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74화
중학생 김도을.
작은 키에 빡빡 깎은 머리에 등은 구부정하게 숙였다. 얼굴에는 주근깨가 가득하다. 진혁이 가게로 온 다음부터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가게에 출근하듯 방문한다. 즐겨 먹는 것은 치킨 파이와 치즈 케이크지만 신메뉴가 나타나면 한 번은 꼭 먹어본다. 요즘에는 일봉과 친해져 농담도 주고받는다.
“계절 한정 홍시 단호박 타르트 주세요.”
“왜 이번에는 치킨 파이랑 치즈 케이크 안 먹고?”
일봉이 물었다. 도을이 바로 대답했다.
“저희 엄마가 단호박을 좋아하세요.”
“매일 2개씩 사 가는 게, 네가 2개 먹는 게 아니었어?”
“저는 치즈 케이크를 먹고 엄마가 치킨 파이를 좋아하세요.”
“치킨 파이가 맛있긴 하지. 넌 치킨 파이는 먹고 싶지는 않고?”
“당연히 먹고 싶은데. 세 개를 살 순 없으니까요.”
일봉은 왜 세 개를 살 수 없는지는 묻지 않았다. 당연히 돈이 없기 때문이다. 금천복이 가게에 있는 빵들을 서른 개, 쉰 개씩 싹 쓸어갈 때마다 도을이는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자, 이거랑 이거.”
“감사합니다.”
-딸그랑!
이전 마라톤 대회 이후로 단골이 된 시청 여직원이 들어와 점심시간에 먹을 빵을 사 갔다. 앞집 편의점 주인도 와서 빵을 사 가면서 가볍게 불평처럼 칭찬했다.
“여기서 빵을 먹은 이후로는 다른 데서 못 먹겠다니까요.”
“저도 그래요, 저도.”
“총각, 또 우유 사러 안 오나?”
“다음에 사러 갈게요!”
오늘 작은 사장인 진혁은 서울에 올라갔고 큰 사장인 운정은 실습 감독을 하러 나갔다. 대신 사모님 겸 사장님인 진혁의 어머니-장은효가 와 있다. 장은효가 웃으며 말했다.
“일봉이 일 잘하네. 아주 싹싹하고.”
눈앞에서 칭찬을 들으니 민망하다. 일봉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장님,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브레이크 타임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오븐 예열하고 반죽 집어넣으려구요.”
“일봉 학생, 180도, 240도, 195도. 5분 전에 예열 다 했어요.”
장은효가 부드럽게 웃었다. 일봉이 쩔쩔매며 말했다.
“제가 이야기하는 동안에 하신 거예요?”
“어제 얘기해 주었잖아요. 수첩에 다 적어뒀지. 오후에 잘 팔리는 빵 세 종류 먼저 굽는다고.”
“그걸 한번 듣고 바로바로 하신다니 대단하세요.”
“요즘 기억이 잘 나더라고. 이전에는 깜빡깜빡했는데, 희한하게 생각이 잘 나요.”
“저보다 더 기억력이 좋으신 것 같아요. 그리고 말 편하게 하세요! 사장님도 말씀 편하게 하시는데요.”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할까?”
“예!”
‘다행이다.’
형식적으로 일봉에게 일을 배우고 있지만 큰 사장님의 아내고 작은 사장님의 어머니다. 일봉은 사실 사모님이 일을 못 하실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이 가족은 셋 다 일을 잘해…….’
압도적으로 뛰어난 건 진혁 형이지만, 진혁 형의 부모님 역시 손이 느린 편은 아니다.
‘우리 집은 가족 모두가 신중하고 느릿느릿하게 일하는 편인데, 이 집 식구들은 묘하게 손이 빠르고 기억력도 좋고. 체력도 좋단 말이지.’
일봉은 반죽을 떼어내어 판에 나란히 늘어놓으며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이 느려서 나도 느린가?”
혼잣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자 장은효가 물었다.
“부모님이 느리셔?”
“아, 아닙니다!”
일봉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희 어머님이 요즘 이것저것 깜빡깜빡하시거든요. 저도 그렇고.”
“저번에 뵈니 일봉이 어머님도 내 또래던데. 내 친구들도 다 그래.”
“부모님이 머리가 좋으시니까 사장님 같은 아들을 낳으셨나 봐요.”
진심이 느껴지는 그 말에 장은효가 기분 좋게 웃었다.
“어머, 얘가! 호호호호!”
그녀는 반죽이 사이좋게 늘어서 있는 트레이를 그대로 들어 올리려 했다.
“으앗, 사모님! 제가 할게요!”
“괜찮아, 가벼운데?”
트레이를 오븐 안에 밀어 넣으며 장은효는 땀 한 방울 흘리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무게가 있는 금속제 트레이 위에 반죽까지 서른 개씩 얹으면 성인 남자가 들기에도 무겁다. 그 광경을 본 일봉이 눈을 껌뻑였다.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힘도 좋으신데요?. 형이 아까 달걀 서른 판을 가볍게 들고 들어온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이 힘을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한테 물려받으신 거였군요.”
“비밀 하나 알려줄까?”
장은효가 속삭였다.
“너 아직 군대 안 갔다 왔지? 갔다 오면 그렇게 되는 것 같더라.”
“……예?”
“우리 아들 녀석이 원래 착하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성실히 하면서 부모님을 챙기는 애는 아니었어. 그런데 군대에 갔다 오고 나서 갑자기 엄청 진지해졌지 뭐야.”
일봉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 친구들은 안 그러던데요…….”
“그러게. 개인차가 있나 봐. 다녀온 부대에 따라서 다른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진짜 형처럼 빵을 구울 수 있으면, 형 다녀온 부대에 지원해서 가고 싶네요.”
기본적인 빵은 어느 정도 구울 수 있지만. 새로운 빵을 창작하는 아이디어는 진혁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래? 빵을 굽는 부대나 취사병은 확실히 아니었는데, 무슨 부대였더라.”
“다음에 직접 물어봐야겠어요.”
21장
“이곳은 달커피라고, 제가 바리스타 교육을 받은 커피 전문점입니다.”
백진영이 안내한 곳은 방배동에 있는 깔끔한 커피숍이었다. 밝은 유리창으로 전면으로 트여있어 넓어 보이나 실내는 넓지 않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눈앞에서 더치 커피를 내리고 있는 바리스타와, 그 옆에 서 있는 거대한 커피 내리는 기계들이었다. 진한 커피 향이 가게 안에 감돌았다.
내부에는 오래된 통나무 벤치처럼 생긴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거대한 목조 원형 테이블이 있다. ‘외부 음식 환영!’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어 진혁은 흘긋 메뉴를 확인했는데, 디저트 없이 음료만 팔고 있었다.
“여기에서 제일 유명한 건 아인슈페너와 롱블랙입니다. 카페라떼와 시나몬 카페모카도 팬이 많습니다. 음료는 여러 종류가 있으니 하나씩 드셔 보세요.”
“일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셔 보겠습니다.”
“그게 제일 좋죠.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부터 시키는 것하고 비슷하죠?”
백진영은 카운터에 가서 인사를 하고, 대화를 몇 마디 나누었다. 커피 두 잔을 가지고 돌아온 그가 자리에 앉았다.
“메뉴는 어떻게, 좀 생각해 보셨습니까.”
진혁은 새로운 메뉴의 스케치를 보여 주지 않았다. 실물을 바로 꺼냈다.
“롱블랙과 어울리는 홍시 단호박 타르트입니다. 가을 한정 메뉴죠.”
진혁은 백진영에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몇 가지 추천 메뉴를 스케치해서 받을 줄 알았던 백진영이 당황해서 케이크를 받았다.
“남자한테서 케이크를 받는 건 처음인데요?”
“여태까지 매일 빵을 받고 계셨잖습니까.”
하지만 케이크는 하나가 아니었다. 진혁은 쇼핑백 안에서 작은 상자들을 계속해서 꺼냈다.
“밀푀유, 오페라, 몽블랑입니다.”
밀푀유는 보통 각진 모양이 많지만 진혁이 만든 것은 비스킷과 크림이 둥글어,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느낌이 났다.
동글동글한 바닐라 크림이 사이사이에 있고, 얇은 파이지가 엄마손파이 과자처럼 얇게 겹쳐진 노랗고 흰 밀푀유.
얇디얇은 초콜릿 커피 케이크 시트 사이사이에 진한 갈색 커피 버터크림과 새까만 초콜릿 크림이 꼼꼼히 발려있는 오페라. 맨 위의 초콜릿 판에는 식용 금박이 절묘하게 뿌려져 있다.
생크림과 밀크초콜릿이 섞인 가나슈 위에, 직접 만든 밤 페이스트를 올린 몽블랑. 하얀 산(몽블랑)이라는 이름처럼 하얀 슈가 파우더가 뾰족한 밤크림 위에 곱게 뿌려져 있어 마치 산에 눈이 내린 모양과도 같다. 셋 다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운, 공들여 만든 케이크다. 호텔 베이커리에서나 볼 수 있을 만한 완성도의 아름다운 케이크를 보고서 백진영은 깜짝 놀랐다.
“전부터 밀푀유와 오페라, 몽블랑을 개발하고 계셨습니까?”
백진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이전부터 호텔 베이커리를 다니며 케이크를 맛보아왔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의 밀푀유, 오페라와 몽블랑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완벽한 구형의 바닐라 크림 밀푀유의 자태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맛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크흠. 흠.”
그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풍겨 나오는 이 달콤한 향기는 천상의 맛을 약속한다. 이미 진혁이 만든 케이크와 빵을 여러 가지 먹어본 그는 케이크들을 보며 맛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저절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백진영이 조심스럽게 포크를 집어 드는데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번에 말씀하셔서 그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백진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대단하십니다.”
“저번에 맛보여주신 커피가.”
진혁이 케이크를 가리켰다.
“요즘 아침에는 꽤 쌀쌀하니까,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함께 몽블랑을 먹으면 좋겠죠.”
“그렇군요. 제가 맛보아도 되겠습니까?”
백진영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조급하게 물어보았다. 밀푀유와 오페라, 몽블랑 중 무엇부터 먹어야 할까? 아주 잠깐 동안 망설이는 백진영에게 진혁이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셋 중에서는 제일 맛이 약한 밀푀유부터 드시는 것이 나으실 겁니다.”
백진영은 밀푀유로 포크를 가져갔다. 지금 당장 이 노오랗고 부드러운, 크림이 올라간 비스킷처럼 바삭바삭하게 생긴 동그란 케이크를 입안으로 가져가고 싶다. 그가 막 포크 위에 노오란 크림을 올리려는 순간 카운터에 있던 바리스타 이승주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진혁이 가볍게 묵례했다. 백진영이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멈추고, 포크를 내려놓고 나서 소개했다.
“이분은 저를 가르쳐주신 스승님이십니다. 아시안 바리스타 컵에서 우승하시기도 한 뛰어난 바리스타이십니다. 이 선생님, 여기 임진혁 씨는 뛰어난 페이스트리 쉐프입니다. 저희 삼촌도 인정하셔서 이번에 고액 연봉으로 스카우트해오셨죠.”
백진영은 말하면서 계속 두 사람이 아니라 케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래 그다지 음식을 탐하지 않는 제자가 당장에라도 케이크를 먹고 싶어 하는 모습이 너무나 뻔히 보여 이승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케이크가 맛있어 보이는데, 어디서 사오신 겁니까? 이 근방에서는 못 보던 것들인데요.”
“제가 만들어 온 겁니다.”
“오-! 설마 진영이가 계속 얘기하던 ‘그’ 임 쉐프님이십니까?”
“예, 이분이 그 임 쉐프님이 맞습니다.”
진영이 대신 대답하자 중년의 바리스타가 온화하게 웃었다.
“이 녀석이 엄청나게 칭찬하시더라고요. 대단한 빵을 만드신다고 들었습니다. 빵으로는 저의 커피에 지지 않을 정도라고 하더라구요.”
그가 눈을 빛냈다.
“이 케이크들, 저도 같이 맛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괜찮습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케이크에 포크를 대지 못한 진영의 얼굴이 아주 살짝 일그러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 표정도 눈치챈 이승주가 빙긋 웃었다.
“얘가 정말 이렇게 먹을 걸 탐내는 애가 아닌데 말이죠. 어디 보자. 내가 오페라를 먹을까?”
“선생님은 단 거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백진영이 물었다. 이승주가 킥킥 웃었다.
“야, 너야말로 단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왜 이래?”
진영은 회갑연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오히려 여기에 있는 것이 더 편해 보였다. 친구처럼 장난치는 모습을 보며 진혁은 플라스틱 나이프를 들어 올렸다.
-샥.
칼이 지나간 줄도 몰랐다. 그의 손이 지나가자 세 개의 케이크 모두, 완벽하게 절반으로 나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