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80화 (80/656)

제 080화

‘이곳이…… 내가 일 년간 세상에 대한 경험을 쌓을 내 가게.’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다. 아버지의 곁에서 경험을 전수받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매일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행복했다. 하지만 새로운 빵을 개발하면서 진혁은 점점 더 좋은 재료를, 고가의 재료를 쓰기 시작했다.

재료가 담고 있는 기운과 탁기에 민감한 진혁은 되도록 좋지 않은 재료를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기운에 민감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진혁은 좋은 재료를 요리하여 적당한 가격으로 팔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는 점차 부담스러워 하셨다.

“그 정도 가격이라면 소망시에서는 아무도 안 살지도 모른다.”

진혁이 내놓은 프리미엄 라인의 빵들과, 아버지가 내놓는 저렴한 가격의 빵들. 프리미엄 라인의 빵은 아주 맛있지만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보통 매진되는 것들은 아버지가 만든 빵들이었다.

처음에는-그는 자신이 만든 빵이 많이 팔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는 금전적으로 크게 성공하고자 하는 욕심도 없었다. 어차피 가족들이 먹었으면 하는 마음에 만들었던 빵이고, 저녁에 팔리지 않은 빵들은 지역의 노인정과 고아원에 납품되는 것을 알았기에 빵이 버려지는 것도 아니어서 괜찮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이 못내 신경 쓰였던 것이다.

소망시라는 시골구석 환경에서 아들이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썩혀간다고 생각하셨다. 진혁은 비싼 가격으로 프리미엄 빵 일부를 강남에 납품하면서 모든 것이 다 잘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평생 이런 식으로 아버지를 도우며 빵만 만들며 살아도 괜찮다고 믿었지.’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강남에서 이미 인정받은 만큼, 강남으로 진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강경하게 아들을 설득하였고 마침내 진혁이 생각을 바꾸었다.

‘아버지를 위한다고 반드시 같이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에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어.’

그는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사이에 아버지가 다치거나 사고를 당할까 봐 걱정했다. 세상 어디에나 돌부리는 있고 눈먼 자동차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부모님과 진희까지 환골탈태를 마친 이후에도 그는 부모님을 걱정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도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가 되었으니까.’

진혁이 강남까지 오게 된 것은 아버지에게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최고의 재료를 사용해서 제일가는 솜씨로 맛있고 건강에도 좋은 빵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서다.

‘입맛이 까다롭고 빵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몸에도 좋은 빵.’

가격 따위는 알 바 아니다. 그는 가격을 고려하지 않는 좋은 빵을 만들고 싶다.

‘아버지와는 완전 반대지.’

아버지는 적당히 좋은 재료로 저렴하게 빵을 만들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많이 파는 것을 원하셨다. 원하는 것 자체가 달랐기에 진혁과 아버지가 계속해서 같은 곳에서 일한다면 마찰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윽한 커피 향을 즐기며 진혁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여기서, 내가 만든 빵을 세상에 보여주는 거지.”

백진영이 “OPEN” 팻말을 들어 올렸다. 향긋한 빵 냄새가 주변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직원용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김가영입니다! 이제 출근했습니다!”

“오늘부터 일하는 서창덕입니다!”

직원 두 명이 깍듯하게 인사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 잘 해보자고.”

진혁이 살짝 웃었다. 곧 영업 시작이다.

23장

정지숙.

40대의 나이지만 관리를 잘해서 겉으로 봐서는 30대로 보인다. 흔히 말하는 강남 사모님으로, 프랑스의 미대를 졸업한 후 한국에 들어와 부모님이 정해준 결혼을 했다. 사업가인 남편은 성실하고 아이들은 잘 크고 있어 세상 사는 데 아무 불만이 없다. 단 한 가지만 빼면.

“서울에는 진짜 빵을 먹을만한 데가 없어.”

빠리에서 정통 빵을 먹어온 그녀는 한국의 빵 맛이 마음에 안 든다고 계속 불평했다. 정지숙의 가장 친한 친구인 함혜정이 씩 웃었다.

“네가 환장할 만한 빵집을 발견했어.”

“웃기지 마. 저번에 네가 데려간 고구려 호텔 베이커리도 100점은 아니었어. 85점 정도?”

“기집애! 입맛 까다롭기는. 그때는 황 쉐프가 출장 중이었다니깐.”

“어쨌든! 메인 쉐프가 출장 중이든 뭐든 맛은 유지해야지.”

“그거야 그렇지만.”

혜정이 말했다.

“강남역 앞에 있는 오븐회사 빵집 알아? 옛날에 자비유치원 엄마들이 괜찮다고 평하던 곳.”

“얘기는 들어보긴 했는데 가보지는 않았지.”

“열흘 전에 거기가 아예 오픈 키친으로 개조되면서 이름도 바꿨거든? 그때 쉐프가 정식으로 새로 왔는데, 맛이 기가 막힌다는 거야.”

“너는 가 봤어?”

“당연히 가 봤지.”

함혜정이 자신만만하게 종이봉투를 보여주었다. H&J 카페 앤 베이커리라고 쓰여 있다.

“우리 집 기사가 새벽부터 줄 서서 사다 줬어. 요즘에는 자비유치원만이 아니야. 라라 초등학교 학부모들 사이에도 유행하고 있어. 이 함혜정이 너만큼 빵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유행에 뒤처지는 건 아주 싫어하잖니!”

정지숙은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종이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한 번 먹어 볼게. 맛없으면 어떡할래?”

“어머? 어머? 얘 좀 봐.”

함혜정이 코웃음 쳤다.

“맛있으면 내가 전에 얘기했던 전시회에 그림 두 장만 줘 봐.”

정지숙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유화를 전공하였는데, 유화 작업이란 누구나 알다시피 손이 많이 간다. 그림을 두 장 주려면 새 그림을 한 장 작업해야 했다. 최소한 두 달 이상, 작업실에 콕 박혀서 살아야 한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전시회는 귀찮아서 싫다니깐.”

“그냥 달라는 게 아니잖아. 이 빵이 맛있다고 네가 인정하면 달라는 거잖아?”

함혜정이 도로 봉투를 빼앗아 갔다. 달콤하고 향긋한 향기가 빵 봉투 안에서 풍겨 나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밥도 먹지 않았다.

‘어차피 맛없는 보통 빵일 텐데, 뭐.’

배가 고팠던 정지숙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진짜 맛있으면 내가 그림 준다, 줘. 세 장 준다.”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여태까지 함혜정이 맛있다고 가져온 빵들은 전부, 정지숙에게는 한참 함량 미달인 빵이었다.

‘혜정이 얘는 빵 맛을 전혀 모르니까. 이상한 빵들만 맛있다고 가져오고.’

“콜!”

함혜정이 종이봉투에서 제일 먼저 꺼낸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로 얇게 구워진 페이스트리였다.

“뺑 오 쇼콜라를 동그랗게 빚어놓았네? 이건 보통 스퀘어 모양인데, 특이하게 만들어 놨네.”

뺑 오 쇼콜라는 초콜릿 빵이라는 프랑스어다. 프랑스에서 바게트와 함께 가장 흔하게 먹는 일상적인 빵 중의 하나로, 크루아상과 같은 종류의 파이지 반죽을 사용하나 안에 초콜릿을 넣어서 구워낸다는 것이 다르다.

“땡! 이건 치킨 파이입니다.”

정지숙이 이마를 찌푸렸다.

“치킨 파이일 리가 없어. 치킨 파이라는 건 파이지 위에 크림 스튜를 올려놓은 물건이지, 이렇게 빵 안에 뭔가를 넣은 게 아니…… 흠…… 흠흠.”

함혜정이 비닐 안에서 조심스레 치킨 파이를 꺼내자 정지숙이 코를 벌렁거렸다.

“맛은 모르겠지만 향기는 엄청 좋은데?”

“진짜 맛있다니깐?”

함혜정은 마치 정지숙에게 빵을 줄 것처럼 내밀다가 도로 빼앗아 버렸다.

“이건 내가 먹을 테니까 넌 저거 먹어.”

“저건 뭔데?”

“베이컨 파이.”

함혜정이 내민 베이컨 파이에서도 만만치 않게 좋은 냄새가 났다. 자타공인 빵 미식가라고 자부하는 정지숙은 향긋한 빵 냄새에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벌렸다.

“갓 구운 빵일 텐데 비닐에 담겨 여기까지 오는 동안 향이 사라지지 않는다니, 어떻게 이렇게 한 거지?”

의문에 잠겨 혼잣말하는 정지숙에게 함혜정이 말했다.

“넌 닭고기보다 돼지고기를 더 좋아하니까 불만 없지?”

“불만 있어.”

정지숙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입안에 절로 침이 고였다.

“치킨 파이 맛도 궁금해. 반씩 먹자.”

함혜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거는 반씩 먹을 수 있는 빵이 아니야. 네가 나중에 너희 집 기사님한테 부탁하든가 해.”

“왜?”

“안에 뜨거운 숲(Soup)이 들어있대.”

미국 유학파인 혜정이 유창한 영어 발음을 섞어 말했다. 정지숙이 눈썹을 찡그렸다.

“빠네 파스타도 아니고. 수프가 왜 거기에 들어있어?”

빠네(Pane)는 이탈리아어로 빵을 뜻하는 말이며, 동그랗고 단단한 빵 안쪽을 파내고 그 안에 크림 스파게티를 넣어 스파게티와 크림소스, 빵을 한꺼번에 즐기며 먹는 요리를 말한다.

“어레인지한 특별 레시피라고 하더라고.”

함혜정이 싱긋 웃으며 받칠 앞접시를 내주었다. 바삭한 파이지 껍질이 슬며시 벗겨질락 말락 하는 것을 보고서 정지숙이 참지 못하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꿀렁.

입안에서 팟 하고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진한 베이컨 크림 스튜의 맛!

따뜻하고 푹신한 크림 스튜는 부드럽게 입안에서 살살 녹고, 삶은 완두콩과 옥수수 그리고 짭조름하고 단단한 베이컨 조각이 조화롭게 어울린다.

크림 스튜에 적셔진 파이지는 바삭바삭하고 부드러우며, 크림 스튜를 담고 있던 안쪽의 파이 껍질은 찹쌀떡처럼 쫄깃해 씹히는 맛이 다르다. 스튜와 겉껍질, 속껍질 세 종류의 다른 씹힘맛을 즐기며 정지숙은 입안에서 빅벤이 댕, 댕, 댕 울리는 것만 같은 충격을 느꼈다.

“이 맛은…….”

저절로 목구멍 너머로 꿀떡꿀떡 넘어가서, 순식간에 베이컨 파이는 사라져 버렸다. 입안에 남아있는 희미한 크림 스튜의 맛을 되새기려 혀로 입천장을 핥아보지만 이미 그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아…….”

안타까운 신음을 내며 정지숙이 눈을 떴다. 그새 치킨 파이를 다 먹어버린 함혜정과 눈이 마주쳤다.

“기집애, 남기기는 무슨. 한입에 다 먹었구만.”

“그러는 너는!”

도저히 남길 수 없는 맛이었다. 정지숙이 말했다.

“다른 빵은 또 뭐 있어?”

“입가에 흐른 침이나 좀 닦고 말해.”

함혜정의 핀잔에 정지숙이 갖고 다니는 명품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평소 품위 있게 행동하던 정지숙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 선희 예고 시절부터 동기였지만 네가 이러는 건 진짜 처음 본다, 얘. 전시회에 그림 줄 거지?”

십 년 동안 이것저것 빵을 사다 먹여 보았지만 처음으로 성공한 함혜정이 흥분해서 말했다.

“줘야 돼, 네 그림! 세 장! 아까 약속했어!”

아직도 입안에 빵 맛의 여운이 남아있는 정지숙이 심각하게 말했다.

“준다니까, 세 장! 그러니까 이 빵집 어딘지 알려 줘. 내가 종류별로 다 먹어봐야겠어.”

“내일 아예 나랑 같이 가자.”

“기사님한테 줄 서라고 안 하고?”

“아침에 가져와서 오후에 먹는 게 이렇게 맛있는데, 직접 가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겠어?”

“그렇지. 하지만 직접 가서 줄 서는 건 품위가 없어.”

“그건 그래. 체면이 안 서긴 하지.”

정지숙이 말했다.

“그냥 기사님한테 부탁할래. 가긴 뭘 가.”

“그래, 그럼 나도 기사님한테 부탁하지 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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