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69화 (69/656)

제 069화

아버지가 무어라 말하려고 하는데, 백정흠 사장이 눈치 없이 다른 카탈로그를 내밀었다.

“형수님, 이건 제가 이번에 참고했던 일본 카페 카탈로그입니다. 한번 보시면 좋을 겁니다.”

어머니가 펄럭펄럭 카탈로그를 넘기는데 진혁 역시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들여다보았다. 일본식 정원에 정자처럼 꾸며놓은 곳도 있고, 서양식 궁궐처럼 레이스 커튼과 샹들리에로 장식한 곳도 있다. 높은 천장에 단순한 모양의 조명과 하얀 벽을 두고 천장의 콘크리트 자국을 노출하고, 여러 개의 검은색 철제 책장을 쭉 늘어놓아 도서관처럼 꾸며둔 카페에도 눈길이 갔다. 백여 개가 넘는 카페 모두가 독특하고 인상 깊었다.

“흠.”

‘맛있는 빵만이 아니라, 기분 좋게 빵을 먹을 수 있는 공간까지 제공한다라.’

진혁이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전담 요리사를 떠올렸다. 교주가 먹는 음식이니만큼, 앞에서 바로 조리해서 내놓았다. 재료 또한 신선한 것을 썼다. 현대 사회의 손님들도 주방장이 빵을 요리하는 모습을 본다면 좀 더 음식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을까.

“오픈 키친도 괜찮겠군요.”

진혁이 한 말에 백정흠 사장이 반색했다.

“그렇지, 진혁 군이 요리를 하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손님을 끌어들일 수가 있어.”

“진혁이가 빵을 만드는 건 확실히…….”

어머니도 수긍했다.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던 진혁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서 빵을 만들면, 신뢰할 수 있으니까요. 좀 더 믿을 수 있고.”

“그런 것도 있지. 그렇지만 자네가 빵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마술쇼처럼 신기해. 생활의 장인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처럼 정확한 동작으로 빠르게 수없이 뭔가를 만들어내니까.“

“그 정도야?”

진혁이 빵을 만드는 걸 실시간으로 본 적은 없던 어머니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정도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자기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나도 언제 한번 봐야겠네.”

“어차피 이제 가게에서 일하니까 자주 보게 될 거야.”

파출부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늦어지면서, 어머니의 가게 합류도 늦어졌다. 어머니가 웃었다.

“그래, 생활의 장인인 아들, 기대하마.”

눈가의 눈물 자국은 손수건으로 닦아낸 지 오래다. 마스카라가 조금 번졌지만 어머니의 얼굴은 훨씬 말끔해졌다.

‘다행이다.’

아들이 빵 만드는 솜씨가 마술 같다는 이야기를 듣자, 어머니는 웃음을 보였다. 중원에서 그 어떤 미인이 울어도 전혀 돌아보지 않던 진혁이지만, 어머니의 울음은 달랐다. 가슴 한구석을 누군가 망치로 내리누르는 것처럼 불쾌한 기분이었다.

“이쪽 가게 준비를 마치면 다시 부르겠네. 3주 이내로 끝난다고 하더라고.“

“알겠습니다.”

백정흠이 당부했다.

“경찰이 건물 파손에 대해서 조사한다고 하니, 진혁이 자네에게도 형식상 몇 가지 물어본다고 했네. 어차피 소망시에 내려가 있을 거지? 오늘 정도는 서울에 머무르는 게 좋겠어. 내가 호텔을 잡아 주겠네.”

백정흠 사장이 잡아 준 호텔로 가면서 아버지가 물었다.

“천장이 무너질 것 같은 걸 어떻게 알았지?”

“소리가 나던데요.”

“그렇구나.“

어머니와 아버지, 셋이서 번화가를 걸었다. 강남대로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거리의 간판에는 형형색색의 빛깔이 들어와 있고, 투명한 유리창 너머에는 온갖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기껏해야 노점에서 사람들이 만두를 파는 시장 바닥 따위를 보면서 지내오던 진혁에게 이 거리는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담겨 있어 불쾌한 장소일 뿐이었다. 하지만 부모님과 함께 걸으니 달랐다.

“저기 저 옷도 예쁘네.”

마치 소녀처럼 들떠서 이것저것 가리키는 어머니를 보고 있노라니 싫지는 않았다.

“진혁이 덕분에 강남도 와 보네.”

“이런 일은 없어야지.”

아버지가 느릿하게 말했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앞으론 조심해.”

‘내가 조심한다고 무너질 천장이 무너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

부모님이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안다.

백정흠 사장이 잡아둔 호텔은 특급 호텔이었다. 로비에서부터 단정하게 차려입은 도어맨이 문을 열어주며 미소로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약간 주눅 들었는지 머뭇거렸고, 진혁은 당당하게 앞으로 들어갔다.

“임운정으로 방 2개, 예약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카드키를 받았지만 직원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안내해 주었다. 엘리베이터를 지나 호텔의 침대를 보면서 어머니는 걱정했다.

“이 방 꽤 비쌀 텐데. 여보, 아무리 의동생이라고 하지만 신세를 지는 건…….”

“내가 알아서 할게, 여보.”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머뭇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가 엄청나게 크구나.“

푹신푹신한 매트리스에 앉아서 더듬어 보며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푹신하구나.”

“침구가 깃털처럼 보들보들하네.”

어머니는 이불을 만져 보는 것만이 아니라, 탁자에 놓인 스탠드를 켜 보기도 하고 화장실에 있는 작은 샴푸와 린스 등을 살펴보기도 했다.

“이건 유기농 아몬드로 만든 바디 로션이라는데? 향이 좋다.”

미니 로션의 뚜껑을 열어 향을 맡아 보며 그녀가 감탄했다. 진혁은 그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경찰 조사라. 흥미로운데…….’

그는 약간 호기심을 가졌다. 진혁은 교의 최고위자로서 교내의 치안에 책임이 있었으나 실제로 누군가를 찾아서 조사하거나 하는 역할은 집법사자와 그 이하 교도들이 알아서 했다.

‘보통 고문실에 데려가서 고문을 했던 것 같은데…….’

현대 경찰의 조사는 어떤 것일까?

19장

부모님을 방에 두고, 독방으로 돌아간 진혁은 결가부좌를 하였다. 강남으로 옮기기 전에 최종적으로 가게에서 마무리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띠링 띠링, 핸드폰이 울렸다.

“일봉이……?”

가게에 혼자 남아있는 일봉이 연락해왔다.

“사장 형! 몸은 괜찮으세요?”

“응.”

“다행이네요. 사고 이야기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일단 내일 치 빵 반죽하고 숙성, 전부 끝냈어요.”

진혁이 강남으로 갈 준비를 하며 인수인계의 일환으로 일의 대부분을 어머니와 아버지, 일봉이 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단순 작업에서 일봉이 하는 역할이 커졌다. 최근에 한 명 더 인원을 채용하려고 공고를 붙여 놓았고 학교에서도 실습생을 모집하고 있어, 곧 새로운 사람이 두 명 더 올 예정이다. 하지만 오늘은 일봉 혼자다.

“야근 시간 장부는?”

일봉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사장님도 없을 거야. 기록해 놨구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씩씩하게 대답한다. 야근 시간 장부란 것은, 일봉이 남아서 일한 시간을 기록한 종이철이다. 진혁이 가게를 비우고 강남에서 상담을 하거나 리모델링을 둘러보거나 하는 날이면 이 야근 시간은 스카이 로켓처럼 치솟아 올랐다.

가게에서 진혁이 하는 일의 분량이 워낙 많다 보니 발생한 현상이었는데,

“그래, 잘했어. 언제 퇴근했냐?”

“아직 못 했죠!”

일봉이 힘차게 말했다.

“병철이 형한테 가는 그린 워터 냉동 샌드위치용 빵 납품량이 늘어났잖아요. 이번 주에 강남 갈 게 빠졌더라도 장난 아닌데요. 형, 이 양을 다 혼자서 매일 남아서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걸 지금까지 하고 있다고?”

진혁이 물었다.

“아직 다 못했어?”

호텔 방 시계를 바라본 진혁이 혀를 찼다. 벌써 새벽 1시다. 아버지와 일봉이를 보내고 진혁이 혼자 하면 오후 10시면 전부 다 했을 양이다.

“됐으니까 접어두고 퇴근해. 내가 새벽에 내려가서 만들어 보낼 테니까.”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일봉이 정색했다.

“사고 때문에 놀라셨을 텐데 쉬셔야죠. 제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새벽에 일을 할 사람을 보낼 테니까, 정리하고 퇴근해.”

“누구 올 사람이 있어요?”

일봉의 목소리에 의심쩍은 기색이 서렸다.

처음에는 진혁을 존경하면서도 조금은 무서워하던 일봉은, 그동안 진혁과 꽤 가까워졌다. 사소한 농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나눌 수 있는 정도는 된다. 그렇다고 해도 광안마처럼 아득바득 우기고 대드는 정도는 아니지만, 진혁이 자신을 꽤 아끼고 있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사장 형이 오려고 하는 거 아니죠?”

직접 내려갔다 올 생각이었던 진혁은 뜨끔해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진작 불러서 직원으로 고용했을 테니까요……?”

“음, 그래.”

진혁이 바로 말을 꺼냈다.

“너는 모르는 학교 동기야. 채용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가끔 단기 아르바이트처럼 도와주는 건 가능할 거야.”

순간 둘러댄 말에 일봉이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지금까지 한 것만 해놓고 퇴근할게요.”

잠시 새벽에 가서, 약간 만들어놓고 오면 된다.

‘내가 여태까지 하던 양이 일봉이 혼자서 하려면 새벽까지 해도 다 못할 양이었구나.’

호텔 창문으로 나가서 그대로 하늘로 비상한다. CCTV를 의식하며 건물과 건물 지붕 사이를 뛰어 달린다. 진혁은 천마군림보를 사용하여 소망시로 향했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초상비를 응용해 하늘 위에서 둥실둥실 떠서 일봉이 뒷정리를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진혁은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이놈은 왜 후딱후딱 가지 않는 거야?’

이럴 바에는 어설프게 말 맞추지 말고 가게로 들어가서 기절시키고 일을 해두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깨어나서 일한 양을 본 일봉이 또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정도 일에 일일이 최면을 쓰기도 그렇고.’

강제로 세뇌와 최면을 쓸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일봉은 가게를 나왔다.

하지만 바로 집에 가지 않고 가게 앞에서 한참 머뭇거린다. 진혁은 가만히 팔짱을 끼고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근처의 편의점에 달려가더니 뭔가를 사서 비닐봉지에 담아 가지고 나왔다. 다시 사각사각 뭔가를 펜으로 종이에 쓰더니 집을 향했다.

‘……?’

일봉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진혁은 아래쪽으로 내려와, 가게 안에 들어갔다.

주방 위에는 노란 포스트잇이 붙은 바나나 우유가 놓여 있었다.

“……뭐라고 쓴 거야?”

삐뚤삐뚤한 글씨는 빈말로라도 잘 썼다고는 하기 어렵다. 진혁은 암호를 해독하듯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포스트잇에 손을 가져다 댔다. 종이에 남은 자국을 느끼면, 어느 순서로 무엇을 써갔는지를 되짚어볼 수 있다.

<새벽에 고생 많으십니다. 이거라도 드시면서 하세요. 일봉 드림.>

해독해낸 문장을 읽고서 진혁이 피식 웃었다.

“기본은 됐네.”

그는 충분한 양의 빵 반죽을 만들며 생각했다.

‘이 녀석은 직원으로 올리자고 하고, 아르바이트생을 추가로 둘. 빨리 구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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