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73화
평화 일봉 농장.
진혁의 빵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이렇게 들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봉의 아버지가 나와서 허리를 숙였다.
“방목 닭에 대해서 잘 아신다면서요”
“옛날에야 다 풀어 키웠으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만 마리씩 하지는 않았수다.”
감 노인이 마주 서서 꾸벅 꾸벅 인사를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자며 저녁 일을 마무리하고 바로 이쪽으로 온 것이다. 소개 조로 진혁의 아버지도 따라왔고, 진혁도 같이 왔다.
‘어디에 뭐가 있을지 몰라.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아버지가 다치기라도 하면…….’
이제 몇 주 있으면 직장 자체가 서울로 바뀐다. 하지만 진혁은 예전, 아버지가 다친 이후에 집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잊지 않았다. 아버지가 빵집으로 가는 길과 출근하는 학교 길은 모두 깔끔하게 잘 다져 놓았다. 예기치 않은 곳에 존재하는 돌부리나 턱, 울퉁불퉁하고 위험하게 팬 곳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아버지가 좀처럼 다니지 않는 길로 올 때는 같이 오는 편이 낫다.
대한민국의 땅 전부를 다듬어 놓을 수는 없지만, 아버지 가는 길 정도는 다져 놓을 수 있다.
‘이전보다는 조금 튼튼해지셨지만.’
아무리 환골탈태를 했다고는 해도 진혁의 눈에 아버지는 나이 든 현대인 남자로, 연약하고 섬세한 존재로만 보였다. 언제 어디서 발목이라도 삐끗하거나 차에 치이거나 무너지는 건물에 깔릴지 모른다.
‘이번에 평화 일봉 농장에 가는 길도 깨끗하게 청소해두었으니 혼자 오셔도 안심이지.’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난폭운전하는 차처럼 미리 치워놓을 수 없는 장애물이 있을까봐 걱정일 뿐이다.
높은 곳에 올라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농장 안으로 들어가자 수탉이 울면서 따라왔다.
-꼬오오끼오오오오!
낯선 사람들이 오자 경고하는 뜻에서 우는 것이리라. 안쪽에는 암탉과 병아리들이 줄을 지어 돌아다니며 흙 위를 쪼고 있었다. 운 좋게 벌레를 잡아먹는 놈도 보였다. 일봉의 아버지는 일행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건물 앞, 작은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그 안에서 병아리들이 삐약거리며 돌아다닌다. 병아리들의 노오란 깃털은 회색이 섞여 도톰한 겨울옷처럼 보였다.
“부화장이 아주 잘 되어 있구만.”
흡족하게 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이 물었다.
“어떤 점을 보고 아시는 건가요?”
“저기 봐, 육추상자가 되어 있잖아. 첫 먹이도 현미와 댓잎이고.”
“육추상자요?”
아버지가 묻자, 일봉이 대답했다.
“다른 데는 히터나 온풍기를 쓰는데 저희는 안 쓰거든요. 아예 처음부터 바깥에서 자라면, 자기들끼리 모여서 저 상자 안에서 자라요.”
“강하게 키우는 거군.”
“예, 그래야 깃털이 촘촘하게 자라서 강추위가 와도 잘 견뎌요.”
“먹이도?”
“곱게 갈아서 빻은 사료만 먹고 자란 병아리는 장이 약해서 탈이 잘 나요.”
“인간하고 똑같네.”
정파의 후예로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이들과, 산속에 내몰아져 생존법부터 배워야 했던 이들은 그 독기부터 다르다. 일월신교의 훈련생들 생각을 하며 진혁은 조그마하고 노란 병아리들을 바라보았다. 작은 병아리들은 서로 몸을 꼬옥 붙여 체온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렇네요.”
“산란율이 점점 더 떨어지고 있는데, 닭들이 털갈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봉의 아버지가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걱정이 많으시겠소.”
“예,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 닭을 오래 치셨다고요?”
“삼십 년 정도, 잠깐 했지요.”
“대단하십니다. 예전에는 더 환경이 열악했을 텐데요.”
“그렇지. 요즘 세상에 비하면 예전에는…….”
한참 동안 닭장과 풀어 키우는 산을 둘러보았으나 성과는 없었다. 감 노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최근에 뭔가 바뀐 건 없소? 닭들은 아주 작은 스트레스에도 알을 안 낳을 수 있는데. 근처에 고양이가 나타났다든지, 기온이 바뀌었다든지.”
“그걸 모르겠습니다. 후우.”
일봉의 아버지가 깊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감 노인이 미안해했다.
“도움이 되지 않아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산란장을 관리하는 방법에 대한 팁은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진혁의 아버지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나도 돕고 싶은데 아는 게 없어서…….”
“여기까지 와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지. 진혁이도 와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진혁은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에 오행진을 설치하면 닭들에게도 효과가 있을까?’
일봉이 진혁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같이 와 주셔서 고마워요, 형.”
“아니야, 나도 한 번쯤은 농장에 와 보고 싶었어.”
진혁은 닭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닭 중 일부가 비실비실하고 털이 빠져 있는 것은 볼 수 있었다. 그는 저녁에 다시 와 볼 마음을 굳히고 위치를 확인했다.
‘전체에 오행진을 두를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산란장과 육추상자를 중심으로 작은 오행진을 두 개 만들어 보지. 오행진을 친 쪽과 치지 않은 쪽에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 관찰해보면 되겠어.’
진혁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오는 달걀과 닭고기의 질이 좋아지면, 가게에도 유익한 일이니까.’
◈ ◈ ◈
일주일 후.
일봉의 아버지가 달걀과 닭고기 배달을 왔다.
“저번에 다녀가 주신 다음 날부터, 놀라보게 닭들이 생기가 생겼습니다. 산란율도 꽤 늘었고요.”
일봉의 아버지가, 진혁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환하게 밝아진 표정이었다.
“진짜 와서 뭐 해주신 거 아닙니까? 부적을 쓰셨다든지.”
“부적이요? 닭이 알 많이 낳는 부적? 그런 것도 있나?”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우연히 그런 거겠죠. 스트레스 요인이 있었는데 해결이 됐나 보네요. 다행입니다.”
서른 판의 달걀을 가볍게 옮기며 진혁이 말했다.
“잘됐네요.”
방문 직후, 산란장에 설치한 오행진이 잘 작동하는 듯싶다. 일봉이 씩 웃으며 말했다.
“형은 운을 빨아들이는 피뢰침 같아요.”
“음?”
“왜, 능력이 좋아도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모의고사에서 점수 잘 나오다가 실제로 수능 보면 맹장염이 온다든가. 그런데 형은 그런 게 없달까?”
“운을 빨아들이면 주변이 다 무너지는 거 아니냐? 운을 뿜어내는 뭔가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거야?”
“그러네요. 운을 뿜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형님.”
일봉이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항상 쓸만한 달걀 고맙다.”
일봉은 자신의 아버지를 배웅하러 나갔다.
“저 아버지께 인사드리고 올 테니까 그냥 두세요!”
하지만 진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방금 도착한 30kg 밀가루 포대까지 한꺼번에 옮겨 버렸다. 이쯤이야 새끼손가락으로 들 수 있는 무게다. 인사하고 들어오자마자 바로 평소 보관하는 곳에 달걀과 밀가루가 가지런히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일봉이 당황했다.
“제가 나르면 되는데, 사장 형! 또 이렇게 혼자 다 일을 해 버리시면 어떡합니까.”
“걱정하지 마라. 다음 달부터는 네가 하게 될 테니까.”
일봉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내일부터는 새 직원이 출근한다는 거 아닙니까. 드디어 저에게도 후배가 생긴다고요.”
“뭐 하던 애래?”
“큰 사장님이 작은 사장님도 아실 거라던데요?”
그러고 보니 식사 자리에서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같은 동네에서 오래 살던 누군가에 관해서 이야기하셨는데, 애초에 너무나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이 희미했다.
“듣긴 들었는데 기억이 안 나.”
“내일 와 봐야 알겠네요.”
오행기가 축적된 달걀로 카스텔라를 만들자, 오행기의 양이 아주 조금 더 늘어났다. 진혁은 스틱 카스텔라를 한 입 맛보았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야.’
내공이 충만한 진혁에게는 가벼운 간식거리 같은 느낌이지만 일반인에게는 진기가 북돋워지는 새로운 맛일 것이다. 보통 빵이라면 미각과 후각을 자극하지만 이 빵은 그와 함께 전신의 혈기를 자극한다. 수험생이라면 집중이 잘 될 것이고
“이거 먹어보고 평 좀 얘기해 주세요.”
“그냥 바닐라 스틱 카스텔라네?”
“갓 구운 건데 바로 먹어도 되나요?”
“응, 그냥 먹어봐.”
일봉이 눈을 감았다.
“입안에서 번개가 치는 것 같은 맛이에요.”
“그렇게 별로냐?”
“아니, 맛있다고요.”
아버지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전보다 맛이 변했는데? 뭔가 더 넣었어?”
“아니요, 이번에 평화 일봉 농장에서 가져온 달걀을 썼어요.”
일봉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희 달걀 신선하죠! 요즘 더 맛있어졌어요.”
“그래. 아주 좋아.”
“앞으로도 자주 이용해 주십시오.”
일봉이 꾸벅 숙이면서 인사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역시 오행진은 식재료 자체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어.’
어머니가 앞치마를 두르며 물었다.
“그러게, 이렇게 신선한 달걀은 오랜만에 봐. 노른자 색깔도 노란색이 아니라 밝은 주황색이고, 흰자와 투명한 부분 구분도 잘 되어 있고. 위로 톡 솟은 모양이, 오늘 아침에 낳은 걸 바로바로 가지고 오는 건가 본데?”
“맞아요. 여기 가져오는 거니까 아버지가 제일 좋은 거로 가져다주신다고 하셨어요.”
“고맙다고 전해드려라.”
어머니가 웃자 일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감사하죠.”
진혁은 벽의 시계를 보았다.
“새로 오는 아르바이트생은 언제 오죠?”
“내일부터 시작하기로 했어. 내일은 그 진영 씨를 만나서 케이크 시연을 한다고?”
“그렇지 않아도 통화했습니다. 초콜릿 카스텔라와 파인애플 카스텔라, 치즈 케이크. 그리고 홍시 단호박 타르트를 가져가려고 했는데,”
진혁이 말했다.
“좀 더 정통적인 디저트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밀푀유와 오페라를 연습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 아예 디저트 카페 쪽으로 하려고 한다냐?”
“전에 형이 만드신 바움쿠헨도 좋았는데, 아예 나라별 대표 디저트를 하나씩 해 보는 건 어때요? 독일의 바움쿠헨, 일본식 카스텔라에 영국의 정어리 파이라든가.”
“영국식 음식은 이미 치킨 파이가 있긴 한데, 가게 컨셉하고는 어울리지 않아.”
“식사용 빵이죠. 그리고 밀크 크레이프도 가져가려고요.”
“그것도 맛있었죠.”
일봉이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 어머니는 요즘 밀크 크레이프를 대단히 좋아하세요. 이번 주말에도 한 판 주문 부탁드립니다.”
“재료비 따로 안 받을 테니 네가 직접 만들어 가.”
“어?! 그래도 됩니까?!”
일봉이 기뻐했다. 아버지가 웃었다.
“일봉이 크레이프 만드는 실력도 많이 좋아졌더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