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85화
“허어……. 이전하구는 영판 다르고만! 전에는 거, 가운데 구멍 뚫어 놓은 케이크에 설탕으로 아주 꽃밭을 한 판 차려놓았잖아. 금 씨가 입은 옷이랑 구두까지 똑같이 챙겨입은 설탕 인형까지 있었구만, 이번에도 그런 거를 할 줄 알았지.”
‘이번에는 금 씨와 쳐 죽일 감가 두 놈 설탕 인형이 서 있을 줄 알았는데.’
홍 노인은 그림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폈다. 아까 언뜻 보았던 첫 번째 그림, 홀로 고물을 주워 파는 20대 금 씨와 서당에서 책을 들고 서 있는 감 씨, 둘 다 서로를 외면하고 서 있는 것은 대충 보고 넘겼다. 그 이후에 있는 아이를 혼자 키우는 금 씨, 40대가 되어 사업에 성공한 금 씨, 그리고 햇살 노인정에 빵을 사다 주는 지금의 금 씨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초콜릿 판때기를 모아서 신기하게 금 씨의 모습을 그려냈다.
“젊은 금 씨는 보지를 못했을 텐데 어쩌면 이렇게 똑같이 만들었누?”
저절로 찬탄할 수밖에 없는 솜씨다. 좀처럼 칭찬하는 말을 하는 적이 없는 홍 노인마저도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러한 말을 한 것을 알면 햇살 노인정의 모두가 놀랄 것이다.
그는 감가 놈의 그림은 대충 지나쳤다. 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젊은 감가 놈, 양계장에서 닭을 치는 30대의 감가 놈. 별달리 관심 없는 감가 놈 그림들을 다 지나서 두 사람이 행복하게 서 있는 실루엣 한 장을 보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렇게 두고 보니까 너무 잘 어울려서 화를 낼 수가 없구먼.”
진혁이 빙긋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이미 인정하고 축하하러 온 것이다. 패배한 개처럼 꼬리를 다리 사이로 내리고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이 더 마음 편했을 테지만, 빵이 먹고 싶다는 핑계를 대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축복하기 위해서. 결코 편한 발걸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노인네가 밉지 않았다.
“그렇죠?”
“그렇제.”
진혁은 가늘고 두꺼운 나무말뚝 같은 것을 집어 들어 원통형 케이크의 가운데에 푹 꽂아버렸다. 홍 노인이 깜짝 놀랐다.
“아니, 이 훌륭한 예술 작품에 무슨 무도한 짓인가?!”
“그렇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홍 노인은 결혼식과 신랑과 신부에 이러니저러니 대해서 불평은 하고 있어도 케이크는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자신이 만든 빵을 기대하는 건, 싫지는 않다.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이렇게 되어야 하거든요.”
그는 오른쪽에 쌓여 있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슈크림들을 가리켰다. 둥그스름하지만 울퉁불퉁하게 부풀어 올라 있는 슈크림의 얇은 껍질 너머로, 홍 노인은 안쪽에 들어있을 새하얀 크림의 맛을 상상할 수 있었다. 홍 노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흐, 맛있겠다. 하나 먹어도 되나?”
“하하하하!”
진혁이 웃었다. 마라톤 대회 날 홍 노인이 감 노인을 따라서 뛰면서 피를 토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왜 계속해서 자신을 방해하느냐고. 그녀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게 누군지 생각하라고 외쳤지.’
하지만 자신만의 마라톤을 완주한 감 노인을 보고서 금천복은 그를 선택했다,
‘찌질하게 굴면 적당히 포기하게 만들 생각도 있었는데, 잘 됐어.’
홍 노인은 오랫동안 고대하던 시험이 끝난 것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그는 슈크림 주변을 맴돌면서 제일 탐스럽게 생긴 것이 어떤 것인가 살폈다.
“나는 저기 저것이 맘에 드는데.”
홍 노인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진혁이 꼭 챙겨 주리라 믿는 듯한 자신감이었다. 위압감이라도 보여주면 바로 찌그러지면서 물러날, 하잘것없는 소인배다. 중원이었다면 이런 자는 주변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혁은 그것이 어린아이 재롱같이 느껴졌다.
‘내 케이크가 좋아서 저러는구만.’
“이따가 다 만들어진 다음에 꼭 드리겠습니다.”
진혁은 일생일대의 실연을 당한 소인배 녀석을 너그럽게 보아넘겼다. 그리고 따뜻하게 데워진 캐러멜 시럽에 슈크림을 하나 집어 올려 끝에만 아주 살짝 묻혔다.
“그거는 뭐하는 건가?”
단내가 물씬 풍기는, 팔팔 끓는 캐러멜 시럽을 호기심 있게 쳐다보는 홍 노인이었다.
“보시면 압니다.”
원통형 케이크 위에 하나씩 하나씩 나란히 배열하자 슈크림이 한 단 쌓였다. 진혁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그 위에 슈크림을 하나씩 하나씩 원뿔형으로 붙여나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슈크림들이 층층이 쌓여 거의 진혁의 키에 도달할 만큼 높아졌다. 그 모양을 본 홍 노인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보고 지금은 먹을 수 없다고 했구만. 나는 이 케이크는 아까 그대로 완성인 줄 알았어.”
진혁이 빙긋 웃었다.
“이제 이 위에 캐러멜 시럽을 뿌리면 끝이죠.”
일봉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사장 형! 다 됐어요? 이제 나가면 됩니다!”
“딱 맞게 왔군.”
조금 전까지 본 달인의 손놀림에, 젊은 청년인 진혁에게 경외감을 느끼며 홍 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
“괜찮습니다.”
“형, 이거 내가 옮길게요.”
일봉이 카트를 밀고 나가는 것을 도우려고 했으나 진혁이 거절했다.
“지금 무게 균형이 아슬아슬해서 내가 옮기는 게 나아.”
“그럼 제가 문을 열게요!”
일봉이 허겁지겁 뛰어나가며 문을 열었다. 홍 노인은 주춤주춤 물러서며 뒤로 비켜섰다. 진혁이 매끄럽게 카트를 밀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어어?”
홍 노인은 꿈을 꾸는 것처럼 카트를 바라보았다. 저 카트는 햇살 노인정에서 이십여 년 전부터 쓰던 건데, 대단히 삐걱거리는 물건이다. 하지만 진혁이 움직이는 카트는 백조가 수면 위를 미끄러져 나가듯 매끄럽게 굴러갔다.
“흔들려서 부딪히면 떨어질 줄 알았는데 다행이구먼.”
홍 노인이 중얼거리면서 두 사람을 따라나섰다. 아무도 진혁이 천마강림보의 제2성, 아주 기본적인 무공인 초상비를 응용해서 카트를 1mm가량 허공에 띄워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강기를 이용해 공기쿠션을 만들어 케이크가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게 세심하게 조절하기까지 했다.
‘좋아. 잘 되고 있어.’
뿌듯한 마음에 진혁이 미소를 지었다.
‘결혼식 하고도 잘 어울리고.’
◈ ◈ ◈
진혁의 아버지가 사회자로서 진행을 맡았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결혼에 대한 맹세를 읽는 시간이 끝나고 바로 피로연이 시작되었다.
“축하합니다!”
“축하드려요!”
“만수무강하세요!”
“예끼, 만수무강이 지금 왜 나오나!”
진혁 역시 두 사람의 혼인을 축하하며 박수를 쳤다. 박수는 잦아들고 임운정이 덕담을 하였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십시오.”
이제 정식으로 부부가 된 두 사람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서 탁자마다 인사하러 다녔다. 감 노인의 얼굴은 보름달처럼 환하게 온 세상의 기쁨을 다 담고 빛나고 있었다. 금 씨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주름진 얼굴에 뺨이 붉게 물들어 있어 수줍어 보였다. 평소에 욕쟁이 할머니처럼 이런저런 말을 솔직하게 하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가운데 테이블 옆에 서 있던 진혁에게, 아버지가 눈짓했다. 진혁은 앞으로 나서서 케이크 옆에 섰다.
“자! 그럼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여러분, 제 아들이 두 분을 축하하는 뜻에서 만든 웨딩 케이크입니다. 독특한 모양에 놀라셨죠? 크로캉부슈라는, 프랑스에서는 웨딩 케이크로 자주 쓰는 케이크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슈크림을 쌓아서 만들고, 위에 캐러멜 시럽으로 마지막 장식을 합니다.”
아버지의 목소리 역시 기쁜 듯 한 톤이 높다. 진혁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섞여들어 있는 설렘을 느끼며 캐러멜이 냄비째 올라가 있는 버너에 불을 붙였다. 파아란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고 캐러멜이 곧 끓기 시작했다. 옆에 다른 이들이 기웃거렸다.
“이건 손으로 만지거나 하면 끈적거리니까 옆에 계신 분들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짱거리면서 투명한 시럽을 곁눈질하던 홍 노인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하고 나서 진혁이 멸균 라텍스 장갑을 한 손에 끼었다.
“그럼 지금부터 캐러멜 시럽을 바르겠습니다.”
다른 손으로는 캐러멜 시럽을 넣은 짤주머니를 들고서, 그는 가볍게 한 손으로 시럽을 허공에 흩뿌렸다. 마치 폭죽이 터져 나오듯 여러 갈래로 새어 나온 시럽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흩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어어어!”
마이크를 잡고 있던 아버지가 놀라서 순간 소리를 냈다. 하지만 허공으로 튀어 오른 캐러멜 시럽 줄기는 전부 크로캉부슈를 둘러싸고서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안착했다. 진혁이 싱긋 웃었다.
“어떻습니까?”
“와아아아아아아!”
결혼식의 주인공 두 사람과, 사회자인 아버지, 그리고 하객들 전부가 열광하며 박수를 쳤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진혁이 손을 한 번 휘젓자 시럽이 그물처럼 촘촘하게 바로 뿌려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역시 만천화우는 실생활에 쓸모가 많단 말이지.’
사천에 있는 당가는 대대로 독과 암기를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진혁은 소교주 시절, 당가의 후계자 싸움에서 탈락한 2인자를 꼬드겨서 당가의 가주가 되도록 도운 적이 있었다. 대신 그는 가주가 된 이후 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당문의 무공인 암기술, 만천화우를 진혁에게 가르쳤다. 온 하늘에 꽃비가 내린다는 말과도 같이, 360도 전후상하방 전부를 향해서 천 개의 독침을 쏘아내는 기술이다. 하지만 번거롭게 독침을 일일이 갖고 다닐 생각이 없었던 진혁은 강기를 독침처럼 쏘아내는 형태로 기술을 개량했다. 이번에는 극세량의 강기에 캐러멜 시럽을 실어, 원하는 방향과 위치에 놓이도록 적절하게 힘을 조절했다.
“자, 자. 두 분은 이쪽으로 오세요!”
진혁의 아버지가 인도하여 새신랑과 새신부가 케이크 앞으로 왔다. 그들은 함께 케이크 자르는 칼을 함께 들고서 먹먹한 얼굴로 그 앞에 멈추었다.
“이, 이거를 어떻게 잘라야 하지? 그림이 너무 예쁜데.”
케이크를 잘라서 나눠주어야 할 역할을 맡은 금천복이 과장된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진혁 군, 이 그림들이 너무 예쁜데 다 먹어버리기엔…….”
금천복의 표정을 살핀 감 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혁이 대답했다.
“그럼 슈크림 부분만 먼저 잘라서 나눠드리겠습니다. 아래 케이크는 나중에 가족분들과 함께 나누어 드시고요.”
“언제까지 먹을 수 있는데?”
“초콜릿 가나슈 버터크림 케이크인데, 냉장 보관하면 내일까지는 드셔야 하고요. 냉동 보관하시면 몇 주 더 드실 수는 있지만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알았어, 알았어.”
세 사람이 속닥거리며 시간을 끌자, 케이크 커팅을 기다리고 있던 군중 중 한 사람이 저 멀리서 소리쳤다.
“케이크를 빨리 잘라라!”
쩌렁쩌렁한 홍 노인의 목소리였다. 당장에라도 케이크를 먹고 싶어 하는 그 절절한 외침에 다른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곧 홍 노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함께 농담처럼 호응하여 외치기 시작했다.
“빨리 잘라라!”
“나눠주세요!”
“먹고 싶어요!”
군중의 외침 소리를 듣고서 감 노인이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걸 어떻게 자르면 된다고?”
진혁이 웃었다.
“위에 있는 슈크림을 1인당 2개씩 떼어서 주시면 됩니다. 그래도 조금 더 넉넉하게 남을 거예요.”
“아! 자를 필요가 없구나!”
금천복이 칼을 내려놓고서 환하게 웃었다.
“자! 여러분 조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