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83화
“다음 브레이크 타임 전까지 크루아상은 두 판 더 나올 거고.”
“번호표 200번까지 전부 나갔습니다!”
김가영이 외치는 소리에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영은 옆에서 분주하게 음료를 준비하였다.
“얼그레이와 로얄 밀크티 나갑니다.”
오븐 앞에 서 있는 진혁에게 가영이 말을 걸었다.
“오늘은 크림슨 트리플 치즈케이크가 다 떨어졌어요. 냉장실에서 숙성시키고 있는 것밖에 없어요.”
김가영이 쩔쩔매며 말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영이 한마디 더 했다.
“번호표만 받는 게 아니라, 아예 번호표 받는 단계에서 주문을 받으면 어떨까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데?”
“아예 전일 주문받은 만큼만 만들면 더 편하시겠지만…….”
“아니야. 새로 오시는 손님분도 있고, 그렇게 할 수는 없지.”
그때 두 명의 중년 여자가 다가와 진혁에게 인사했다. 함혜정과 정지숙이다.
“잘 먹었습니다.”
“종종 뵙겠습니다.”
빵 봉지를 가득 들고서 행복한 표정으로 두 사람이 나가고 나서, 백진영이 킥킥 웃었다.
“진혁아, 네 지음 가셨다. 네 빵에 완전히 반한 얼굴이던데. 아예 단골손님으로 업그레이드되시겠는데?”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저분도 미각이 좋긴 한데 지음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더라고.”
“어느 정도 해야 지음이 되는데?”
백진영이 물었다.
“시바스트 크림? 그거 알아내셨다며. 솔직히 그거 아는 사람도 많지 않잖아?”
“시부스트 크림. 일봉이랑 아버지도 그 정도 맛은 알아.”
진혁이 말했다.
“제빵 조금 해본 사람이면 다 알 걸?”
“저는 몰랐는데…….”
“저는 뭔가 다르다는 건 알았는데. 크림 이름을 몰랐어요. 시부스트 크림이란 건 이번에 아예 처음 먹어 봤어요.”
진혁이 선언했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최소한 생크림 휘핑을 유리 볼에서 했을 때 스테인리스 맛이 나지 않는 것 정도는 느껴줘야 지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임 쉐프님은 가끔 이런 데서 인간이 아닌 것 같아요.”
심각한 표정으로 김가영이 고개를 저었다.
“롤 모델로 삼기에는 지나치게 완벽한 분이어서 오히려 어려워 보인다고 할지. 그 작업을 다 혼자 하시면서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반응하시는 걸 보면 너무 대단해 보여요.”
그녀가 한숨 쉬며 말하자 진혁이 되물었다.
“원래 손님에게 미소 지으며 응대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당연한 건 당연한 건데 뭔가 그……. 쉐프님이 말하면 정말로 나를 생각해주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요. 그 순간에 쉐프님이 나를 생각해주고 있는 것 같달까?”
“접대용 멘트 고맙다.”
그가 피식 웃었다.
“진짜라니까요. 그런데 정말 잠시도 쉬지를 않으시네요?”
“내일 숙성해 놓을 분량을 조금만 더 만들어 두려고.”
“벌써 그렇게 됐네요.”
가게를 오픈한 지 2주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손님이 금방 늘어났다. 아침마다 줄줄이 늘어선 손님들은 들어와서 빵을 전부 사버리려고 했다. 줄이 너무 길어져 번호표 기계를 도입했는데, 이제는 사전 주문까지 받아야 한다. 진혁이 얇은 종이를 팔랑팔랑 넘겼다.
“내일 준비할 빵은 이 정도인가.”
백진영이 말했다.
“내일은 가게 첫 휴일입니다. 다들 아시죠?”
“예!”
“착각하고 출근하지 말고요.”
“그럴 일 없습니다!”
“옙!”
아르바이트생에서 정직원으로 정식 채용된 직원 김가영과, 새 아르바이트생 서창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영과 창덕을 보내고 난 후, 백진영이 말했다.
“가영이가 싹싹하고 적극적인데, 창덕이도 괜찮네. 그런데 일이 너무 많아서 직원을 더 뽑긴 해야겠어. 어떤 사람이 좋겠어?”
진혁이 대답했다.
“나는 아무나 상관없어.”
“손발 맞추기 편한 사람이 있을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나한테 맞추겠지.”
“……진혁이 너는 가끔가다가 묘하게 자신만만한 부분이 있단 말이야. 알았어, 너한테 맞출 수 있는 사람으로 내가 뽑아볼게.”
“두 사람처럼 제빵 경험이 어느 정도 있는 게 좋긴 하지. 빵에 관해서 설명할 줄 알아야 되니까. 하지만 경험이 없어도 여기서 배워서 가르치면 되니까 크게 상관은 없어. 어차피 제빵은 나혼자 할 거고 홀 멤버만 뽑는 거니까."
"사실 주방 멤버가 더 필요한 거 아닌가 싶은데, 네가 그렇게 얘기한다면 알겠어. 내일 소망시 내려간다며? 가족 누가 결혼한다며. 네가 만드는 웨딩 케이크, 진짜 궁금하다.”
백진영이 웃었다. 진혁이 대답했다.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 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버지의 선생님 되시는 분이 내일 결혼하시는데.”
“아버지의 선생님? 그럼 나이가 꽤 되시겠네. 재혼이시겠다.”
“초혼이셔. 어렸을 때부터 첫사랑이라고 하더라.”
“대단하시다.”
진혁이 머쓱하게 말했다.
“사실 일 때문에 못 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해해 줘서 고마워. 진영 형.”
이 주간 가게 오픈하면서 생기는 온갖 고난을 함께 겪고 나니 꽤 가까워져서 이제는 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실은 정신 연령으로 따지면 자신이 한참 나이가 위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이런 호칭 문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일일이 신경 쓰기에는 너무나 하잘것없는 일이다.
‘누구를 뭐라고 부르건 나는 나니까.’
-딸랑, 딸랑!
가게 문이 열리며 은빛 종이 우아하게 울렸다. 낯익은 인기척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진혁이 있냐.”
아버지가 들어오며 반갑게 말했다.
“백정흠 사장님과 이야기는 잘 마치셨어요?”
“그래. 너도 나랑 같이 기차를 타고 내려간다고?”
“예. 내일 결혼식에서 크로캉부슈를 할 거라서, 그 자리에 있어야 돼요.”
인사를 하고 나서 두 사람은 자리를 떴다. 뒷모습을 바라보며 백진영이 중얼거렸다.
“진혁이의 크로캉부슈……. 나도 먹고 싶다…….”
서창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 쉐프님이 만드시면 뭐든지 맛있으니까요.”
김가영이 물었다.
“크로캉부슈라면 그거죠? 안에 크림이 든 슈를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시럽을 뿌려서 장식하는 거.”
“잘 아네?”
“제과 학원 이론 수업에서 배웠어요. 실제로 라이브로 하는 건 본 적이 없지만요. 아, 진짜 보고 싶다.”
◈ ◈ ◈
서울역까지 가는 길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리 예약해둔 표를 발권하고 진혁과 아버지는 기차의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이미 겨울이 되어가는 계절, 창밖에 보이는 나무는 잎을 벗어가고 있다. 빌딩 숲을 조금 지나자 황량한 논밭과 콘크리트 1층 건물들이 보였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침묵하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진혁에게 말했다.
“네 선물은 아주 잘 쓰고 있다.”
“어떤 선물요?”
“파이지 롤러.”
“아. 그거요.”
“네 어머니도 아주 잘 쓴다. 진작 살 걸 그랬어.”
“잘 되죠? 요즘은 거의 기계로 한다고 하더라구요.”
진혁이 웃었다.
“금방 본전 뽑겠네요.”
“새로 뽑은 애도 아주 잘해. 세영이라고, 목사님 아들 알지? 걔가 와서 일하고 있다.”
“예?”
이건 조금 놀랐다. 진혁의 집안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동네 토박이인 장은효-진혁의 어머니와 국민학교를 같이 졸업한 분이 목사에게 시집을 갔다. 그래서 목사님 부인이라고 불려왔는데, 진혁의 집과 이런저런 품앗이를 많이 했다. 어머니와 자매간처럼 친해서 김장도 같이하고, 놀러도 같이 다녔다. 진혁이 식물인간이 되었던 회귀 전에는, 남편인 목사와 함께 부부가 자주 찾아와서 수없이 기도해주곤 했다. 그 기도는 아무런 실질적인 효과는 없었으나 아주 약간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진혁이 기억하는 한 그 집 아들이 빵집에서 일했던 적은 없었다.
“머리가 좋아서 의대 갔다고 하지 않았어요? 의사가 된다면서요.”
진혁의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잠깐 쉬나 봐.”
“그럴 수도 있죠.”
“그래서 걱정이 많더라.”
“저도 아직 휴학 중이긴 한데.”
“복학을 하긴 할 거냐?”
진혁이 웃었다.
“일단 H&J 카페 앤 베이커리에서 1년은 일해야죠. 의삼촌이 엄청 잘해줘요. 자기 생명의 은인이라는 소리를 꼬박꼬박 하면서.”
“뭐, 어떻게 하길래?”
“식삿값 따로 주시고, 맛있는 것도 자주 사 주시고.”
진혁이 웃었다.
“메뉴 추가하거나 빼는 것도 전부 제 재량으로 하고 있어요. 지금은 진영이 형이 아예 저한테 맞춰서 새 음료를 만들어내고 있고요. 많이 자극된다고 좋아하더라고요. 다음 아시안 바리스타 대회에도 나간다고 의욕 만만해요.”
아버지가 물었다.
“너는?”
“예?”
“너는 그런 대회에 나갈 생각은 없고?”
진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에 대회에 나갔던 때에 어땠더라. 생각보다 수준이 낮았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지금 당장은 가게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무래도 어렵죠.”
그가 빙긋 웃었다.
“데코레이션 페어도 귀찮긴 했는데 꽤 재미있긴 했어요. 오븐도 받았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네가 관심이 없다면 됐다.”
“예? 아니요, 무슨 일인데요?”
아버지가 주섬주섬 가방 안에서 팸플릿을 꺼냈다. 여러 차례 들여다본 듯 구겨지고 여기저기 밑줄이 쳐져 있는 팸플릿은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 케이크 대회의 홍보 안내물이었다.
“국제 케이크 대회요?”
진혁이 팸플릿을 살펴보았다.
“아버지가 나가시게요?”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35세 미만으로 연령 제한이 있는 청년 대회야.”
“그렇네요.”
다시 꼼꼼하게 참가 조건을 살펴본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나갈 수 있겠군요.”
“꼭 나갈 필요는 없다.”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니 가게에서 새로 일하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잖냐.”
“뭐, 대회 준비 얼마나 걸린다고요.”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학교에서 단체전과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개인전 대표로 네가 나가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김만석이가 하더라고.”
“김만석 교수님이요?”
“사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아버지가 피식피식 웃었다.
“아까 가게에서 너 주변에 있던 직원들 말이다. 새로 온 남자애하고 전에 있던 여자애, 그리고 그 둘만이 아니야. 진영이, 정흠이까지. 너 일하는 거에 완전히 반했다고 하더라.”
“예?”
진혁이 물었다.
“그냥 평범하게 일하고 있는데요.”
“손님에게는 대단히 친절하고, 직원들에게도 따뜻하고. 항상 솔선수범한다며?”
진혁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데요. 그냥 아버지가 가르친 대로만 하고 있습니다.”
“그게 제일 어려운 거야.”
아버지가 창밖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으로 비닐로 뒤덮인 밭을 가리켰다.
“저것 봐라.”
진혁의 시선이 더 멀리 갔다.
“빈 땅에 비닐을 덮어 놨네요?”
검거나 투명한 비닐이 빼곡하게 땅을 덮었다. 땅속에 숨은 고구마나 호박을 보호하기 위해서 비닐을 덮었나 했는데 아니었다. 진혁의 시선에 조금 더 먼 곳에 있는, 아무것도 없는 흙밭 위에 비닐을 씌우고 있는 중년 남자가 보였다.
“그래. 유기농 농법을 하는 사람들이 쓰는 농사법인데, 비닐 멀칭이라고 해. 흙에 비닐을 덮어 놓아서 지력이 더 빨리 회복되도록 하는 거지. 잡초도 덜 자라고, 흙이 비에 떠내려가거나 하는 것도 막아준다고 하더라.”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