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86화
그녀가 당당하게 외치자 군중이 썰물이 잦아드는 것처럼 조용해졌다. 확실히 이 카리스마는 진철 사태가 아미파를 이끌던 때와 다르지 않다. 진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접시 가지고 나오면 두 개씩 줄 테니까 알아서 나와!”
“다 좋은데 왜 갑자기 반말이세요?”
최연장자인 정갑녀가 피식피식 웃으며 말하자 금천복이 씩 웃었다.
“부부는 일심동체지?”
“어엉?”
“나랑 내 신랑이랑 합치면 150살이니까 여기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연장자라우.”
“그런 말도 안 되는 계산법이 어디 있어?!”
깔깔거리고 웃고 떠들면서 한 사람씩 앞으로 나섰다. 다들 덕담을 한마디 하며 접시를 내밀었다.
“밤마다 이불 속이 뜨거워지기를!”
“이 망할 노인네가 못하는 소리가 없네!”
접시에 슈크림을 나누어 받은 이는 뒤로 물러나고, 새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덕담을 한다. 하지만 한 사람은 덕담을 하지 않았다.
“나는 저기에 있는 큰 거로 줘.”
“여그를 지금 식당으로 아는 기가, 주문을 하게?”
핀잔을 주면서도 금천복은 제일 큰 슈크림을 골라 내어주었다. 감 노인이 하나를 더 얹어 주었다.
“왜 나는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를 주는겨?”
홍 노인이 묻자 감 노인이 답했다.
“내 걸 하나만 양보한 거야.”
“허, 승자의 여유란 건가?”
금천복이 감 노인을 흘끔 노려보았다. 감 노인이 그 눈길을 눈치채지 못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은 슈크림을 두 개 주고 싶지만 내가 하나는 꼭 먹어 보고 싶어서…….”
세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동갑내기 어린애들처럼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진혁은 함께 잘 노는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들을 지켜보았다.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군.’
진혁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진혁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금천복과 감호철이다. 하지만 실제 정신 연령은 한참 나이 들어있는 그로서는 오히려 입장이 달랐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으니 더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지. 날짜도 잘 잡았어.’
진혁이 세 사람을 바라보는 도중, 마라톤 대회에서 보았던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가 살갑게 진혁에게 인사했다.
“임진혁 씨! 저예요, 서미란이예요.”
‘맞다, 그런 이름이었지.’
관심이 없어 이름을 제대로 기억해두지 않았다. 시청 여직원이었던 것만 기억한다. 그녀가 흥분해서 말했다.
“아까 크로캉부슈에 캐러멜 시럽 얹으시는 거 봤어요! 동영상으로 찍었는데, 혹시 소망시 노인 결혼식 지원사업에 올려도 될까요? 너무 멋있어서 꼭 공유하고 싶어요.”
소망시청의 노인복지사업과에서 햇살 노인정 앞에서 행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던 터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이다음에 다른 노인분들이 결혼식을 하시게 되면, 그때도 케이크를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이 슈크림 진짜 너무 맛있어요. 빵집에서 파는 건 못 봤는데, 앞으로 팔 계획이 있으신가요?”
벌써 두 개를 다 먹어버린 그녀는 입가에 새하얀 크림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진짜, 슈를 입안에 넣는 순간에 크림이 팍하고 터져 나오는데, 캐러멜이 조금 달다 싶었는데 크림은 달지가 않고 폭신폭신한 게 구름처럼 부드럽고…… 너무 맛있어요!”
질문에 대답은 듣지도 않고, 양 뺨이 발갛게 상기돼서 그녀가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너무 맛있는 거 아니에요?! 제가 여기 빵을 먹고 나서는 다른 가게에서는 아예 빵을 못 먹는다구요.”
진혁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얘기는 퍽 자주 들어서, 이제는 새삼스러울 정도다. 서미란이 다시 물었다.
“요즘은 가게에 들러도 거의 보이지 않으시던데, 복학하신 건가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직장을 옮겼습니다.”
서미란은 놀라워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전혀 몰랐네요. 옆에 가게 확장하실 때도 계셨잖아요. 그래서 요즘 그 사업을 같이하시느라 바쁘신 줄만 알았어요.”
그녀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과장님이 카스텔라 주문 때문에 더 말씀하실 게 있다고 하셔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했었어요.”
“임운정 사장님과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저기 계십니다.”
진혁이 서미란에게 아버지를 가리켜 보였다.
“저는 이제 먼 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노인정 케이크를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이번처럼 무료 퍼포먼스를 할 수는 없지만. 웨딩 케이크 주문을 시청에서 정식으로 해주신다면 아버지께서 만들어주실 겁니다.”
진혁은 자연스럽게 주문을 아버지에게로 떠넘겼다. 서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옮기셨으니 어쩔 수 없죠.”
그녀는 다시 케이크 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진혁의 아버지를 향해 자리를 옮겼다. 진혁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을 관찰했다.
결혼식을 위해 각자 좋은 옷을 차려입고 온 노인들. 희망 노인정에서 항상 추레한 옷을 입고 피곤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이들은 저마다 각자 다채로운 표정을 하고서 슈크림을 먹고 있었다.
‘저 노인은 또 왜 저기 가 있어?’
부부와 이야기를 끝냈는지, 홍 노인은 혼자 있었다. 그것도 나무 뒤에 숨어있었다. 등치 뒤에 숨어서 슈크림을 먹으면서 동시에 울고 있었다. 장례식장에 온 것처럼 통곡을 하며 꺼이꺼이 운다.
“이눔의 슈크림은 왜 이렇게 맛있어서……! 내가 눈물이! 다! 나네!”
울면서 웃는 그 얼굴에는 오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진혁은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맛있는 음식은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솔직한 감정을 끌어내지.’
이번에 만든 슈크림에도 오행기가 들어있다. 관절염이 있는 노인이라면 하루 이틀은 통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때 일봉이 황급히 달려왔다.
“형! 저희 샌드위치 모자라요. 사람들이 자꾸 더 와서……. 지금 여기서라도 더 만들까요?”
“내가 할게. 그게 더 빠르잖아.”
“제가 재료는 다 챙겨 놨어요.”
잔치가 끝나고 정리까지 마무리되고 나자 이미 해 질 녘이었다. 일봉이 기지개를 켰다.
“그래도 평소에 일하는 것보다는 오늘 훨씬 일찍 끝났네요.”
“그런 셈이지.”
“형,”
일봉이 물었다.
“거기서 일하는 건 어때요? 여기하고 많이 다르죠?”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료를 같이 하니까 아무래도 좀 다른 점은 있지?”
그리고 사람이 다르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고, 일봉이 없다. 새로운 직원들이 조금 어색했지만 적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도 일봉만큼이나 속도가 느려서, 진혁이 보기에는 굼벵이 같았다.
“일할만해요?”
“나쁘지 않아.”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아직 일월신교의 말단 훈련생이던 시절에, 72시간 연속 야간 근무를 서면서 경비 업무를 하는 것을 비롯하여 장비 없이 맨몸으로 산을 주파하는 생존 훈련 등, 야만적인 훈련을 통과하고 훌륭한 성적을 내어 소교주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노동법과 급여, 휴가와 연차 따위는 없는 삶을 거쳐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진혁은 자신 몫의 슈를 하나 집어 들어 깨물었다. 폭신한 슈 껍질에 싸인 부드럽고 순한 생크림이 비어져 나오며 달짝지근한 캐러멜 시럽과 함께 어울려 딱 먹기 좋은 당도가 되었다.
‘내가 만들었지만 맛있군.’
자신 몫의 슈크림을 집은 일봉도 진혁을 따라서 슈크림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오랜 시간 동안 크림과 밀착해 있어 약간 눅눅해진 슈 껍질을 이빨로 찢으면, 생크림이 사방으로 폭발하듯 뛰쳐나온다.
“신기하다. 딱 적당한 맛이 됐네요. 크림만 맛보았을 때는 좀 심심하다 싶었는데.”
일봉이 감탄하며 절반 남은 슈크림을 바라보았다.
“캐러멜 시럽을 같이 먹으니까 그렇게 맞췄지.”
“슈크림이 한두 개도 아니고, 그때그때 맞춰서 뿌려준 것도 아니고. 전체적으로 시럽을 올리면서 양 조절을 어떻게 해요?”
일봉이 묻자 진혁이 반문했다.
“그걸 왜 못해?”
일봉이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말했다.
“못해요, 못해!”
“연습해. 하면 된다.”
“……네.”
일봉이 투덜거렸다.
“형은 얼마나 연습했는데요?”
“한 번.”
“와, 씨. 형 같은 천재가 우리나라에 한 명밖에 없어서 다행이에요. 진짜.”
“어디에 뿌릴지 미리 결정한 다음에 그대로 뿌리기만 하면 돼. 나중에 연습하고 싶으면 봐주마.”
“형 진짜 강남 가게에서 잘 지내는 거 맞죠? 형 실력이야 어딜 가도 탑이지만. 일을 너무 잘하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질투할 수도 있어요.”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해라. 페이스트리 쉐프는 나 혼자야.”
“아. 다른 쉐프 없이 형 혼자서 만들어요? 괜찮겠어요?”
일봉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마지막에 강남 가는 분량 거의 6종을 개당 4백 개씩 올렸잖아요. 지금 종수도 꽤 늘었다고 들었는데, 그걸 다 형이 혼자 굽는다고요? 그거 인력 착취 아닙니까?”
진혁이 피식 웃었다.
“혼자서 할만하니까 하는 거지.”
아버지와 일봉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새벽에 무공을 이용하여 혼자 만들어 두니까 오히려 일하는 시간은 줄었다. 이천 개가 넘는 빵 반죽을 만들어서 발효 통에 넣어두고 다음날 굽도록 준비해놓는 시간 자체는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전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신경 써서 일하는 시간을 맞출 때는 일 중 4~5시간은 재료 준비와 반죽, 성형에 시간을 썼다. 오븐이나 스탠드믹서기 등을 사용한 흔적도 신경 써서 남겼다. 지금은 제빵을 하는 사람이 혼자밖에 없다 보니 굳이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일봉이 걱정스레 물었다.
“오픈 키친에서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으면 불편하지는 않아요?”
“? 뭐가?”
진혁이 일봉을 응시했다. 도대체 그게 뭐가 불편한지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그 얼굴에 일봉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에요. 내가 누구한테 뭘 물어보는 건지.”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는데.”
“요즘은 장 사장님 도와서 샌드위치 작업하는 시간이 늘었어요. 아 참, 이번에 병철이 형이 새 샌드위치 추가하고 싶다고 얘기하던데. 형도 얘기 들으셨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뻔하다. 다른 빵은 어렵지만 샌드위치는 자신 있다며 이전부터 이것저것 시제품을 만들어 왔던 일봉이다. 진혁이 픽 웃으며 일봉을 바라보았다.
“너도 메뉴 개발해서 내라. 내 기준선을 통과하면 정식 판매해 주지.”
“그래도 됩니까?!”
일봉이 흥분해서 벌떡 일어났다.
“당연하지. 우리 첫 번째 직원이잖냐.”
“고마워요, 형.”
일봉이 주섬주섬 품 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제가 튀긴 닭 다리 살 치킨까스를 메인으로 한 샌드위치하고요, 다이어트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닭가슴살이랑 샐러드를 넣은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생각해봤는데요.”
어떤 의도로 재료를 골랐는지 속셈이 빤히 보이는 재료 선정에 진혁이 피식피식 웃었다.
“평화 일봉 농장 콜라보 샌드위치구만.”
“그리고 방사 목장 달걀로 만든 에그 햄치즈 샌드위치하고요.”
일봉이 열심히 말했다.
“제가 샌드위치를 아예 만들어 오려고 했는데, 오늘 만들지를 못했어요. 혹시 레시피만 먼저 봐주실 수 있는지 해서요.”
레시피 수첩을 보면서 진혁이 하나씩 짚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