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8화 (58/656)

제 058화

금천복은 기억의 뒤안길을 뒤졌다.

그것은 벌써, 육십여 년 전의 일이다. 죽어버린 남편의 무덤을 뒤로하고, 집을 팔아 고물상을 인수했다. 그 안에 있는 창고에서 살 결심을 한 것은 이대로는 집도 절도 없이 굶어 죽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그때는 아직 젊었던 감 씨, 감호철은 죽은 남편의 친구라는 명목으로 다가와 도와주려고 했다. 그는 동네에 소문난 책상물림으로 체력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금천복은 웃으면서 거절했다. “나는 잘 달리는 남자가 좋아요.” 라면서, 석양이 그늘진 어느 가을날 고물상 마당에서 그에게 말했다.

아이가 있는 사별한 여자보다 훨씬 그에게 잘 어울리는 여자가 어딘가에 있으리라 믿었으며 그 거절이 진정 그를 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감호철은 아무도 만나지 않고 평생 홀로 살았다.

“다음 주에 있을 도립 소망 마라톤에 나도 참가신청을 냈소. 대회 결과를 보고 대답해주면 좋겠구려.”

“나이 여든에 무슨 마라톤을 뛰우?!”

“그동안 충분히 연습했으니까 괜찮우.”

“관절염 있어서 절뚝절뚝 다니는 양반이 입만 살아서!”

감호철이 빙긋 웃었다.

“이번 주 일요일 오전 9시에 시작하니까, 입만 살았는지 어쨌는지 보러 오시오.”

◈          ◈          ◈

“마라톤 보급품이요?”

가게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던 진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팔짱을 낀 금천복 할매가 미간에 내 천 자를 그린 채 심각하게 말했다.

“카스텔라 같은 부드러운 빵을 조그맣게 만들어 주면 어떨까 하는데.”

“아마 기존 대기업 빵이 납품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내가 대회 측에 보급품 일부를 빵으로 기부하겠다고 했더니 가능하다고 하더라고.”

“아하.”

평소에 몸뻬 바지에 트레이닝복 상의를 걸치고 다니는 모습으로는 알 수 없지만, 나름 지역 유지인 금천복이다. 햇살노인정에 빵만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소망 보육원, 소망 장애인 복지관 등에 기부도 꽤 하고 있다.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신데요?”

“삼백여 명이 참여한다고 허니, 오륙백 개 정도를 생각했제. 그런데 이백 개면 된다고 하더라우.”

“그렇죠, 보통은 사과나 바나나 같은 걸 선호하니까요.”

“하지만 감 슨상님은 과일부담 요 빵을 더 좋아하시닝께. 입맛에 잘 맞는다고 두 개씩 냠냠 잘도 드셔. 원래 입이 까탈시러서 중국집 짜장면도 반은 남기는 양반이라우.”

“감 어르신이요?”

낯익은 이름에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지난주에 케이크를 주문하며 다녀간 그 노인을 진혁 또한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 나이에 마라톤을 하신다고요?”

“그러니께 말이우! 다덜 아무리 말려도 거참, 고집은 대죽같이 쎄서는 말을 도통 듣지를 아니 해. 그러니까 하다못해 가다가 총각이 구운 빵이라도 먹으문 힘이 좀 날까 해서 그렇지.”

진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아예 감 어르신 한 분을 위해서 빵을 챙겨드리는 게 낫지 않습니까?”

금천복이 벌컥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남사스럽게 무슨 소리야!”

언성을 높이는 금천복 할매의 뺨도 은은하게 붉어져 있다.

“늙은 나이에 미쳐서 뜀박질하는 그놈의 영감탱이를 내가 왜 챙겨! 나는 그 사람이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어딜.”

“특별히 무슨 사이라고 말씀드리지는 않았는데요…….”

진혁은 내심 웃음이 났다.

“어디서 건강검진 결과까지 받아와서 대회 참여한다고 큰소리를 쾅쾅 치는데, 그래도 내가 같은 노인정 사람으로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응께!”

“그래서 입맛 까다로운 한 명 먹이시려고 빵 이백 개를 주문해서 기증하신다고요. 금 씨 할머니는 참 손도 크셔라.”

놀리는 듯한 진혁의 말에 금천복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려! 이 없닌 노인도 빨아먹을 수 있는, 조그맣고 부드러운 카스텔라 좀 부탁혀! 내일모레 9시에 경기가 시작한디야. 보급품은 8시까지 소망시청에 갖다 주면 돼야. 돈은 내가 오늘 결제할 기니 그리 알구.”

“예, 예. 저야 돈만 받으면 되죠.”

“돈만 받으문 안 되지! 정성을 담아 줘.”

“예이, 예이.”

할머니를 보내고 나서, 가게 셔터를 내린 후 진혁은 혼자 생각에 잠겼다.

“먼저 오븐 케이크부터 초안을 짜 볼까.”

백정흠 화웅 사장이 부탁한 것은 은색 오븐이었지만 진혁은 그것만 만들 생각이 아니었다.

‘케이크가 은색에 네모나기만 하면 축제 느낌이 덜하겠지. 오히려 촌스러울 거야.’

그는 휘파람을 불며 종이에 4B 연필로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1층은 데빌스푸드 스퀘어 케이크, 그리고 그 위에 초콜릿 모델링으로 오븐과 오븐 안쪽의 구조물.’

주방 부엌을 연상케 하는 흰색 바닥을 두툼하게 깐 후, 그 위에 오븐을 올린다.

‘오븐만 두면 재미없으니까, 사장님도 한 명 만들어 주자.’

이전에는 설탕 공예를 시도해 보았으니, 이번에는 초콜릿 모델링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배운 건 까먹기 전에 전부 사용해 봐야지. 그리고 사장님 피부색이…….’

건강하게 타서 갈색이 된 백정흠 사장의 피부는, 살색보다는 갈색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초콜릿색 피부에 흰색 작업복을 입힐 생각이었다.

‘3층은 세로로 길게 뽑은 화이트레이어 케이크로 화웅 제과제빵기계공업의 건물.’

그리고 사진으로 받아둔, 강남에 있는 빌딩과 1층의 카페를 그대로 만들 생각이었다.

‘카페는 간판과 문만 만들고, 빌딩의 높이를 그대로 살리면서 간판을 재현하는 거지.’

예쁘기만 한 케이크를 만들 생각은 없다. 그는 따로 생각해둔 목표가 있었다.

‘가게에 샘플로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맛있는 냄새를 풍기게 해서, 샘플은 사진만 놓고 실물은 먹어버리게 해봐야지.’

이전이었다면 그냥 ‘먹어라.’라고 명령을 한 마디 내리면 되었을 일이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럼 머랭부터 쳐볼까.”

제일 먼저 준비할 것은 버터크림이다. 진혁이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허공으로 달걀들이 조르륵 뛰어올라 스스로 부서졌다. 넓고 깊은 은색 볼에 달걀흰자들이 떨어져 스스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공기의 회오리가 흰자 속에 거품을 내주며 머랭이 만들어지는 동안, 다른 스테인리스 볼에 설탕들이 뛰어들어갔다.

진혁이 검지손가락을 휘-하고 돌리자, 허공에서 흑적색 불길이 피어오르며 스테인리스 볼이 달구어졌다. 설탕은 곧 팔팔 끓어올라 청이 되어간다.

머랭과 청이 합쳐지며 그린 워터에서 받아온 유기농 버터가 녹아 들어가고, 초고속으로 빙글빙글 돌다가 금세 덩어리지며 크림의 형태를 취하였다.

“버터크림은 다 만들었고.”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채 30초가 되지 않는다. 무공의 힘을 빌린 베이킹! 본래대로라면 설탕을 끓여 청을 만든다거나 머랭을 친다거나 할 때 최소한 10여 분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럼 이제 조형을 해볼까…….”

미리 받아둔 화웅 제과제빵기계공업의 리플렛, 그 1면에 대문짝처럼 커다랗게 실려 있는 화웅 건물을 눈여겨보며 진혁은 데빌스 푸드 케이크와 화이트 레이어 케이크의 내용물을 위한 반죽을 시작했다.

“웨딩 케이크는 아니지만 말이지.”

본래 서양에서는 3단 웨딩 케이크를 만들 때 1단은 악마에게 바치는 공물의 의미로 데빌스 푸드(Devil’s food) 즉 촉촉하고 부드러운 초콜릿 케이크를 만든다. 2단은 옐로우 레이어 케이크, 3단은 화이트 레이어 케이크로 만든다. 3단은 신부의 순수성을 의미하지만, 그런 뜻을 살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븐 문을 열어 안쪽에서 구워지는 빵의 모양도 재현하려면 2단에는 케이크를 아예 올릴 수가 없지.”

안에서 구워질 것은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미니 헌드레드 초콜릿 쿠키들이다.

“초콜릿 쿠키는…… 설탕 반죽 말고 아예 제대로 된 쿠키를 구워 줘야지.”

이왕 만드는 김에, 오븐도 맛있게 만들고 싶다. 새 아이디어가 떠올라 진혁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븐 뼈대는 비스킷과 아몬드를 갈아 넣어서, 바삭바삭하게 씹히게 해야겠다.”

오븐까지 먹을 수 있는, 재미있는 케이크!

뜻밖의 기쁨을 주는 케이크.

‘그런 케이크를 만들고 싶다.’

진혁은 조금 전에 감사의 말을 전하러 왔던 금천복의 얼굴을 떠올렸다. 카스텔라를 주문하기 전 그녀는 감사의 말부터 했었다.

“예쁘고 맛있는 케이크를 만들어 줘서 고마우이.”

“감사합니다.”

금천복이 멋쩍게 웃었다.

“사실 나는…… 팥빵을 좋아하지 않으이.”

그녀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눈빛이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건 죽은 그 사람일세. 단것을 먹고 있노라면 그이 생각이 나서 나는…… 가끔 그 사람 생각이 날 때마다 팥빵을 한 조각씩 먹어 보았제.”

“그러셨군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금천복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자네가 만든 케이크, 예술 작품처럼 예뻐서 이걸 먹어도 되나 싶었던 그 케이크는…… 무지무지 맛있었어. 그 사람이 좋아하던 그 팥빵 생각이 나지 않고, 그냥 팥빵의 맛 그대로 무지하게 맛있었다우. 그 사람은 이미 갔고 나는 내 삶을 살고 있는데, 내가 미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이제껏 외면하고 있었던 것까지 생각하게 될 만큼.”

“…….”

“맛있는 케이크 만들어 주어서 고맙네, 고마워…… 그래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

“제가 더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빵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빵이 많이 팔리고 가게가 커지고, 그리고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평범한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꽃처럼 활짝 핀 금천복의 얼굴을 보고 나니, 이번에도 그런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진혁이 지나쳐버린 과거는 무겁고 어둡다. 그가 밟아온 발자국은 피에 물들어 있으며 그가 죽인 자는 수천에 달한다. 이제 잊어버린 그 삶 속에서 그는 살육하는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밝은 미소를 짓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아버지를 위해서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일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일이 되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빵을 통해 내놓는 것이 즐거웠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도 기쁘다.

‘생각해 보면 참, 멀리도 왔어.’

얼떨결에 대회에 나갔을 때는 아버지를 위한 상품을 얻기 위한 것만이 목적이었지만, 좋은 인연을 얻어 건강에 좋은 빵을 새로 개발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입맛에 맞는, 건강에 좋은 빵을 만들기 위해서 좋은 고기를 찾아보았고 평화 일봉 농장에서 닭고기를 받아오게 되었다. 문 닫기 직전이었던 평화 일봉 농장은 안정적으로 진혁의 빵집에 닭고기를 대량 공급하게 되면서 숨통이 트였다고 했다. 일봉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고마워한다.

‘사실 화웅에서 치킨 파이를 그렇게 많이 주문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대량으로 닭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데 말이지.’

진혁은 자신이 무언가 손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봉은 모든 것이 진혁 덕분이라고 항상 감사해 했다.

또한 유기농 채소 농장인 그린 워터 농장에서 채소를 납품받아 만든 샌드위치는 이미 냉동 온라인으로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꼬맹이밀로 만든 호밀빵도 반응이 좋아.’

건강에 좋은 유기농 야채에, 우리꼬맹이밀이라는 토종 종자로 만든 샌드위치 빵을 끼워 넣은 샌드위치는 조금씩 소문이 나고 있다. 그 둘은 정말로 맛이 잘 어울려서 아이디어를 낸 진혁이 오히려 깜짝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빵을 만드는 게 너무나 즐겁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