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78화
진혁이 피식 웃었다. 가까워지기 전에는 몰랐는데, 이 백진영이라는 사람도 좀 허당인 데가 있다. 아버지가 주차를 마치고 나서 진희와 아버지가 차에서 내려서 이쪽으로 왔다. 진희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리 아들을 챙겨 줘서 고맙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희를 처음 본 백진영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분은 누구시죠?”
짧게 자른 단발머리에 선명한 이목구비는 진혁과 닮았지만, 작고 동글동글한 얼굴에 순해 보이는 얼굴을 한 진희다. 아름답기보다는 사랑스러워 보이는 분위기로,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었는데 날씬한 허리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진혁이 누나 진희예요.”
진혁이 여태까지 정정하지 않았던 치명적인 오류를 정정했다.
“쌍둥이 여동생입니다. 제가 양보해서 누나 행세하게 두고 있는 거라,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제가 5분 먼저 태어났거든요.”
진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저번에 내가 누나 하기로 했잖아?”
백진영은 미간을 찌푸린 임진희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혁은 그 시선을 눈치챘다.
‘이것 봐라?’
“네가 자칭 누나라고 하는 걸 내가 봐주기로 한 거지.”
하지만 진희는 백진영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진혁에게 검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열심히 말할 뿐이다.
“말로는 5분이지만 사실은 그냥 엄마 뱃속에서 먼저 나왔을 뿐이고, 수정란이 수정된 건 동시에 일어난 일이니까 누가 연상인지는 명확하게…….”
‘진희는 아무 생각이 없군.’
진희가 관심이 없다면 굳이 견제할 필요도 없다.
‘백진영은 나쁘지 않은 인간으로 보이지만 진희의 배필감으로는 한참 부족하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진혁은 장난스럽게 진희에게 반박했다.
“형제 순위라는 게 양보한다고 바뀌는 게 아니잖아.”
오래된 말다툼이 다시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아버지가 제지했다.
“자자, 백진영 군도 바쁠 거고 진혁이도 짐을 내려놔야지. 움직이자고.”
임 씨 남매 두 사람이 조용해지고 아버지가 물었다.
“이쪽으로 올라가면 되는가?”
미리 설명을 들었던 경비원이 정중하게 대응했다. 그가 진혁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말했다.
“아니요, 20층 이상은 이쪽 오피스텔로 올라가십니다.”
21층이 진혁이 살 오피스텔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일행은 진영에게 집에 관해서 설명을 들었다.
“아까 들으신 대로 20층 이상은 엘리베이터가 달라요. 그쪽으로 올라와야 해.”
“엘리베이터도 따로 써요?”
“방은 21평 원룸이에요.”
진희가 감탄했다.
“원룸인데 넓은 편이네요? 제가 사는 병원 기숙사 방이 6평인데 두 명이 같이 쓰거든요. 임진혁, 출세했다?”
진희가 진혁의 등을 팡팡 쳤다. 진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 등짝 후려치기를 맞아주고 있었다. 물론 호신강기를 타이밍 맞춰 해제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그건 아무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백진영이 진혁의 등짝이 부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주 잠시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옮겼다.
“예, 저도 그 맞은편 방을 같이 쓰고 있습니다. 건물 관리도 겸하고 있어서요.”
“그럼 진혁이는 월세를 얼마나 내나요? 강남 월세는 백만 원, 심하면 백오십 만 원도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넓으면 더 비싸지 않아요?”
진희가 묻자 백진영이 긴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저희 삼촌, 아니 사장님께서 월세는 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원래 제가 살게 해드리려고 했는데, 삼촌이 생명의 은인에게 이 정도는 해드려야 한다고 하면서…….”
백진영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재력을 보여주었으나 진희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관심 있는 것은 진혁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 살 곳이 어떤 환경인가였다.
“직장에서 가깝다고는 들었어요. 사장님이 잘 챙겨주시니 다행이네요. 저희 애가 너무 부족해서…….”
“엄마도 안 할 소릴 왜 진희 네가 하니?”
듣고 있던 아버지가 웃으며 물었다.
“진혁이 따로 독립하니까 걱정돼서 그렇죠. 애가 어린데.”
“너랑 동갑이잖아!”
“정신 연령은 제가 한참 많거든요.”
티격태격하는데 백진영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남매가 있다는 건 좋군요.”
진희가 무어라 반격하려는데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일행이 모두 내렸다. 맞은편에 보이는 문 두 개를 보여주며 백진영이 안내했다.
“이 집이 진혁이 쓸 집이고 저쪽이 제집입니다.”
백진영이 카드키와 함께 비밀번호 설정 방법이 적힌 팸플릿을 진혁에게 건넸다.
“이거 받고. 비밀번호는 알아서 설정해. 16자리 이상으로 특수문자 섞어서.”
진혁이 카드키로 문을 열자 넓고 깨끗한 방 안이 보였다.
“와아!”
“진짜 넓네. 진혁이 방이랑 내 방을 다 욱여넣어도 들어가겠다.”
“지금 네 방보다 낫다.”
진혁이 쓰게 될 방은 탁 트여서 넓어 보였다. 전체적으로 직사각형 형태의 원룸 안에는 드레스룸으로 쓸 수 있는 다용도실이 하나, 그리고 오른쪽에는 화장실과 빌트인 옷장, 왼쪽에는 미니 주방과 세탁기가 있다. 전부 단순한 흰색과 연한 하늘색이라 촌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 정말로 독립하는군.’
진혁은 성큼성큼 걸어가 투명한 유리창 아래로 비치는 서울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이미 밤이 되었으나 휘황찬란한 노랗고 붉고 파란 네온사인 간판들이 있어 세상은 어둡지 않았다. 검은 비단 위에 보석을 뿌린 것처럼 빛난다.
이삿짐을 챙길 때는 별생각이 없었으나 막상 가족과 떨어져 이제 여기서 혼자서 산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다.
“네 공간은 처음이라 떨리지?”
진희가 다가와 옆에 섰다. 그녀가 함께 아래쪽의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야경 진짜 이쁘다.”
진혁은 진희의 말을 정정해주지 않았다.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는 백 칸의 방이 있는 교주전에도 머물러 보았다.
“수도세나 전기세 어떻게 내는지 미리 확인해서 연체되지 않도록 하고. 밥 굶지 말고 매일매일 제대로 챙겨 먹고.”
그녀가 하는 당부 하나하나를 새겨들으며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잘할 거야.”
“외로우면 언제라도 연락하고.”
진혁은 그 말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빙긋 웃었다.
‘외로우면 바로 보러 가면 되지.’
한반도, 그것도 남쪽은 대단히 좁다. 천마군림보를 이용해서 움직이면 남쪽 끝까지 가도 한 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다. 그것은 진혁이 독립하기를 결심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가까우니까 금방 갈 수 있어.’
아버지가 두 사람을 불렀다.
“여기, 가구 사용법도 들어 둬야지.”
“네-.”
“예.”
막상 진혁은 그냥 서 있는데 진희가 신이 나서 옷장도 열어보고 세탁기도 열어보며 즐겁게 콧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하나하나 구경하고 나서 백진영에게 물었다.
“여기 빌트인 가구들 전부 새것이네요. 사람이 쓰지 않던 방인가 봐요?”
“예, 여기는 원래 저희 가족이 쓸 생각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비워두고 사람을 안 받은 거예요. 이번에 진혁 씨가 살게 됐으니까 저도 외롭지 않고 좋죠.”
“기본적인 건 다 있다고 들었으니까 짐이 적은 거야. 옷가지 몇 벌만 가져오면 되겠더라고.”
진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희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옷 좀 정리해 주고 갈게.”
그녀가 진혁의 캐리어에 손을 가져갔다.
“아니, 옷은 내가 정리한다.”
진혁이 막아섰다. 진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옷이라고 말하는 게 설마, 2002년 월드컵 티셔츠 말이야? 구닥다리가 되다 못해 아프리카로 기증될 것 같은 그 빨간 티셔츠들?”
“뭐 어때.”
“어떻긴 뭐가 어때! 난 네가 그 옷 입고 강남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건 참을 수가 없다.”
진희가 양손을 비볐다. 그녀가 눈을 번득였다.
“오늘 짐 놓고, 누나랑 같이 옷 쇼핑 가자.”
“아니, 필요 없다니까.”
진혁이 점잖게 거절했다.
“입을 만한 옷은 다 있어. 그리고 이 시간에 연 옷가게가 어디에 있어?”
백진영이 나섰다.
“근처에 24시간 옷가게가 있긴 합니다만.”
임진혁이 눈치 없는 백진영을 노려보았다. 백진영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진짜요? 그런 가게가 있어요? 야, 진짜 서울이다! 옷 몇 벌만 사주고 갈게. 왜 사준다는데도 싫다고 그래?”
백진영은 급하게 스마트폰을 들어 뭔가를 검색하더니, 미안해하며 말했다.
“그 가게가 오늘은 휴일이네요.”
아버지가 안심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진혁과 아버지가 눈빛을 교환했다.
“자, 자. 그럼 우리는 이제 돌아가자.”
진희가 아쉬워하며 아버지에게 팔짱을 끼었다.
“아빠, 조금만 더 있다 가요. 여기까지 온 김에 진혁이 옷 좀 사주고 가자니까요.”
아버지가 진혁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진혁은 실수로 전음을 보낼 뻔했다.
‘아버지, 제발 이 쇼핑 지옥에서 저를 구제해 주시옵소서.’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호의에서 옷을 사주려고 하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쓸데없는 곳에 가서 뜬금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싫었다. 오늘은 할 일이 있다. 아버지가 진희를 달랬다.
“진혁이도 이제 독립해서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됐는데, 스스로 정리하게 놔두자꾸나. 옷은 알아서 사겠지.”
아버지가 진중하게 말했다.
“진혁이가 옷을 못 입는 건 나도 알지만, 출근해서는 쉐프복을 입을 테니까 괜찮지 않겠니.”
“아버지!”
진혁이 항의했다.
“제가 그렇게까지 옷을 못 입지는 않습니다.”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래. 2002년 월드컵 티셔츠를 입어도 잘 어울리지.”
“그건 저번에 한 번 입었잖아요.”
“엄마가 사 왔을 때부터 다 잘라서 걸레로 만들어버렸어야 했어.”
진희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중얼거렸다.
“네가 제정신으로 그걸 다시 입고 돌아다니면 난 나를 용서할 수가 없을 거야.”
아버지는 남매가 티격태격하는 것을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백진영이 용기를 내어 끼어들었다.
“진혁 군이 일할 가게는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두 분 다 소망시에서 여기까지 올라오셨는데, 그냥 내려가시기 전에 가게 구경도 하시고,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
진희가 아버지를 바라보았고, 아버지가 대답했다.
“진희 너는 시간 괜찮냐?”
진회도 고개를 끄덕였다. 캐리어만 올려놓은 채 네 사람은 다시 내려갔다. 진혁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어제 봤고 내일도 보러 갈 건데.”
“우리는 본 적이 없잖아, 임진혁!”
다시 티격태격하는 남매 사이에 백진영이 끼어들었다.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으니까, 걸어가시면 됩니다. 진혁이에게는 첫 출근길인 셈인데, 가는 길을 알려드릴 테니까 같이 가자.”
가게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거리. 소망시에서는 보기 어려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인다. 겨울이 다가오는지, 호떡을 파는 아주머니와 군고구마 장수도 있다. 진희가 감탄하며 말했다.
“강남은 다르긴 다르다.”
진혁이 물었다.
“뭐가 다른데?”
“여자들 굽 높이가 달라. 다들 기본적으로 8cm 힐은 신고 다니네.”
진희가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다들 깔끔하고 예쁘다. 간호사 기숙사에서 병원만 왔다 갔다 하는 나하고는 완전 다르네.”
곧 <리모델링 중>이라는 천막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보였다. 백진영이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