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79화
“이제 여기입니다.”
“가려둔 이 천은 언제 제거해요?”
“내일 치우고 모레 오픈할 예정입니다.”
백진영이 가게 문을 열쇠로 열었다. 진혁의 아버지는 깔끔한 오픈 키친 조리대부터 바라보았다.
“대단하군! 이건 대리석 조리대잖아. 호텔 오픈 키친 급으로 꾸며놨는데?”
그가 먼저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온갖 최신형 주방기구들이 놓여 있다. 은빛으로 빛나는 새 오븐을 보며 아버지가 감탄하였다. 그는 문 손잡이를 잡아서 열어보았다.
반면 진희는 금빛 자수가 놓인 하얀색 커튼, 투명한 의자와 하얀 대리석 탁자를 보고 감탄했다.
“너무 예쁘다. 우리 가게하고는 수준이 다르네.”
아버지는 돌아다니면서 주방기구를 구경했다. 그러다가 전부터 눈여겨보았던 기계를 발견했다.
“이 파이지 롤러는 얼굴이 비칠 정도네. 번쩍번쩍한 거 봐라.”
이전부터 파이지 롤러 구매를 고민하고 있던 아버지가 실물을 보고 탐나는 듯이 어루만졌다.
“아버지, 전부터 이거 갖고 싶어 하셨죠.”
진혁의 말에 아버지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에는 파이를 그렇게 많이 만들지 않았으니까 괜찮았는데 요즘은 베이컨 파이는 물론이고 치킨 파이도 잘 나가고 하니까, 이제 꼭 필요하지. 우리 파이 메이커 아들도 서울로 올라가 버리고 말이야.”
백진영이 말했다.
“가격 좀 알아봐 드릴까요?”
“당연히 제값 주고 사야지. 그렇지 않아도 살 생각이었어.”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못 사실 겁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진혁이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화물배송이 도착했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지금 배달되었거든요. 제가 어제 주문했어요.”
“뭐 이거를? 그 비싼걸?!”
이미 가격을 알아본 적이 있던 아버지가 기함해서 소리쳤다.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올라오신 사이에 가서 설치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의삼촌이 시간 맞춰준다고 했어요. 그리고 저도 그 정도는 돈 있어요.”
“아니, 그야 있겠지. 그렇지만 너 서울 올라가면서 용돈으로 쓰고, 또 너 돈 모아서 집도 사고 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이마를 짚었다. 한 손을 넓게 펴서 이마와 양 눈을 가리고 한참 동안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진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이 기계 많이 비싼 거예요?”
“최신형은 천만 원 정도 합니다. 제일 저렴한 것도 최소한 육백만 원에서 시작하죠.”
“임진혁! 너 그렇게 돈 많이 썼어?”
진희가 놀라 말했다.
“반띵하자. 누나가 반 낼게.”
“괜찮아.”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전 재산이 이천만 원밖에 안 되면서 흔쾌히 돈을 낸다고 하다니.’
진희가 이제까지 모아둔 돈이 얼마 정도인지 대충 아는 그로서는 진희가 한 말이 얼마나 큰 희생인지 알고 있었다. 진희가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진혁이 차분히 말했다.
“이건 가게에 대한 투자 개념이니까. 난 가게에 지분이 있잖아. 진희 너는 없고.”
“그래도 그렇지. 부모님에게 드리는 거잖아.”
진혁이 진희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코 묻은 돈 따위 받지 않습니다.”
“이게 진짜?!”
“진혁아.”
한참 동안 말 없던 아버지가 진혁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는데 화내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했다.
“……고맙다.”
진희도, 진혁도 조용해졌다. 백진영이 말했다.
“진혁 군이 샀으면 삼촌이 알아서 할인해주셨겠네.”
“직원 할인받았어.”
백진영이 임진혁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너 그거 사려고 이 회사 들어왔구나?”
“어떻게 알았어?”
두 청년이 낄낄 웃었다. 백진영이 웃으며 말했다.
“직원 기념으로 엄청난 걸 샀네. 저희 회사에서 다루는 기계들 자체가 원가 고가의 물건인 데다가, 회사 직원들 명수가 그리 많지 않다 보니 직원 할인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사장님 말고는 제가 처음이라고 하던데.”
아버지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하하! 서울 혼자 올라가서 네 엄마가 엄청 걱정했고, 나도 걱정을 했는데 말이야. 진짜 널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구나. 차라리 나를 걱정해야겠어.”
“예, 저도 아버지와 아버지의 파이들을 걱정해서 내려보낸 겁니다.”
“말은 잘하지!”
아버지가 진혁에게 꿀밤을 먹였다. 엄청나게 살살 때린 꿀밤은 깃털보다 더 가벼웠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큰돈을 쓸 때는, 부모하고 상의를 좀 해주렴.”
아버지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화물기사가 어디 제대로 놓지도 못했겠는데. 아버지가 미리 알고 있었으면 좋았잖니?”
“제가 아까 올라오기 전에 오븐 위치 전부 정리해놓았습니다. 파이지 롤러 어디에 갖다놓으면 될지도 지정해 놔서, 거기 갖다 두었을 거예요. 기계 사용법 알려주러 올 사람은 내일 따로 간다고 하니까, 그때 일봉이랑 어머니도 같이 들으시면 됩니다.”
“허허허, 참.”
아버지가 말했다.
“고맙다.”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뻐하고, 그러면서도 아들이 큰돈을 쓴 것이 불편해 미안해하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제일 짙은 것은 기쁨이었다. 진혁은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 실실 웃었다.
‘아니요, 제가 더 고맙죠.’
파이지 롤러를 선물하려고 했던 것은 원래 진혁의 계획이었지만, 서프라이즈 배달을 하는 것은 백정흠 사장의 아이디어였다. 아들이 다짜고짜 비싼 것을 사준다고 하면 분명히 거절할 것이라며 먼저 배달할 것을 강권했다.
‘백 사장님 말대로 하길 잘했군.’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쓸 데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지금까지 중에 제일 돈을 잘 썼다고 진혁은 생각했다.
‘아버지가 이렇게 좋아하시는 얼굴을 보니까 좋군.’
이제는 여기에서 더 잘할 때다. 그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 ◈ ◈
아버지와 진희, 그리고 백진영을 보내고 집으로 혼자 돌아와 그는 짐을 살폈다.
“옷가지 몇 벌과 요, 그리고 이불.”
몇 가지밖에 없다. 진혁은 단출한 짐에 만족했다. 이불을 장에 개어 넣고 옷을 걸어두고 나니 정리는 바로 끝나버렸다.
“이곳이 이제 나만의 공간이군.”
그는 빠르게 돌아다니며 집 안의 공간을 살폈다. 진혁은 자신만의 공간을 어떻게 꾸밀지 나름대로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잡상인이나 종교인이 방문하지 못하도록 입구에는 환영마라진을 설치하고.”
진혁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곳에 입구가 존재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백진영…… 백정흠. 그리고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들.”
자신이 허용한 몇몇 사람들은 찾아올 수 있도록, 미리 진에 허용된 인물의 머리카락 또는 피를 섞어서 표시를 해 둔다.
“아버지와 어머니, 진희를 허용하고. 백진영…… 머리카락을 흘리고 갔군. 좋아.”
그는 사방의 방위를 밟고 위치를 점검했다. 자신의 핏방울을 몇 군데에 흩뿌리고 진언을 외우는 것으로 진을 설치하는 것이 끝났다. 이제 이곳에 삿된 의도를 가지고 찾아오는 이들은 아예 입구 자체를 찾지 못하고 헤매게 될 것이다.
“좋아.”
진혁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걸 해볼까.”
그는 노트를 꺼내고 책상에 앉았다. 펜을 들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어머니, 오늘 이사를 마쳤습니다. 좋습니다.”
방금 쓴 글을 소리내어 읽어보고서 그는 펜을 멈추고 기지개를 켰다. 그는 쓴 내용을 바라보고서 그대로 찢어 버렸다. 어머니가 편지를 받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쓰기 시작했지만 이건 받는다고 기분 좋아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는 한숨을 쉬고서 다시 새 편지지를 꺼냈다.
“어머니, 이사를 마쳤습니다. 방이 넓습니다. 다음에는 어머니를 초대하겠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진혁은 펜을 든 손을 멈추었다.
‘할 말이 없다니 이것도 사치스럽다.’
옛날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났다. 전에는 정말로 너무 그리워서 미쳐버릴 것 같은 때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읽을 수 없는 한글로 끊임없이 글을 썼다. 진희에게 쓴 적도 있다. 이곳이 얼마나 엿 같은지, 어머니가 얼마나 보고 싶은지,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끝까지 귀환을 포기하지 않았다. 편지를 쓰면서 버틸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이 헛된 망상이나 꿈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글을 쓰면서 어머니의 습관이나 아버지의 외모, 진희와의 싸움 같은 것을 생생하게 되살려 기억해낼 수 있었던 덕분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진짜로 어머니가 읽을 편지를 쓰게 되니 어쩐지 부끄러웠다.
-띠리리리리리리.
그는 편지를 덮고 전화기를 들었다.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 어머니? 네.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아버지는 내려갔고요. 예. 예.”
진혁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가 먼저 연락하지 않아도 어머니가 먼저 연락해온다. 답변이 돌아오지 않는 벽에 대고 수없이 외치는 것이 아니다. 가족들은 진혁을 아끼고 보고 싶어 하며 그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는 그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 ◈ ◈
영업을 시작하는 첫날이다. 진혁은 두 시간 일찍 와서 모든 밑 준비를 끝냈다.
“임진혁! 언제 온 거야?!”
여섯 시가 되어 도착한 백진영은 이미 와 있는 진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조금 전에.”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빵도 이만큼 만들어 놓고, 우와, 오늘 아주 제대로 할 기세야?”
“받는 월급이 얼만데. 당연히 제대로 해야지.”
백진영이 이력서를 내밀었다.
“이건 오늘부터 일할 직원 이력서. 김가영은 알지? 예전에 한 번 봤잖아. 얘는 서창덕.”
“알아서 잘 뽑았겠지.”
“홀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봐서, 되면 적당히 제빵도 가르쳐 줘. 네 빵 맛에 반한 애들이니까.”
“그거야 어렵지 않지.”
진혁이 웃었다. 곧 향긋하고 씁쓸한 커피 향이 가게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백진영이 그라인더로 커피 원두를 갈면서 말했다.
“사실 이렇게 파트너하고 일하는 건 처음이라서 좀 떨렸는데. 믿을만한 베이커리 쉐프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계속했단 말이지. 너하고 같이 하니까 좋다.”
임진혁은 커피 향을 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료에 대한 실력은 확실하니 이런 데서는 믿을만하다. 거기에 튼실한 기업을 경영하는 삼촌을 뒷배로 두고 있어 금전적인 지원도 빵빵하니, 백진영도 나쁜 사업 파트너는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조건이다.
“나도 잘 부탁해.”
백진영은 필터를 올리고 새로 간 원두 가루를 추출한 후, 천천히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가 커피를 맛만 본 다음 쏟아 버리고 새로 원두를 올렸다. 진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백진영이 먼저 설명했다.
“맛없어서 버린 게 아니고. 커피 맛이 매일 달라지기 때문에 매일 아침마다 맛이 변하지 않게 하려면 내리는 물의 양이나 온도, 원두의 양을 조금씩 바꿔야 하거든. 지금 내 롱 블랙 맛이 아니었어. 이번 커피는 괜찮네. 한 잔 맛볼래?”
“조금만.”
“라떼? 아메리카노?”
“아메리카노.”
반죽들은 발효저장고에서 발효되고 있고, 구워질 빵들은 오븐에서 부풀어 오르고 있다. 빌딩들 사이로 해가 뜨면서 어두웠던 하늘이 점차 밝게 물들어간다. 진혁은 이 광경이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