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70화
다음날 경찰 조사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남부서 유장준 경장입니다. 이번 사고에 대해서 몇 가지 묻겠습니다.”
자기소개를 한 형사는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바로 돌아갔다. 정말로 형식적인 조사였다. 두 사람이 뒤돌아 나가고 나서 진혁이 중얼거렸다.
“별거 아니네요.”
진혁은 실제로 경찰 조사를 겪고 약간 실망했다.
“녀석아, 그럼 당연히 별거 아니지!”
어머니가 진혁의 등을 두들겼다.
“네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피해자니까.”
“이번에는 사상자가 없어도 건물이 워낙 크게 무너져서 조사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경찰을 배웅하고 돌아온 아버지가 이야기했다.
“너는 아무 신경 쓸 것 없다고 하더라.”
“네.”
진혁이 말했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던 어머니가 문득 생각난 듯 말을 걸었다.
“오늘 아침에 와서 반죽을 도와줬다는 친구가, 전에 그 친구니?”
“예? 전에 그 친구가 누군데요?”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어머니가 손뼉을 쳤다.
“전에 고양이 진호를 잃어버렸다고 하니까, 진혁이 네 친구라고 나타났던 애가 있었어. 동네에서 못 보던 앤데.”
진혁은 애써 모른 척했다.
“음, 어머니가 누구 얘기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고양이 찾아 달라고 여기저기에 부탁했어서.”
“직접 고양이를 찾아준 애는 한 명일 텐데?”
그때 고양이를 찾아준 것은 골격을 변용해 얼굴과 목소리를 바꾼 진혁 자신이다. 어머니에게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진혁이 말을 돌렸다.
“그보다 어머니, 제가 강남에 올라갈 때를 대비해서 고용하려던 아르바이트생 말인데요. 역시 세 명, 가능하면 네 명은 있어야 되겠어요.”
아버지가 물었다.
“그린 워터 쪽으로 가는 빵은 네가 아예 가져갈 줄 알았는데?”
“아니요, 그건 여태까지처럼 아버지가 만드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건 네가 병철이랑 한 계약이잖니?”
아버지가 완고하게 말했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농장에서 받아오는 채소, 서울에서 받으면 별로 신선하지 않아요.”
“그것도 그렇겠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게 의논하려던 것이 있다.”
아버지가 말했다.
“너의 어머니와는 이야기를 마쳤는데, 가게를 확장하려고 한다. 동네에서 먹을 빵을 파는 것과 온라인에서 판매할 빵을 만드는 곳을 아예 분리하려고 해.”
“예전 스위트 바게트 자리를 인수하시는군요.”
“알고 있었냐?”
“그 가게에 있는 설비나, 이런 것들을 싸게 인수할 수 있다면 좋겠죠.”
“권리금 없이 인테리어까지 같이 넘겨준단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관할 수 있는 장소도 늘어나고, 그쪽에서 따로 영업하면 되니까 동선이 겹치지도 않겠네요.”
“그래.”
“부모님 뜻대로 하세요. 저는 이제 강남에서 잘 살겠습니다.”
“그래도 네 의견도 들어야지!”
아버지가 파하하 웃었다.
“네 말대로 해서 잘되지 않은 게 없으니 말이다.”
‘고맙습니다.’
진혁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믿어주셔서.’
“가게까지 늘리면 정말로 직원을 따로 고용해야겠네요. 거기에 하나, 원래 가게에 하나. 그럼 그쪽 책임은 어머니가 하시는 건가요?”
“그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만한 사람을 계속 찾고 있단다.”
“실습생은 어디까지나 왔다가 갈 사람이니까, 꾸준히 일해 줄 사람이 좋지. 오래 일하면 정직원으로 승급할 수도 있고.”
“그리고 일봉이 녀석은 본인이 원하면 정직원으로 등록해도 좋겠습니다. 성실하기도 하고, 오래 가게를 맡길 수 있겠어요.”
“그래, 그거는 내가 한 번 물어보마.”
그리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럼 우리는 오늘 먼저 내려가마.”
“예.”
진혁이 말했다.
“저는 오늘 백진영 씨와 만나서 의논하기로 한 것이 있어서, 그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 ◈ ◈
백진영은 그를 집으로 초청했다.
“누구를 데려오는 건 처음이라 어색하군요.”
“저도 누군가의 집에 가는 건 처음입니다.”
“커피 머신과 그라인더가 준비된 곳이 따로 없어서…….”
백진영이 어색해하며 말했다.
“임진혁 씨가 빵을 주시기 전에, 제 카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사실 커피 덕분입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커피 원두를 꺼냈다. 당일마다 받아온다는 신선한 원두 향이 확 풍겼다. 곱게 갈린 원두 가루를 프렌치 프레스 방식으로 천천히 추출한다. 그윽한 향기를 맡으며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향이 좋군요.”
“예, 지금 이건 가장 기본적인 아메리카노입니다만…….”
백진영이 커피에 대해서 천천히 설명했다.
“핸드드립 커피를 주로 하고, 저렴한 가격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았죠. 롱블랙과 아인슈페너를 기반으로 메뉴가 다양하지는 않은 편입니다. 전부 디카페인을 제공하고요.”
백진영이 눈을 빛냈다.
“이번에 아예 오픈키친이 있는 베이커리 카페로 변경하기로 하자고 한 것은 제 아이디어입니다만, 진혁 씨도 찬성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천천히 포트메리온 커피잔에 커피를 따랐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덕분에 큰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시죠.”
“이번에 달콤한 디저트 종류와, 브런치가 가능한 빵 위주로 메뉴를 개편했으면 합니다.”
“……!”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와 어울리는 빵을 말하는 거군요.”
“예, 기존에 인기가 있었던 헌드레드 초콜릿 쿠키나 치킨 파이 등은 한정적인 시간에만 제공하고, 달달한 케이크나 담백한 치즈케이크 등을 좀 더 작은 사이즈로 서빙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백진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오픈에 어울리는 임진혁 쉐프의 시그니처 메뉴를 개발해서 알려주신다면,”
그가 내민 커피의 향을 맡아보며 진혁은 눈을 감았다. 확실히 잘 내린 커피지만, 단팥빵이나 소보루빵과 어울리느냐 생각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제가 그 빵과 어울리는 음료를 개발하겠습니다.”
백진영이 장담했다.
“이래 봬도 국제 바리스타 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습니다. 신메뉴 개발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너무 많은 것을 부탁드리는 것 같습니다만…….”
“아닙니다. 이제 한 배를 탄 사이인걸요.”
진혁이 싱긋 웃으며 방금 받은 커피 잔을 들어 올려 보였다.
“지금 이게 백진영 씨의 시그니처 커피인 셈이죠?”
“예? 아, 그,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백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 맛에 어울리는 시그니처 메뉴를 개발해 보죠.”
“……!”
백진영이 눈을 크게 떴다. 진혁이 살짝 웃어 보였다.
“다음 주에 한 번, 소망시로 오시죠.”
◈ ◈ ◈
강남에 갈 메뉴를 개발할 겸 모처럼 진혁이 가게에 나와 있던 날,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이제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마흔 살이 된 것처럼 좋지. 아주 좋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꺽다리 감 노인은 혈색이 창백했다. 옆에 서 있던 금천복 할매가 아무렇지도 않게 부축했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듯 체중을 지탱해주는 것을 흘끔 눈여겨보며 진혁은 생각했다.
‘좋을 때다.’
늦지 않게 서로 가까워져서 정말로, 다행이다. 감 노인이 천천히 말했다.
“이 늙은이가 요즘 기운이 없어서 말이지.”
금천복 할매가 톡 끼어들었다.
“이 늙은이라니.”
“그럼 저 늙은이요?”
“이 늙은이가 맞소. 허허.”
아직도 쌩쌩하고 건강한 금천복 할매와는 달리, 감 노인은 본래 기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얼마 전에 했던 마라톤 때 무리를 한 탓도 있는지 몸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 카스텔라를 좀 많이 사 가려고 왔어.”
금천복 할매가 용건을 말했다.
“이 사람이 입맛이 까탈스러워져 토하는 일이 많은데, 그 카스텔라는 잘도 먹더라고.”
“허허. 별일 아니요.”
“별일이 아니긴! 병원을 가자고 해도 거절하고.”
감 노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국민연금에 의존하고 있는 처지에, 병원에라도 가게 되면 큰일 난다. 당장 다음 달 월세를 낼 돈이 없을지도 모른다.
“병원비 정도는 내가 낸다니까.”
“정말 괜찮소.”
감 노인이 이야기하며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치 빠른 금천복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진혁이 손을 내밀어 자연스럽게 감 노인의 손목을 스쳤다.
‘확실히 진기가 많이 상했군.’
청년이라면 하루 정도 힘들게 달려도 이삼일 푹 쉬고 보양식을 먹으면 회복된다. 하지만 감 노인은 이제 70대, 결코 어리지 않은 나이다.
‘이전에 체력이 좋지 않던 아버지보다 훨씬 심해. 진원진기를 끌어다 쓴 무림인처럼 보일 정도야.’
진원진기란 선천진기라고도 하는 기로 내공과는 성질이 다르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으며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가지고 있는 기운이다. 진혁은 노인의 손목을 짚어보고 이상한 것을 느꼈다.
“……?”
‘이 노인이 오행심법을 따로 배웠을 리가 없는데.’
겉으로는 이전보다 더 쇠약해 보이지만, 속은 오히려 전보다 낫다. 오행기의 기운이 아주 미미하게 남아있어 위장을 비롯한 전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이상하군.’
“잠깐 여기 앉아 계시지요.”
“가게가 바쁜데 무슨,”
“서 있다가 넘어지면 다른 사람한테 더 피해야! 좀 앉아 있으쇼.”
금천복 할매와 진혁의 부축을 받아, 감 노인은 의자에 앉았다. 계속 미안한 기색을 하고서 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는데 오히려 또 신세를 지게 됐구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항상 고맙네, 진혁 군.”
진혁은 이 노인에게 추궁과혈을 해준 적이 없었다. 매일같이 찾아와 다량의 매상을 올려주는 금천복과 달리, 감 노인은 생일 케이크를 한 번 주문한 것 외에는 가게를 방문한 적이 없다.
‘아버지의 스승이긴 하지만.’
스승을 아버지와 같은 예로 대하는 중원의 법칙을 떠올린 진혁이 잠시 고민했다.
‘도대체 이 오행기를 어디서 얻은 거지?’
진혁이 아니었다면 머리카락의 천분의 일보다 작은 이러한 오행기를 발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몰려드는 손님들에게 반사적으로 응대하면서 계속해서 노인에 대해 생각했다.
‘지나가던 고수가 추궁과혈을 해주었을 리도 없고.’
본디 추궁과혈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진혁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안마’라고 퉁치며 밤마다 해주는 권종지사의 경우 1초에 백 번 이상 기를 실어 주먹(권)으로 균일하게 두드려 주는 기술이다. 반면 그가 진희에게 가끔 해주는 벽타고증은 기초적인 안마와도 같이 손바닥으로 가볍게 쓰다듬고 두드렸다가를 번갈아 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가족이기 때문에 해주는 것이지, 결코 지나가는 사람에게 해줄 것은 아니다.
삼류고수의 안마처럼 간신히 응급처치만 할 정도가 아니다. 진혁과도 같은 고수가 내기를 실어 적절한 혈 위치를 최적의 힘으로 타격하면 죽기 직전의 이라도 진원진기를 회복해 사흘은 걸어 다니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미세한 양의 오행기는 고수가 진기요상법을 사용했다고 하기도 뭐해.’
고수라면 이렇게 적은 양의 진기를 불어넣지 않았을 것이다.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두 노인만이 가게 안에 남았다. 진혁은 질문을 하나 했다.
“최근 드신 보양식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