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75화 (75/656)

제 075화

“반씩 드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시식을 많이 해서 필요 없습니다.”

“와, 방금 뭐야? 마술 쇼?”

“어떻게 케이크를 바스러지지 않게 이렇게 두 개로 자르죠? 쉐프들은 원래 이런 것도 할 수 있습니까?”

승주와 진영이 감탄하며 물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쉐프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야 우습다. 반씩 잘린 케이크를 앞에 두고서 이승주가 편안하게 자리에 앉았다.

‘진짜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먹으라고 잘라주기까지 했는데 먹지 않으면 이상한 상황이다. 그는 원래 단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해서 이런 것은 잘 먹지 않았다.

‘예의상 조금만 먹어야지.’

이승주는 제일 덜 달아 보이는 밀푀유로 포크를 옮겼다. 그가 입안에 케이크를 한입 물었다. 상큼하고 부드러운 크림이 파삭거리는 파이지와 함께 입안에 녹아내렸다.

“?!”

이승주는 눈을 감았다. 스위스에서 유학하던 방갈로가, 그곳에서 머물던 겨울밤이 떠오른다. 첫사랑은 빵을 구울 때마다 그에게 가져다주었는데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를 위해서 바삭바삭하게 구운 식사용 빵에 버터를 듬뿍 발라 주었다. 지금 이 밀푀유에서는 그때 그, 첫사랑의 맛이 났다. 달지만 지나치게 달지 않고 사랑스럽고 아련하다. 희미한 바닐라 향이 살짝 났다가 바로 사라진다.

“이건…… 이건 뭡니까?”

이승주가 눈가를 실룩였다.

“밀푀유입니다.”

진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이승주는 그 사람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밀푀유인 건 저도 압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이런 맛이…….”

“그냥 보통 밀푀유입니다.”

옆에서 케이크를 맛보고 있던 제자, 백진영이 거들었다.

“이번에도 너무 맛있습니다. 진혁 씨. 이 밀푀유를 시그니처 디저트로 삼아도 좋겠습니다.”

진혁이 웃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다른 것들도 맛보고 나서 결정해 보시죠.”

백진영은 조금 전에 입안에서 사라진 밀푀유의 촉감을 입안에서 느끼며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

‘캐러멜과 바닐라를 썼나.’

생크림은 다른 데서는 맛보지 못했던 독특한 맛이 났다. 백진영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스승님이 옆에서 충격에 빠져 있건 말건 상관없이 단호하게 포크를 내밀었다. 그는 두 번째로 맛볼 케이크로 몽블랑을 골랐다.

‘오페라는 맛이 진하니까 제일 마지막으로.’

소담하게 눈 쌓인 산봉우리 모양을 한 미니 밤 케이크는 절반이 잘려 가운데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마치 지진 때문에 드러난 땅의 속살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층은 총 네 개였다. 하지만 진영이 예상했던 대로 네모난 층이 아니었다.

“이거, 스퀘어가 아니라 롤이네요?”

“그렇죠. 층층이 쌓여 있으면 재미없잖아요.”

진영은 말을 삼켰다. 케이크 안에 층층이 크림과 시트를 쌓는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이 케이크를 만드는 제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적인 동그란 몽블랑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시트와 크림들이 층층이 돌돌 말려 있어, 완벽한 롤이다. 진혁이 얼마나 이러한 소소한 기술에 숙련되어 있는지 누구나 알 수 있다.

“네 가지 크림을 동시에 드시길 바라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진혁이 보충 설명을 했다. 진영은 안쪽의 크림층을 눈여겨 살폈다.

“맨 위에 있는 갈색은 밤 크림이고, 하얀 층은 생크림일 테고. 이 아래에 보통 밤 크림 층과 생크림 층이 한 번 더 있을 텐데, 또 다른 갈색과 노란색 층이 있고……? 이건 뭡니까?”

진혁이 입술 끝을 살짝 올리며 웃었다.

“직접 맛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백진영은 작은 티스푼으로 케이크를 담아 입안으로 가져갔다.

“……이건.”

그랬다. 과연 맛보면 알 수 있는 맛이다. 갈색 밤 크림은 밤이었으며 흰색은 생크림이었다. 그리고 노란색은 아주 낯익지만 몽블랑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맛이었다.

“고구마……!”

달콤하고 진한 고구마는 호박 고구마처럼 촉촉했지만 밤고구마처럼 달았다. 그리고 은은한 밤의 단맛과 아주 잘 어울렸다.

“이런 몽블랑은 처음 먹어봅니다.”

백진영은 순식간에 몽블랑을 먹어치우고 입맛을 다시며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에 먹은 밀푀유의 맛도 대단했지만, 이 몽블랑 역시 견줄 수 없는 맛이다.

“베니하루카라는 품종입니다. 숙성되기 전후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숙성된 베니하루카의 고요한 단맛과 숙성 전의 촉촉한 맛을 살리려고 절반을 섞었죠. 밤 크림의 재료로 쓴 밤은 녹색 농부 조합에서 협찬을 받은 유기농 밤을 사용해서 만들었습니다.”

진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몽블랑을 이미 다 먹어버린 이승주는 눈을 감고 여운을 즐겼다. 그는 케이크를 즐기지 않았지만 이것은 이미 케이크가 아니라 케이크의 범주를 넘어선 그 무엇이었다.

“진영이가 대단하시다, 대단하시다 했는데 이번에 알았습니다. 진정한 요리사는 좋아하지 않는 음식도 먹게 하는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마실 수 있는 커피를 만드는 걸 목표로 했죠.”

이승주가 말했다.

“저는 달콤한 케이크나 캔디, 과자 같은 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정말로 맛있네요. 단 걸 싫어하는 제가 이렇게 케이크를 즐길 수 있게 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백진영이 희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이승주 선생님. 오페라는 너무 달아서 선생님 입맛에 안 맞을 겁니다.”

“임 쉐프님이 만드신 거니까 먹어봐야지.”

“…….”

백진영은 아이처럼 시무룩한 티는 내지 않았다. 그는 어른스럽게 오페라 케이크를 조각내어 입안에 넣었다.

쌉싸름한 맛이 감싼 오묘한 단맛은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채로 미뢰를 감쌌다. 혀 위에서 맛의 폭죽이 터졌다. 짙은 커피, 달콤씁쓸한 초콜릿, 농익은 버터크림이 함께 조화를 이루며 바삭거리는 비스킷과 함께 입안을 희롱했다.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아 진영은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참으로 놀랄 만한 맛이었다. 진영은 이 케이크와 함께 팔릴 아메리카노를 상상했고 즉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 어떤 손님이라도 이 케이크를 먹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오페라는 진영이 내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딱 어울리는 맛이었다. 그가 내린 검은 커피와 이 새까만 케이크는 비단 색깔뿐만 아니라 맛에서도 수나사와 암나사가 맞물려 들어가듯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것이다. 벌써 머릿속에서 이 케이크와 아메리카노를 묶어서 판매할 메뉴판 디자인까지 마친 백진영이 임진혁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저번에 제가 내려드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맛보시고 이 케이크를 만드셨군요.”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쇼핑백을 꺼냈다.

“그건 이건데요.”

“예?”

“가을 한정 홍시 단호박 타르트입니다. 강화 장군감이라고, 강화에서 오백 년 넘게 이어 내려온 토종 감을 농약 없이 재배해서 이 계절에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감으로 만들었죠. 땡감을 직접 받아서 저희 가게에서 직접 숙성합니다. 그래서 계절 한정 메뉴로, 감나무가 열매를 맺는 가을에만 판매할 수 있습니다. ”

“……!”

“감잎을 갈아서 밀가루에 넣어 건강에도 좋습니다.”

“와, 이건. 진짜…….”

작고 몽글몽글하고 예쁜 홍시 단호박 타르트는 손바닥만 한 크기로 모두 8개가 있었다.

“백정흠 사장님 것까지 넉넉하게 만들었으니 가족분들이 함께 나누어 드시죠.”

조금 전까지 케이크를 맛보았던 이승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음료를 더 드시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아직 커피를 다 마시지 않은 진혁이 물었다.

“아직 다 마시지 않았는데요.”

“이렇게 예술적인 케이크를 만드신 분께 제가 커피를 내려드리고 싶습니다.”

“흠…… 그럼.”

진혁이 메뉴판을 보고 말했다.

“아인슈페너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저희 가게에서도 앞으로 내갈 음료라, 이번에 맛을 보면 어울릴만한 케이크 개발에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워낙 시골이라 이런 커피 종류가 다양하게 없어요.”

이승주가 커피를 내리러 간 동안 진혁은 쇼핑백에서 다른 빵을 꺼냈다.

“전에 맛보여주셨던 더치 커피에 어울리는 카스텔라입니다.”

“예?”

백진영은 너무 놀라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파인애플 카스텔라와 초콜릿 카스텔라입니다.”

“예에?”

“트리플 치즈 케이크를 개량한 고구마 치즈 케이크입니다. 이건 잘 익은 베니하루까 고구마를 썼죠.”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신메뉴들의 총집합에 백진영은 너무 놀라 고함치듯 말했다.

“지금 이걸 일주일 동안에 전부 새로 만드신 겁니까?”

“그렇죠.”

줄줄이 늘어선 쁘띠 케이크와 빵, 미니 카스텔라를 보고서 백진영이 말을 잃었다. 진혁은 하나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커피와 어울리는 케이크를 찾기 위해서 인근 커피 전문점에 들러서 추천받은 메뉴들을 하나씩 만들어 봤습니다. 다른 계절이 오면 제철 과일을 사용해서 그때그때 다른 메뉴를 만들려고 생각 중입니다. 이번 계절은 가을이라 홍시를 사용해서 홍시 단호박 타르트를 만들었지만, 복숭아 타르트와 블루베리 타르트도 나쁘지 않더라고요.”

돌아온 이승주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신메뉴를 개발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는지 알았다. 대회 메뉴를 위해서 언제나 아이디어를 적을 메모 패드를 가지고 다니며, 무언가 생각날 때마다 적고 퇴근하면 만들어 본다. 하지만 그런 메뉴가 이렇게 성공적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걸 일주일 동안에 개발하셨다고요?”

하얗고 풍성한 크림이 올라온 아인슈페너 잔을 받고서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주가 탄복하며 말했다. 신메뉴라는 것은 ‘자! 이제부터 신메뉴를 개발하자.’라고 해서 뚝딱뚝딱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이 아인슈페너를 개발하기 위해서 한 삼 년은 걸린 것 같은데, 대단하십니다.”

“각자 자신의 속도가 있으니까요. 케이크는 맛이 좀 어떻습니까?”

“쉐프님이 만드신 건 뭐든지 나쁘지 않죠.”

“엄청나게 맛있습니다. 뭐가 제일 맛있다고 해야 좋을지 모를 정돕니다.”

두 사람이 즉시 대답했다.

“샘플로 홍시 타르트와 단호박 타르트도 가져왔는데, 제 미각에는 홍시 단호박 타르트가 제일 나았습니다.”

“쉐프님 미각을 믿겠습니다.”

백진영이 열의를 불태우며 말했다.

“그런데 이거, 제가 하나씩 시식해야만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이거, 어떤 음료와 함께 내놓으면 좋을지 알려면 제가 꼭 먹어봐야 하거든요. 당장 이 케이크가 너무 먹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어차피 언젠가는 먹어봐야 할 거 아닙니까?”

진영이 입맛을 다시며 횡설수설하는데 이승주도 조심스레 물었다.

“저도 새 음료 개발에 단초가 될 영감이 떠오릅니다만……. 혹시 조금씩만 같이 먹어봐도 되겠습니까?”

진혁이 피식 웃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기뻐하며 먹어 주는 사람을 보는 것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그것은 그가 이곳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 중의 하나였다.

“네. 드십시오. 그러라고 가져온 거니까요.”

‘커피와 어울리는 메뉴라고 받아들였나 보군.’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두 남자는 어린아이처럼 허겁지겁 케이크에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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