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84화 (84/656)

제 084화

일월신교의 교도들이 농사를 지을 때는 비닐 따위가 없었다. 진혁은 아버지가 가리키는 빈 땅을 바라보았다.

“땅이 잘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지.”

진혁이 다른 쪽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빈 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저쪽은 비닐 멀칭을 하지 않나 보군요.”

“그렇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겨울을 준비하는 거지. 비닐 멀칭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어떤 방법으로든 겨울을 대비해서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음 봄에 맞이하는 소출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어.”

“예.”

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진혁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사람 대하는 게 땅을 준비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한두 번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꾸준히 신경을 쓰고 성의를 보여야 하는 건데 말이지. 잘하고 있더구나.”

진혁은 머쓱해서 시선을 돌려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물었다.

“진혁아.”

“예.”

“감 선생님 케이크는 어떤 거로 생각하고 있지? 나도 궁금하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도 아버지에게는 말할 수 있지 않냐.”

진혁이 수첩을 꺼내서 펼쳐 보였다.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수첩은 백지였다.

“미리 알려고 하지 마세요. 놀라게 해드릴 테니까.”

진혁이 씨익 웃었다.

“두 분이 쉽게 드실 수 있는 부드러운 거로 했어요.”

“진짜 말해줄 수 없냐?”

“네.”

“알았다, 내일 보지.”

아버지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바깥쪽 복도를 응시하며 외면하고 있는 걸 본 진혁이 이마를 긁적였다.

‘이거 진짜, 말씀드려야 하나?’

아버지는 외면하는 척하다가 정말로 잠이 들어버렸다.

“쿨…….”

숫제 아예 복도 쪽으로 고개를 떨어뜨려 버려서, 진혁은 그냥 목베개를 목에 받쳐 드렸다. 어쩐지 피식피식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버지에게 이런 면도 있으셨구나.”

그는 잠든 아버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케이크는 비밀이에요, 아버지. 내일 직접 보시라구요.”

집까지 가는 길은 평화로웠다. 창문 너머로 둥둥 떠 있는 구름을 보며 진혁은 생각했다.

“평생 이렇게만 살아도 좋겠다.”

24장

결혼식 날 아침.

드높이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짤뚱한 단풍나무는 붉은 잎새를 수줍게 흔들었고 키 큰 소나무는 뻣뻣하게 서 있었다. 일찌감치 도착해 카트째 케이크 재료를 갖고 햇살 노인정 안에 들어간 진혁은 바깥 풍경이 흡족했다.

‘이 케이크로 하길 잘했어. 풍경하고도 잘 어울리고 봐줄 만하겠어.’

그는 뛰어난 청력으로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케이크의 토대를 다지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소나무는 감 노인을 닮았구, 단풍나무는 금 씨를 닮았어.”

햇살 노인정의 토박이 정갑녀가 평했다. 앞에 선 홍 노인이 화를 냈다.

“우리 금 씨를 얻다 대고 저런 단풍나무 따위에 비교를 하는가이? 할라믄 저기 저, 꽃나무하고 비교를 하등가! 나무등치에는 벌레가 먹었구 껍질두 다 늙어서 더덕더덕 붙어 있는 기를 어디 금 씨에 비굘 해.”

정갑녀는 혀를 차며 홍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맞추어 깔끔한 새 옷, 연보라색 가을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하지만 홍 노인은 이번 행사에 대비해서 아예 새 옷을 산 것처럼 보였다.

“이전 행사 때마다 입고 오던 양복은 살쪄서 배가 튀어나오고 두 번째 단추가 없었는데, 아예 새 옷을 맞췄구만. 쯧쯧.”

“뭐이 그래 혀를 차구 그런가!”

“불쌍해서 그러오.”

“뭐잇, 내가 뭐가 불쌍해!”

홍 노인이 언성을 높였다. 떡을 쌓고 있던 이을순이가 그 소리를 듣고 와서 중재를 했다.

“오이, 오이. 이 좋은 잔칫날에 왜 그러요.”

금천복과 동갑인 이을순은 정갑녀와 더불어 금천복의 제일 친한 친구다. 미리 주문한 음식들을 상 위에 늘어놓던 을순이 조곤조곤 말했다.

“우리가 이 나이에 초상집 아니구 잔칫집 가는 일이 어디 자주 있소? 아주 좋은 날에 날씨도 맑고 햇님도 축복을 해주는데, 홍 씨도 축복을 해주믄 얼매나 좋을까.”

홍 노인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나를 두고 그 엉큼한 책상물림 따위를 선택하다니. 오늘 내가 이렇게 멋지게 차려입은 걸 보며는 저절로 후회가 될 것이유. 마지막 순간에 결혼식 맹세를 하지 않고 내 생각이 나서 나한테 올 수도 있으니까, 내가 여기 와 있는 거요.”

정갑녀는 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어이가 없어, 무어라 항변하려고 입을 벌렸다. 이을순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게. 오늘 아주 왕자님처럼 잘 차려입었수다. 평소에 그렇게 좀 하고 다니지 그랬소?”

홍 노인은 고개를 들어서 이을순을 바라보았다. 악의라곤 없이 순진한 이을순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여우하고는 살아도 곰하고는 못 산다더니, 이 할망구는 나이를 처먹고 눈치라고는 눈에 붙은 눈곱만큼도 없구만.’

“참 내!”

이을순이 상냥하게 권했다.

“그래두 좋은 날에 축하해주러 와주니까 좋구만요. 우리 노인정 식구들이 많지가 않은데 해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줄어들고 있으니, 원.”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햇살 노인정에서 제일 젊은 박씨도 예순여덟이다. 평균 74세인 노인정 식구들은 한 해 두 해 지나가면서 매해 점점 더 인원이 줄어들었다. 이들이 함께 방문한 초상집만 해도 스무 집이 넘는다.

“원래는 가을하고 겨울에 초상 치르는 일이 많은데 요즘은 없으어, 그치?”

그러고 보니 신기하다고, 정갑녀가 중얼거렸다. 홍 노인이 말했다.

“건강에 많이 신경을 써서들 그렇치. 나도 요번에 건강 검진을 했는데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졌다고 하더라고.”

“나도 치매 검사를 받았는데 오히려 기억력이 쪼끔 좋아졌다고 나왔어요. 육십 넘은 이후로 처음이야.”

이을순이 대답했다. 홍 노인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 그 빵집에서 나와서 샌드위치랑 케이키랑 준다던데. 안 오는가부아?”

정갑녀는 홍 노인이 여기에 정말로 왜 있는지 눈치챘다.

“아니 이 분이, 그냥 빵이 먹고 싶어서 오셨구망이?”

홍 노인이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지! 사람들은 다들 준비가 된 것 같은데 음식들이 하나도 안 나와 있으니까 그러지. 차도 안 와 있고.”

이을순이 햇살 노인정 안쪽을 가리켰다.

“떡 말고는 지금 전부 다 안쪽에 있으요. 빵집 청년이 와서 부신가 뭔가를 한다고 안쪽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디다.”

“호, 빵집이 오긴 왔구만!”

홍 노인이 입맛을 다시며 햇살 노인정 건물 쪽으로 걸어왔다. 그상황을 전부 듣고 있던 진혁은 웃음을 흘리며 마저 케이크 주변에 띠를 둘렀다.

‘그러고 보니 저분이 그, 차인 분이지.’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좋아했고 여자는 남자를 선택했다. 남은 자가 어떤 것을 느낄지, 진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의외였던 점은 그 남자가 결혼식에 왔다는 것뿐이다.

‘불쌍하니 케이크라도 잘 챙겨 줘야겠군.’

마라톤 대회 날, 새벽까지 쫓아오다가 지쳐서 포기해 버렸던 홍 노인의 퀭한 눈동자를 진혁은 기억하고 있었다.

정갑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식탐이 심해, 심해.”

이을순이 웃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야. 재산도 많구. 음식 좀 좋아하는 거야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정갑녀가 눈을 크게 뜨며 이을순을 돌아보았다.

“을순 언니, 설마?”

이을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정갑녀가 고개를 저었다.

“남자 보는 눈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어? 언니, 세상에 남자는 많아!”

“나는 잘 먹는 사람이 좋아.”

두 여자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듣지 못하고서 홍 노인은 노인정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오면 결혼사진부터 보일 텐데.’

아까 진혁도 들어오면서 본, 포스터 크기의 커다란 사진이다. 점잖게 두루마기를 갖추어 입은 감 씨와 세련된 한복 드레스를 입은 금 씨, 두 사람은 사이좋게 마주 보며 궁궐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그 결혼사진을 보았는지 홍 노인이 불평을 토해냈다.

“언제 저런 사진을 찍었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적을 수 있도록 준비된 방명록과 펜을 보고서 홍 노인은 난폭하게 펜을 집어 들었다. 거칠게 펜 뚜껑을 벗기고 바닥에 내팽개칠 듯 집어 올렸다가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다.

“아무도 꺾을 수 없는 꽃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누군가를 선택한다면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미모, 남자는 재력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 중에서 제일 풍요롭고 땅도 있는 자신에게 올 거라고 믿었다. 홍 노인은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럴 거였으면 진작 서로 연분이 나서 맺어지든지! 이제 죽을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너무 오랫동안 시간을 낭비했잖여.”

이러쿵저러쿵해도 한 마을에서 온갖 것을 함께 보면서 이 나이까지 함께 살아온 불알친구다. 투덜투덜 불평하면서 홍 노인은 짧은 메시지를 꾹꾹 눌러 썼다. 그는 문을 열고 안쪽을 바라보았다.

안에는 낯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 임운정이네 장남인 진혁이다. 학창시절에는 별다르게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었는데 최근에는 엄청나게 맛있는 빵을 만들어서 인기가 생겼다. 햇살 노인정의 모든 할멈이 주책없이 좋다고 날뛴다. 홍 노인은 마음속 깊이 진혁을 질투했다.

‘너 같은 젊은 놈들이 할멈들에게 인기가 많으니까, 내가 애인을 만들 수가 없는 거야.’

제일 먼저 홍 노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퀴가 달린 카트 위에 있는, 사람 키만 한 거대한 무엇이었다.

“이것이 뭐유?”

그것은 홍 노인이 막연히 상상하던 웨딩 케이크와는 대단히 동떨어진 물건이었다. 카트에는 못 보던 고급스러운 자줏빛 벨벳이 깔려 있었고, 그 위를 실용적인 비닐이 덮었다. 비닐 위에는 케이크의 맨 밑단 아래에 놓이는 종이 받침 같은 것이 있었는데, 단순히 종이 받침이 아니라 초밥집의 회전 초밥처럼 케이크가 빙글빙글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받침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깔끔한 하얀색 원통형 삼단 케이크 아랫단에는 마치 액자가 걸린 것처럼 황금 테를 두른 그림이 8개 있었다. 케이크를 돌려보면 8개의 그림을 순서대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그림은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달 아래에서 서로 외면하고 있는 것이며 마지막은 남자가 여자에게 무릎을 꿇고 청혼하는 그림이었다. 단순히 펜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여름날 햇빛 비치는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크고 작은 선명한 오색빛깔의 초콜릿 조각들이 금빛 액자 안에서 올망졸망하게 채워져 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오색 초콜릿을 비추어 더 눈부시게 빛났다.

케이크의 아래 판을 바라보며 홍 노인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서 홀린 듯이 한 걸음씩 천천히 케이크 앞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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