전히 가게를 맡길 수 있게 되었다기보다, 이번 TV 출연 건을 아버지가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진혁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진혁이 자네가 들어간다고 하면, 내가 오븐 개수를 하나 더 내놓아줄 수 있지. 아주 최고급으로 갖춰 주겠어.”

백정흠 사장이 흥분해서 말했다.

“아무렴, 우리 진혁이가 나가면 실력이야 확실히 보여줄 수 있지. 그런데…… 진혁이가 나가고 싶지 않으면 나갈 필요는 없어.”

아버지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지금 여기 카페는 쉐프가 진혁이 한 명밖에 없으니까 촬영하는 동안 가게는 영업이 불가능할 테고.”

그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그래서 정흠이한테도 폐가 될 것이고.”

“아니. 나한테는 폐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홍보가 되지. 진영이네 가게하고 화웅 이름 자체가 높아질걸.”

백정흠이 열심히 말하는 것을 무시하고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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