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65화
“있었…… 죠.”
그에게 이전까지 중요했던 것은 오직 ‘귀환’ 그 자체였다. 살인을 하고 힘을 얻고 수련을 하는 그 모든 것을 위한 동력은 하나뿐이었다, 돌아가게 되면 가족들에게 사과하리라고.
‘그전까지 저질렀던 철없는 행동들을 사과하고…….’
평생 동안 사죄해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가족들은 그 가족들이 아니다.
‘삼 년 동안 전신마비로 누워 있는 동안 헌신적으로 나를 간호했어.’
그런 그늘을 겪은 적 없이 행복하고 건강한 가족들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나 하나뿐이야.’
두근, 하고 심장이 뛰었다.
지금 오히려 그 ‘가족’들이 부채감을 갖고서 진혁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 완전히 달라진 상황이다.
‘새로운 빵을 개발하고, 아버지와 같이 일하고, 어머니와 같이 저녁을 먹고, 가끔은 진희가 와서 장난치면서 같이 밥을 먹고.’
그런 평온한 일상을 지켜가고 싶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괴물 천하제일마, 일월신교의 교주.’
현재 여기서 그는 이제 갓 사회에 나가기 직전인 사회초년생으로 주변 어른들의 조언을 받고 있다.
‘나는 그냥 가만히 소망시에서 있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학위건 경력이건 그것들은 전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야.”
“예.”
진혁이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네 빵집에서 계속 빵을 굽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나는 그렇게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으니까.”
아버지가 웃었다.
“그 빵집을 아들이 물려받아서 한다면 기쁘겠다는 생각을 했지. 그런데 그것도 옛날이야기다.”
“왜요?”
“막상 아들이랑 같이 일을 하니까, 아들놈이 일을 너무 잘하더라.”
진혁은 약간 울컥했다.
“못하는 것보다 좋은 게 아닌가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아버지가 씁쓸하게 말했다.
“이 이야기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진혁을 똑바로 응시하며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계속 가게에 남아있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아버지?”
진혁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되고 선명한 기억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빵집에 데려가서 어깨동무를 태워주었을 때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오븐 속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다리를 굽혔다. 오븐 속에서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빵을 보면서 어린 진혁이 외쳤다.
“나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여기서 일할 거야!”
“그래, 그래.”
“아빠처럼 빵을 만들 거야!”
매일같이 가게를 쓸고 닦고 하면서, 애정을 기울여온 아버지다.
‘몇천만 원을 불러도 오래된 오븐을 팔지 않겠다던 아버지.’
이 가게는 아버지의 생명과도 같다. 회귀 전에는 진혁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서 담보로 잡았고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 팔려나가 버렸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정말로 폭삭 늙어 버렸다.
젊고 생기있는 아버지의 얼굴에, 오랜 병간호와 경제적 고난으로 주름지고 쪼그라든 아버지의 얼굴이 순간 겹쳐 보였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내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대로 흘러갔겠지.’
순간적으로 진혁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았지만 아버지는 말을 계속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작은 동네 빵집 경영이라면, 내가 조금 일찍 네게 이 가게를 물려주는 방법도 있으니까, 네가 잘 생각해 봐라.”
“음.”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버지에게 일을 배우고 싶었던 거지 그 가게에서 계속 일을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아니면 학교 쪽에서 가르치고 싶냐? 나는 전부터 가르치는 게 좋았어. 너와 일봉이를 가르치면서 알았는데, 배운 제자가 청출어람을 하니까 더 좋더라고.”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일봉이를 가르치는 것이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생 동안 누군가를 가르치면서 산다? 그것은 성질에 맞지 않았다. 소교주 후보 열 명을 데리고 가르칠 때도 귀찮기 그지없었다.
“새로운 빵을 만드는 기법을 배우고 다양한 빵을 개발하는 것은 어떠냐?”
“그건…… 즐거웠습니다.”
“그렇다면 너에게 제일 맞는 건 호텔 일이 아닐까 싶은데. 제일 좋은 재료로 최고급의 빵을 만들어서 장식하는 것.”
아버지가 말했다. 진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세 가지 중에서는 그게 마음에 드는데…….”
“드는데?”
“저는 남 밑에 들어가는 건 싫습니다.”
진혁이 선을 그었다.
“지금은 내 밑에 있잖냐.”
“그건 제가 원해서 있는 거고요.”
연어를 다 먹자 나온 메뉴는 입가심용 셔벗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레몬 셔벗에 손을 대지 않았다.
“호텔 인턴십을 거절했던 이유가 그거냐?”
“예.”
“군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버지가 혀를 찼다. 보통 갓 제대한 군인은 자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데 진혁은 그런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군대는 철저한 계급사회에 부조리한 점도 많으니.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거하고는 다르고.”
진혁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럼…… 그게 제일 좋을 수도 있겠구나.”
“예?”
“백정흠이가 와서 제안을 하나 할 거야.”
“음?”
여태까지 화웅의 백정흠 사장이 해온 제안들은 전부 좋은 결과를 낳았다. 진혁은 호의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제안인가요?”
“나는 듣고 괜찮아 보이긴 했는데, 네가 직접 듣고 결정해라.”
아버지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미리 알면 재미가 없잖아?”
“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부자에게 백진영이 다가왔다.
“저희 아르바이트생이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요. 잠깐 이야기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진혁이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어렵진 않지만.”
화웅 베이커리의 아르바이트생, 김가영이다.
“안녕하세요, 쉐프님.”
“안녕하세요.”
김가영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시선이 진혁의 아버지를 향했다.
“항상 만드시는 빵 너무 잘 먹고 있습니다. 덕분에 제 인생이 바뀌었어요.”
가영이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양손을 깍지끼고 심각하게 말했다.
“감명받아서, 적성에 맞지 않는 시험 준비를 그만두고 아예 이쪽에서 일하려고 제빵 학원도 다니기 시작했어요. 요즘은 행복해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진혁의 아버지는 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샌드위치는 어떠셨어요? 제가 케이크만큼 맛있는 샌드위치는 처음 먹어봐서 이 메뉴로 하자고 추천했었거든요.”
아버지의 얼굴에서 눈썹이 초승달처럼 휘며 밝은 미소를 그렸다.
“그 샌드위치도 우리 가게에서 만들고 있는 거라는 건 몰랐나 보구나.”
“예?”
“정확히는 우리 가게보다 여기 있는 진혁이가 만들지. 아가씨가 빵을 맛있게 먹어 준다니 기쁘다네. 그런데 그 고맙다는 인사는 내가 아니라 이쪽 내 아들한테 해야 할 것 같은데?”
“네……?! 이렇게 젊으신 분이요?!”
이번의 3단 데코레이션 케이크는 아들이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꾸준히 팔려오던 여러 빵들은 당연히 50대의 원숙한 쉐프가 빵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김가영이 깜짝 놀랐다.
“그렇지, 젊지만 빵은 잘 만들어.”
“시, 실례했습니다!!”
김가영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뛰쳐나가고, 백진영과 임진혁, 진혁의 아버지 임운정 셋만 남았다.
“아르바이트생이 저래서 영업은 제대로 하겠어?”
진혁이 턱을 괴고 말했다. 백진영은 고개 숙여 사과하고 김가영을 쫓아갔다. 시트콤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광경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킥킥 웃었다.
“네가 나이보다 솜씨가 좋긴 하지. 네가 벌써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정도로 큰 사람이 되었다니, 나는 기분이 좋구나.”
“두 사람은 무슨 일로 그렇게 웃지? 같이 우습시다, 형님?”
아버지가 실실 웃으며 진혁을 놀리는데 백정흠 사장이 다가오며 물었다.
“별 것 아니야. 자네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 고백이라도 하는건가 싶었어. 아들이 만든 빵을 내가 만든 걸로 착각하고 있더라고.”
“착각할 만 하지. 그렇게 맛있는 빵인데.”
백정흠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빵들뿐만이 아니야. 그린 워터 샌드위치는 평도 괜찮고 맛도 좋아서 나도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그게 형님 가게에서 하는 건 줄은 몰랐지”
“거의 소망시에 있는 유기농 농부들이 다 같이 모여서 하는 거야. 소꿉장난 같은 거지.”
“그러기엔 너무 훌륭한 빵인데. 아, 이제 나올 시간이다.”
백정흠이 거대한 스크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난번에 아버지와 아버지의 오븐을 함께 찍은 영상이다. 찍는 것은 8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막상 결과물은 1분 30초짜리 영상이었다.
아버지는 반죽을 썰어 구워냈다. 그가 오래된 화웅 오븐 안에 반죽을 집어넣었다. 우아한 클래식 피아노 음악이 배경으로 깔렸다.
그리고 카메라는 사람이 아니라 빵을 조감했다. 빵이 빠르게 부풀어 오른다. 맛있게 갈색으로 구워진 빵에서, 스크린 너머로 향긋한 향기가 나는 것만 같다.
“아버지. 멋있으시네요.”
진혁이 킥킥 웃었다. 매일같이 보는 광경을 다른 각도에서 보니 새로웠다.
“광고로도 활용하겠다더니 과연 퀄리티가 좋군요.”
“이렇게 보니까 부끄럽구나.”
“어머니도 같이 보셨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USB 메모리에 넣어서 따로 챙겨준다더라.”
부끄럽다고 하면서도 아버지의 표정은 밝았다.
“내가 빵을 만든다고 하는 걸 내 아버지, 너의 할아버지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셨어. 사내라면 그런 곱상한 일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하는 게 좋다고 하셨지. 그때 감 선생님께서 아버지를 설득하는 걸 도와주셨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진혁이 어렸을 적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에,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 이야기도 이번에 처음 듣는다. 그는 신기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아버지에게도 아버지가 계시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사실이다. 영상이 흘러나오는 동안,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백진영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김가영이 함께가 아니었다.
“아까는 미처 말씀을 못 드렸지만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운정 사장님. 임진혁 쉐프님.”
“그러게, 운정 형님, 바쁜데 참석해 줘서 고마워.”
“당연히 와야지.”
“하하하!”
사담을 나누다가 백정흠이 진지하게 말했다.
“의조카, 이 이야기를 들어 줘. 조카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야.”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이쪽으로 와 봐.”
그가 서류를 펼쳐 보였다. 간략하게 정리한 도표 안의 숫자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화웅 베이커리 앤 카페의 매출이지. 자네가 만들어 준 빵을 받으면서부터 이렇게 늘어났어.”
“이건……. 엄청난 매출이군요.”
매출만이 아니라, 순수익 자체도 크다. 빵을 파는 가격의 단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만한 월세를 내면서 강남에서 다들 버티는 이유가 있긴 하군.’
막연히 큰 금액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숫자로 보니 다르긴 다르다.
“자네가 이리로 왔으면 좋겠다고.”
백정흠 사장이 손을 내밀었다.
“예?”
“의형님과는 이미 이야기를 마쳤다고. 직접 설득해 보라고 하시더군.”
굵은 눈썹이 반원을 그리며, 백정흠 사장이 씩 웃었다.
“기본급으로 연 1억. 그리고 판매에 따른 인센티브는 따로 챙겨주지.”
“……!”
“진혁이 자네는 그곳에 있을 인력이 아니야.”
그가 열정적으로 말했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하지 않나. 생각해 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