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82화
“47번, 48번!”
아르바이트생은 계속해서 번호표를 나눠주며 뒤로 움직였다. 아르바이트생이 한참 멀어진 후 정지숙이 속상해하며 귓속말을 했다.
“너 내 일행이 아니라고? 아예 친구도 아니라고 하지?”
“네가 뭘 몰라서 그래.”
함혜정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번호표 하나당 구매할 수 있는 개수가 제한되어 있단 말이야.”
“아……!”
“이왕 온 거 살 수 있는 만큼 사 가야지.”
“좋아, 좋아! 역시 내 친구라니까.”
이십 분 정도 더 기다려 가게 안에 들어갔다.
“아드레아노 존부의 디저트 팩토리같은 느낌은 아니네.”
정지숙이 간단하게 평가했다. 마치 동화 속 나라나 디즈니랜드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놓은 그곳과 달리, 여기는 온통 새하얀 색이었다.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과 어울리는 앤티크 식탁은 흰색이었고 의자는 투명했다. 하지만 가게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시선이 가게 되는 것은 오픈 키친이었다.
“기분이 좋아졌어.”
“그렇지? 나도 여기에 오면 신이 나더라고. 꼭 숲 속에라도 들어온 기분이야.”
“……난 여름 바다에 온 것 같아.”
갑자기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정지숙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 또한 오행진의 공능이지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진짜 기분 좋다. 최씨댁이 여기 매일 오는 이유가 있었어.”
“그러게. 기사님이 대신 사오면, 빵은 먹어도 이런 기분은 느낄 수가 없을 테니까.”
“묘하게 자유로움이 느껴지지 않아?”
그녀는 이 상쾌함이 어디서 오는 걸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사람이 여기 쉐프인가 봐.”
대리석 조리대에서 부지런히 빵을 반죽하는 쉐프가 한눈에 보였다. 185cm는 되어 보일 키에 연예인처럼 단정하고 섬세한 이목구비 때문이 아니다. 쉴 새 없이 칼로 반죽을 자르고 있는데 그 동작에 절도가 있어 묘하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함혜정은 넋을 잃고 그 동작을 바라보았다.
“쉐프같지 않게 생겼네. 얼굴을 보고 뽑았나.”
정지숙은 잘생긴 남자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요리를 좀 한 쉐프라면 평범하게 생긴 얼굴에 배가 볼록 나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한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계속 먹다 보면 당연히 살찔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이 맛있는 빵들은 저 쉐프가 요리한 게 맞을까?
조리대 위에서 토막토막 나서 바로 트레이로 옮겨지는 반죽들을 보면, 확실히 저 쉐프가 요리한 것이 맞았다.
◈ ◈ ◈
새로 들어온 여자 손님 두 명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한 명은 정장을, 다른 한 명은 완전히 캐주얼하게 입고 있는데 둘 다 30대 정도로 보였다. 백진영은 경제면에서 자주 얼굴을 보았던 두 여자를 알아보았다. 그가 나지막하게 진혁에게 속삭였다.
“MJ제철 사장 부인하고 QQ화장품 사장 부인 두 분 오셨는데? 진혁이 이틀 만에 목표 달성했네.”
“……그러게.”
진혁은 반죽을 자르는 칼을 차분히 내리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아직 신메뉴는 내놓지도 않았는데 벌써 오면 어떻게 하지.”
“……아니, 지금 중요한 게 그거야?”
백진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저분이 케이크 킬러로 유명해. 엔간한 집 케이크와 빵은 다 먹어 보고 별로라고 하시거든. 이분이 맛있다고 인정하면 그거 믿고 따라오는 사람들 많을 거야.”
임진혁이 고개를 들어, 커피를 내리던 백진영을 바라보았다.
“그건 좀 재미있겠는데. 인정받은 빵 맛 감별사, 이런 건가?”
“비슷하지. 프랑스 유학파 출신이셔서 유학 당시에 빵을 많이 드셔 봤다고 하더라.”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전에 데코레이션 페어 때도 그렇고, 사람들이 프랑스 빵이 맛있다고들 하는데. 나는 우리 아버지 빵이 제일 맛있단 말이지.”
“운정 아저씨 빵 말이지? 나름대로 맛이 있지.”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나라 밀로 만든 빵을 먹는 편이 더 몸에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뭐,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니까.”
진혁이 손님들에게 들리지 않게, 하지만 진영에게는 들리게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꼭 외국 것이 제일 맛있다고 하기는 어렵지.”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빵을 정말로 많이 먹고 다양하게 연구하니까. 역시 빵의 본토랄까…… 클래식 음악 같은 느낌 아니야?”
“흐음.”
진혁이 웃었다.
“저분이 정말로 뛰어난 혀를 가지고 있어서 지음(知音)이 되면 좋겠군.”
“지음?”
춘추시대, 거문고에 뛰어난 백아(伯牙)라는 자가 있었다. 그가 고향 초나라를 방문하며 달을 배경으로 거문고를 연주하였다. 그런데 지나가던 나무꾼이 그 음악 소리를 듣고서 “산의 웅장한 기상을 표현하고 있군요.” 하고 백아가 표현하고자 하던 것을 맞혀내었다. 백아는 다시 한 번 물의 격렬한 흐름을 표현하여 나무꾼을 시험하였으나, 그는 그것도 맞혀내었다.
나무꾼의 이름은 종자기(種子期)였고, 이 자가 나의 음악을 알아준다 하여 백아는 종자기를 지음(知音)이라 불렀다.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 헤어졌으며 다음 해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의 끝은 좋지 않다. 일 년 후 백아가 종자기를 찾아갔으나 그는 이미 죽고 없었다. 백아는 종자기의 묘를 찾아가 그 앞에서 한 곡의 노래를 연주하고 거문고의 현을 뜯어버리고서 부수어버렸다. 지음이 없는 세상에서 더 이상 연주하고 싶지 않다며.
“열자에 나오는 고사야. 물론 나야 지음이 없어도 제빵은 계속할 거지만, 있으면 좋지.”
진혁은 마음 편하게 말했다. 고사에 관해서 설명을 들은 백진영이 물었다.
“그럼 어느 정도 해야 지음인 건데? 난 부족해?”
“형은……. 커피는 최고지만 아직 케이크 안에 있는 이런저런 장치는 모르잖아? 만일 저 여자분이 그걸 다 알아낸다면,”
진혁이 웃었다.
“저분을 케이크에 대해서는 지음이라고 해도 좋겠지.”
◈ ◈ ◈
조리대와 카운터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도 모르고, 정지숙과 함혜정은 오픈 키친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임 쉐프에 대해서 평한 것은 함혜정이었다.
“저 사람 무용을 전공한 것 같아.”
“무용을? 그럴 리가.”
“현대무용에서 말하는 선이라는 게 있거든? 인체의 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드러내는 거. 그런 선이 있어.”
“저 나이에 이런 데서 쉐프를 하고 있는데 언제 무용을 했겠어.”
“이상하다, 진짜 무용을 한 것 같은데. 저렇게 리듬을 타면서 움직일 수가 없어. 뭔가 흥이 있다니깐?”
“빵이나 골라. 사람 많잖아.”
정지숙은 빵을 고르기 시작했다. 처음 두 개를 고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베이컨 파이 하나, 치킨 파이 하나.”
한 사람당 살 수 있는 빵은 다섯 개.
“뺑 오 쇼콜라와 크루아상은 당연히 챙겨야 하고, 그럼 하나밖에 고를 수가 없잖아.”
정지숙이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함혜정을 힐긋 보았다.
‘세 개만 더 사달라고 하면, 바게트하고 밀크 드 미를 살 수 있는데.’
바게트와 밀크 드 미(우유 식빵) 역시 프랑스에서 가장 기본적인 빵이다.
하지만 함혜정은 이쪽을 전혀 쳐다보지 않고 조각 케이크를 고르고 있었다. 밀푀유와 밀크 크레이프, 오페라. 이미 손에는 치킨 파이와 베이컨 파이를 하나씩 들고 있다. 블랙 어니언 타르트도 먹고 싶어서 발을 동동거리며 고민하는 중이다.
‘하여간, 도움이 안 돼!’
처음 오는 빵집에서 제일 먹어야 할 것은 당연히 바게트와 밀크 드 미다.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과 탕수육부터 시키는 것과 똑같다.
“하지만 어제 먹었던 베이컨 파이가 너무 맛있었으니까 치킨 파이는 꼭 먹고 싶고…….”
이럴 줄 알았더라면 기사님도 데려와서 같이 줄을 세우는 건데, 하고 정지숙은 아쉬워했다.
“얘! 이쪽으로 와!”
함혜정이 손짓했다. 가보니 세 종류의 케이크와 두 종류의 타르트가 있고, 치킨 파이와 베이컨 파이는 간 데가 없다.
“어제 파이 맛없었어? 너도 괜찮았다며.”
정지숙의 질문에 함혜정이 씨익 웃었다.
“반씩 먹게 해줄 테니까 네 베이컨 파이 줘 봐. 나도 먹어 보게.”
“윽.”
정지숙은 잠시 갈등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푀유는 보드랍고 말랑말랑하고 푹신푹신해 보였다.
“밀푀유가 프랑스어지?”
“밀푀유(Mille-feuille). 천 겹의 잎새라는 뜻이야.”
정지숙이 면밀하게 밀푀유를 살폈다.
“보통 커스터드 크림과 파이지를 층층이 쌓아서 만드는데, 얘는 특이하게 세로로 쌓아놨네.”
“반씩 자른다?”
라즈베리인지 딸기인지 모를 선명한 붉은색이 대리석처럼 마블링되어 커스터드 크림과 섞여 있는 밀푀유는 보기만 해도 저절로 입에 침이 고일 만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래서 세로로 쌓았나?”
정지숙이 감탄했다. 밀푀유는 깨끗하게 먹기 어려운 음식이다. 칼로 아무리 깨끗하게 가운데를 자른다고 해도 파이지는 찌그러지고 크림이 그 사이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밀푀유는 가운데의 크림을 갈라 양쪽으로 나누기만 하면 된다.
정지숙이 막 밀푀유를 포크에 찍어 입에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밀푀유는 드실 때 크림과 파이지를 한 번에 입에 넣어 드시면 더 맛있습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똑바로 들려왔다. 오픈 키친에서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고 있던 쉐프가 말을 건 것이다.
“오! 고마워요.”
함혜정이 뺨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혜정이 속삭였다.
“엄청 바빠 보이는데 테이블의 손님들도 전부 체크하고 있구나. 젊어 보이는데 실력 있네.”
“요리사의 실력은 맛이지.”
정지숙은 조언을 들은 대로 크림과 파이지 조각 하나를 함께 포크로 찍어 입안에 넣었다.
입천장과 혀에 차가운 단맛이 스르륵 닿고 바로 녹아서 사라졌다. 꿀에 졸인 딸기의 달콤한 맛과 촉촉하고 짙은 커스터드 크림은 부드러우며 겹겹이 겹쳐진 파이지는 얇고 바삭하다.
파이지 안쪽에 감도는 버터는 고급스럽고 향긋하며, 파이지 겉에는 달콤쌉싸름한 캐러멜이 코팅되어 있어 한 번 더 강한 단맛이 입안에 확 퍼진다.
파사삭, 녹아내리는 듯한 파이지와 크림이 침과 함께 섞여 하나가 되며 혀를 자극한다.
“하아…….”
순식간에 다 먹어버리고 나자, 아쉬운 마음에 정지숙이 입술을 핥았다. 지금이라도 하나 더 먹고 싶다.
“커스터드 크림 맛이 조금 특이한데…….”
정지숙이 입술에 남은 크림을 핥아 먹으며 중얼거렸다.
“미각이 대단하십니다. 커스터드 크림이 아니라 시부스트 크림입니다.”
언제 왔는지 옆에 서 있던 쉐프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시부스트?”
순간 너무 놀라 정지숙은 먹고 있던 밀푀유를 그대로 꿀꺽 삼켜 버렸다. 쉐프는 아무렇지 않게 마저 설명했다.
“이탈리안 머랭과 커스터드 크림을 섞어 만든 크림으로, 커스터드보다 약간 가볍고 덜 달죠. 딸기가 단 만큼 덜 달게 해서 조화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보통 이것까지 구분하시는 분은 많지 않은데 대단하시군요.”
“고마…… 워요.”
쉐프는 가볍게 묵례하고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지숙이 너 빵, 빵 노래를 부르더니 진짜 예민하구나. 나는 맛있는 커스터드 크림이라고만 생각했어.”
정지숙은 콧대 높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빵 맛은 좀 안다니까. 빠리에서 살 때 맛있는 빵집은 전부 다 가 봤다고.”
“자, 그럼 다른 것도 먹어 보자!”
두 손님이 만족스럽게 다른 케이크까지 먹었다.
진혁은 테이블 순례를 마치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 마저 반죽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