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71화
“응? 보양식이라기보다, 여기서 만든 카스텔라를 많이 먹었다니까.”
진혁은 막 봉투에 담으려던 스틱 카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얇은 비닐로 덮은 카스텔라를 하나 살짝 쥐고, 그 안에 흐르는 기운을 느꼈다.
감 노인이 가진 기운 중 천만분의 일 정도 되는, 아주 희미한 오행기가 느껴졌다.
“여기 있습니다.”
감 노인이 지갑을 내밀려는데 금천복이 잽싸게 카드를 내밀었다.
“이 빵 정도는 내가 살 수 있게 해주라우.”
“……알았소.”
감 노인이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이 가게를 떠나려 하는데 주방에서 아버지가 나왔다.
“선생님!”
아버지가 반갑게 외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두 분 보기 좋으십니다.”
“허허허.”
감 노인이 머쓱하게 웃었다. 금천복 할매가 넉살 좋게 받아쳤다.
“쪼글쪼글한 노인네 둘이 잘 있는 게 뭐가 보기 좋아!”
“금 씨 어르신께서도 표정이 확-펴지셨는데요.”
아버지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농담을 했다.
“국수는 언제 먹여주실 겁니까?”
“에끼, 이 사람이 무슨!”
아까 돈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감 노인이 비로소 얼굴을 펴며 웃었다.
“당장은 아니지, 할 준비가 많고말고.”
“우리 나이에 준비만 계속하다가 나 숨 넘어가겠수.”
금천복이 불퉁스럽게 대답했다.
“허허!”
감 노인이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두 노인은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갔다.
“결혼식 때 웨딩 케이크를 만들어 드리겠다고 약속했는데 말입니다.”
진혁이 닫힌 문을 보며 말했다. 그는 조금 전 발견한 카스텔라 때문에 심기가 복잡했다.
‘이건 내가 오행진을 설치하고 나서 아버지가 만든 케이크.’
오행진이 이렇게까지 공능이 좋을 줄은 몰랐다.
‘아버지가 만든 빵 반죽이 내가 만든 빵만큼 맛을 따라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설치해놓은 진인데.’
쇠약해진 노인에게 이렇게 기운을 북돋워 주는 효과가 생길 줄은 몰랐다.
‘현대는 기가 풍부하지 못하니까, 보통 사람이 정명한 자연의 기운을 얻으면 이렇게 적은 양으로도 효과가 나는 건가…….’
만년설삼은 아니더라도 백년 삼 정도의 효과는 있어 보였다. 진혁은 운동선수용 스틱 카스텔라를 바라보았다. 건강한 사람이 먹는다면 기분이 좋을 것이고, 맹렬하게 운동 중인 선수가 먹는다면 중간에 기운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를테면 아주 효과 좋은 100년짜리 산삼 정도인가?’
산삼은 ‘토’의 기운이 강하여 체질이 수기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기질에 따라서 몸에 해가 될 수도 있다. 복용 시 간에 부담이 가서 오히려 몸에 해로운 경우가 있다. 그러니 화수목금토 다섯 가지 기운이 조화를 이룬 이 카스텔라는 산삼보다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진혁은 눈을 깜빡거렸다.
‘엄청난 걸 만들어버렸는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진혁은 이제까지 부모님이 드시기에도 부끄럽지 않은, 건강에 좋은 빵을 만들려는 시도를 계속해 왔다. 평화 일봉 농장에서 풀어 키우는 닭의 건강한 고기와 신선한 계란. 충남 아산의 김금관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생산하는 우리 땅 토종 밀 종자인 우리꼬맹이밀. 민병철의 녹색 농부 조합과 함께하면서, 질 좋은 농산물을 직접 거래할 수 있게 되어 좀 더 손쉬워졌다.
‘치즈도 직접 만든 생 치즈를 받아다가 쓰기 시작했지.’
그밖에 녹색 농부 조합에서 소개받은 이들은 적지 않다. 산지에서 직접 아카시아꿀을 생산하는 양봉 농가의 유봉인, 이번에는 농약을 쓰지 않고 고구마를 키운다는 사람을 소개받기로 했다. 진혁은 이 카스텔라를 만들기 위해 썼던 재료들을 떠올렸다.
‘특별한 재료들을 썼지.’
자유롭게 풀어 키운 닭이 낳은 달걀의 흰자와 노른자.
갯벌 흙에 바닷물을 통과시키고 10시간 동안 가마솥에서 끓여 추출한 자염.
물엿 대신 사용한. 직접 숙성시킨 꿀 자몽 청.
정제 흰설탕이 아닌 비정제 사탕수수 설탕.
올리브유.
방목 농장의 소에게서 짠 우유로 만든 유기농 버터.
우리꼬맹이밀 농장에서 재배한 햇밀로 갈아 만든 박력분.
‘언제부터인가 재료가…… 아주 휘황찬란해졌군.’
어머니가 드셔도 좋을 만한 좋은 재료를 쓰면서 음식 가격들은 조금씩 올랐다. 설탕이나 박력분같이 적당히 싼 것을 쓰던 재료부터 바꾸었다. 당뇨가 있는 사람이나 노인도 먹을 수 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다행히도 한 번 빵 맛을 본 사람들은 가격이 올라도 계속 사 갔다. 오히려 이제야 제값을 주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어머니는 괜찮아지셨지만 먹는 것은 여전히 조심하셔야 해.’
좋지 않은 음식을 계속해 먹으면서 농약과 항생제, 환경호르몬 성분이 농축되는 것이 지속된다면, 아무리 환골탈태를 했더라도 20년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진혁은 그 미래의 위험도 모두 제거하고 싶었다.
‘20년은 눈 깜빡하면 지나가는 세월이야. 금방 온다.’
그가 자연에서 나온 좋은 재료들을 썼기에 오행기가 쉽게 머무른 것이 분명하다. 진혁은 수수께끼가 풀리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오행진을 펼친 그 안에서는 풀들도 생기있게 잘 자랐지.’
지금 생각해 보면 동물을 길러도 좋았을 것이다. 물론 소교주의 연공 공간에서 돼지를 치거나 할 수는 없다.
‘일원신교의 일반 신도들이 기르는 돼지 농장에 오행진을 쳐주었다면 살기가 좋아졌을 텐데.’
가축화가 덜 된 돼지들은 덩치가 작아 자라는 것이 늦었고 운동량이 많아 살찌는 일이 적었다. 이미 다 지난 일이다. 진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다시 스케치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발주 내역서를 훑어보며 물었다.
“가을 한정 메뉴로 홍시로 뭘 만든다며? 여기 주문 내역에 홍시는 없는데.”
“홍시는 아니고, 단감을 받기로 했어요.”
“직접 숙성시키려고?”
“예.”
아버지가 궁금해했다.
“손이 더 많이 갈 텐데,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느냐?”
“기존에 판매하는 홍시를 몇 점 받아서 먹어봤는데, 전부 인공적으로 숙성시킨 홍시더라고요. 에틸렌을 발생시켜서 후숙한다고 하던데.”
“그렇지. 그래야 다 같은 시기에 숙성이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홍시가 각각 따로따로 익는다는 단점이 있더라도 저는 자연적으로 숙성을 시켜서 해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그게 더 맛있을 것 같고.”
“녀석, 또 손 엄청 많이 가는 일을 시작하는구나. 괜히 힘들지 않겠어?”
“이미 열흘 전에 받아서 숙성시키고 있는 감들이 있어요. 냉장고 위의 종이박스에 두었습니다.”
“그것들이 뭔가 했더니 감이었구나.”
아버지가 까치발을 하더니 냉장고 위에서 감을 꺼냈다.
“어디 보자, 이건 보기 좋게 익었네.”
“사과를 같이 넣어두면 사흘이면 숙성이 된다고 합니다.”
원래 감을 숙성시키려고 보관할 때에는 종이 상자에 넣어두면 곰팡이가 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펼쳐두어야 한다. 하지만 이곳 안에는 진혁이 설치해둔 오행진이 있어 그럴 리가 없었다.
아버지가 홍시를 하나 입에 물었다. 떫은맛 없이 다디단 맛이 확, 입안에 퍼졌다. 작고 단단하며 단맛이 풍부하다.
“좋긴 좋구나. 이게 강화 장군감이라고?”
“예. 조선 시대부터 유전자가 보존되어 온, 강화도 지역의 토종 감입니다. 저도 이번에 녹색 농부 조합을 통해서 받았어요. ”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녹색 농부 조합을 통해서 소개받았다는 것은, 화학 비료와 제초제를 쓰지 않고 직접 사람을 써서 풀을 깎고 퇴비를 비료로 쓰는 유기농 농사법을 사용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옆의 정리를 다 마친 일봉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 감 이제 다 익었어요?”
“그렇지.”
“그런데 감이 전부 다 익은 게 아니고, 어떤 건 익었고 어떤 건 안 익었네요.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않나.”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량 필요할 때에는 아예 백여 개 단위로 숙성시킨 다음에, 숙성한 걸 얼려 놓을 거야. 그게 더 보관하기 쉽거든.”
“아.”
오행진의 공능이 담겨 숙성된 홍시 역시 극미량의 오행기를 품고 있다.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더 맛이 있을 것이다. 진혁은 미리 해둔 파이지 반죽을 펴기 시작했다.
“말씀하신 신메뉴 만드나요?”
언제 봐도 놀라운 손놀림에, 일봉이 시선을 빼앗겼다. 굵고 단단한 손바닥이 파도를 타는 프로 서퍼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며 반죽을 얇게 뽑아낸다.
파이지를 만들 때는 밀가루의 글루텐을 활성화하면 안 된다. 나중에 다 구워지면서 얇아야 할 파이지가 부풀어 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을 사용해야 하며, 속도가 빨라야 한다.
이번에는 빠뜨 브리제에 설탕을 넣은 빠뜨 브리제 수크르를 하므로, 버터와 밀가루만이 아니라 설탕도 섞는다.
밀가루의 색깔을 보고 일봉이 물었다.
“밀가루가 흰색이 아닌데요? 뭘 섞은 거예요?”
“그건 나중에 먹어보면 알 거야.”
탁탁 치며 파이지를 만들고 나서 충분히 익은 강화장군감 홍시 껍질을 벗겼다. 껍질을 벗긴 홍시는 체에 밭쳐 거르고 씨를 분리한다.
“이 품종은 씨앗이 원래 이렇게 별로 없어요?”
“보통 우리가 먹는 씨앗 큰 감이 개량종이야. 이건 원래 감 자체가 작고 맛이 단 데다가 씨앗이 작다는 특징이 있지.”
“이게 다 제가 병철이 형을 소개해 줘서 그렇군요.”
일봉이 드물게 잘난 척을 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래, 잘했다.”
“사장 형! 그럴 땐 그런 거 없어도 난 맛있는 거 잘만 만든다고 얘기하실 타이밍이라고요. 너무 겸손하시다니까.”
“…….”
일봉은 진혁을 정말로 친하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요즘 들어 이런저런 농담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럴 때마다 그는 조금씩 기뻤다. 그를 편하게 대해오는 사람이 없었던 백수십 년간은 너무 길었다.
“이 찐 단호박도 같이 쓰실 거예요?”
노오란 단호박에서도 은은하게 단내가 난다. 무공의 고수만이 맡을 수 있는 희미한 향이 아니라, 진하고 선명한 향기다. 일봉이 코를 킁킁거렸다.
“진짜 냄새 좋다.”
“이제 가을이니까. 홍시도 단호박도 가을이랑 딱 어울리지. 10월에 오픈하는 가게하고도 맞아. 쌉싸름한 커피하고도 조화를 이루기 좋고.”
“와……진짜 일타쌍피네요. 모든 걸 다 생각하는 남자야.”
일봉이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서 보고 있던 아버지가 말했다.
“일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 사와라.”
“예! 큰 사장님!”
아버지가 준 지폐를 쥐고 일봉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 마시는 이 앞 편의점 커피를 말한다. 진혁이 빙긋 웃었다.
“홍시 단호박 타르트하고 같이 드시려구요?”
“네가 블랙커피와 같이 먹으려고 개발하고 있는 타르트라고 하니, 함께 먹어보는 것도 좋겠지.”
진혁이 웃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