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57화
15장
케이크를 들고 발걸음을 옮기는 감 노인의 입가에서는 행복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 설탕 공예 인형은 정말로 금천복이를 똑 닮았어.’
그는 연예인의 굿즈를 처음 발견한 아이돌 팬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설탕 인형은 당연히 금 씨에게 가야 되지만, 인형 사진 정도는 갖고 있을 수 있겠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은 백진영은 바로 감 노인에게도 사진을 보내 주었다. 오래된 피처폰이지만 문자로 온 사진을 저장할 수는 있다. 백진영의 도움을 받아 사진을 저장한 감 노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며 어깨가 으쓱으쓱하여 금방이라도 춤을 출 것만 같이 흥겹다.
“잘 되었어, 잘 되었어.”
팥빵 맛이 나는 께이끼를 했는데, 설탕으로 금 씨를 만들어 주다니, 참말로 신기하고 요상한 노릇이다.
‘내가 생각했던 건 백설기 속에 팥이 들어있는, 떡께이끼 같은 물건이었는데 말여. 그기에 금천복 축, 멋들어지게 궁서체로 내가 글씨를 쓰는 거지.’
하지만 이렇게나 우아한, 마치 공주님의 드레스 같은 예쁜 케이크에 서툰 궁서체 글씨를 써보았자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이쁘니 다 좋아, 다 좋지.”
이제 다 왔다. 햇살경로당의 문을 열자 끼익-하는 소리가 났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오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감 씨 이제 왔나?”
“홍 씨는 아직 안 왔는데.”
“그눔의 욕심쟁이 노인네는 안 와도 되야.”
“금천복이는 오늘 좀 늦는다는데. 아들이 생일잔치를 해 준댜.”
감 노인은 홍 노인에 대한 것을 지워 버렸다. 마지막 말만이 중요했다. 그는 도톰하고 키가 높은 케이크 상자를 조심스레 냉장고에 넣었다.
“감 어르신, 올해 백설기는 키가 좀 크구려?”
금천복과 동갑내기로 사이가 좋은 이을순이는 배려가 없는 홍 노인보다 점잖은 감 노인을 넌지시 응원하고 있다. 물론 눈치 없는 감 노인은 그 사실을 모른다.
“백설기가 아뇨, 빵이요. 빵. 요즘 금 씨가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드는 그 빵집 께이끼요.”
“딸기 나마크리무 케이크인가?”
“나마크리무는 무슨! 요새 말론 생크림이요, 생크림.”
“아쿠, 내가 늙어서 까먹는 일이 많소.”
여느 때처럼 막내 박덕자와 최연장자인 여든셋 정갑녀가 정답게 티격태격한다. 그 이야기도 감 노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금천복 설탕 인형의 모습이 가득했다.
“히히…….”
결국 혼자 웃어버린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이을순이 한숨을 푹 쉬었다.
“어르신……. 그렇게 좋수?”
뜨끔, 마음 한 조각 들켰을까 깜짝 놀란 감 노인이 정색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이쿠, 좋기는 무슨. 내 이 나이에 무어가 그리 좋겠수. 잔칫날이니까 좋제.”
“우리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좀 솔직해져 봐두 좋지 않겠수?”
“그렇치.”
박덕자와 정갑녀가 옆에서 맞장구를 치는데, 감 노인의 주름진 피부가 귀 끝부터 목덜미까지 천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에끄! 망측한 소리들 하덜 마시오. 우리 금 씨는 그런 분이 아니외다.
“우리 금 씨이~?”
“우우리이~?”
박덕자가 먼저 화음을 넣고, 정갑녀가 받아친다. 둘이서 티격태격하던 때는 언제였냐는 듯, 감 노인을 놀릴 때는 호흡이 딱딱 맞는다.
“사실 우리 노인정에 감 어르신만 한 분두 없구.”
“허허!”
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나만 한 사람이 없기는, 어딜 없어.”
“그럼 홍씨가 감 씨보다 더 인물이 잘났수, 의협심이 있소, 아님 재산이…… 많구나.”
핫핫핫, 하고 정갑녀가 웃어버린다.
“우리 감 선생님은 독립운동한 양반이잖수.”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던 감 씨네 집안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고, 전부 죽었다. 그나마 글줄깨나 외던 막내 감 씨는 동굴에 숨어 있다가 혼자 살아남아 어른이 되었다. 그래도 평판 좋은 양반 집 자손이란 것이 도움이 되어, 서당을 여니 아이들은 꽤 왔다. 다 오래전 일이다.
“양반 집안 자손이란 것이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 있소, 임금님도 없구 세상이 다 평등한데. 그리고 이렇게 평등한 게 좋지, 좋아.”
그는 아주 어렸을 적, 남녀칠세부동석이 뚜렷했던 옛 시절을 어렴풋이 기억했다. 그 시절대로라면 아무리 나이 들었어도 이렇게 남녀가 노인정에 섞여 모여 앉아 빵을 나누어 먹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신분의 차이만이 아니다. 여자는 여자들끼리, 남자는 남자들끼리 어울렸다.
‘아무렴, 세상이 많이 좋아졌지.’
그는 매일 저녁, 햇살노인정에 모여 다 함께 빵을 나누어 먹으며 아무도 모르게 흘깃 금천복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
그저 하나 더 바란다면, 자신이 금 씨보다 더 먼저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
“감 어르신, 이렇게 좋은 날에 모처럼 속에 있는 얘기를 꺼내는 것은 어떠하소?”
이을순이가 은근슬쩍 감 노인의 옆에 다가앉더니 조곤조곤 이야기를 꺼낸다. 감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을순이, 큰일 날 소리 하지 말고, 훠이. 금 씨가 오해할라.”
“금 씨, 금 씨. 말끝에는 항상 금 씨를 붙이잖우! 금 씨 오지 않넌 날에는 이눔의 노인정에 오지두 안허넌 사람이 거참! 이러다가 둘 중 하나라도 덜컥 죽으문 후회 안 할 것 같수?”
“불길한 소리 하덜 말우…….”
감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감 노인이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이을순을 비롯해 햇살노인정의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지금 와서 숨기려고 해봤자 소용없는 것이다.
그때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내가 왔소!”
금천복이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대장군처럼 노인정에 왕림했다. 여느 때처럼 양손에 빵 봉투를 가득 든 채다. 빵을 유난히 좋아하는 박덕자가 반색한다.
“오늘은 거 빵집이 안 여는데 어찌 빵을 사 왔디야?”
“그 집 총각에게 말해서 따로 부탁했제. 원체 안 된다카더만 생일날이라고 특별히 들어 주드먼.”
감 노인의 시선은 금천복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여느 때 입고 다니던 검은색 바탕에 노랗고 빨간 자잘한 꽃무늬가 수 놓인, 몸뻬 바지를 입고 있지 않았다.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커리어우먼처럼 은빛 정장 재킷에 하얀색 블라우스, 거기에 은색 펜슬스커트를 입었고 굽이 낮은 은빛 구두를 신었다. 앞코가 둥근 구두 발등에는 새틴 리본에 진주와 인조 보석이 장식되어 반짝였다.
“설탕 인형하고 똑같은 옷인데…….”
“으응? 설탕 인형?”
감 노인이 중얼거리는 혼잣말에 반응해 이을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천복이 호쾌하게 말했다.
“오늘은 내가 크게 한턱 쏘기로 했지요? 오늘은 비싼 빵들도 섞여있응께, 맘놓고 드시라고요.”
할머니들은 모양조차 처음 보는 빵들을 보고 놀라워했다. 오늘은 평화 일봉 농장의 닭으로 만든 치킨 파이가 열두 개, 사람 수대로 포함되어 있다.
“이기는 이렇게 뽕 넣은 것처럼 가운데가 확 부풀어 있네?”
치킨 파이를 처음 본 박덕자가 제일 먼저 그것부터 집었다.
“그기서 해오는 빵은 흰쌀밥처럼 매일 먹어도 질리지가 않는단 말이야.”
“신기하게 밥보담 더 기운도 나구.”
“이 빵은 만두처럼 안에 국물이 들어 있구만!”
치킨 파이를 처음 맛본 이을순이 깜짝 놀랐다.
“임 씨 총각이 참으로 대단하구마잉, 어찌 빵안에 국물을 넣었당가? 무지하게 맛있구만!”
그녀가 입술 가에 흐른 국물까지 알뜰하게 손가락으로 찍어 먹는 사이, 막내 박덕자는 초콜릿 쿠키에 맛을 들였다.
“이 쿠키도 먹어보드레이. 이렇게 단맛이 많다니, 쓴 단맛에 단 단맛에 씁쓸달달한 단맛까지…….”
처음부터 눈독 들였던 헌드레드 초콜릿 쿠키로 옮겨간 박덕자다. 그녀는 초콜릿이 녹아 붙은 손가락을 쪽쪽 빨며 말했다.
한참 동안 바스락거리며 비닐 포장 벗기는 소리, 쩝쩝거리며 빵 씹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식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는 것처럼 흐뭇하게 지켜보던 금천복 노인이 말했다.
“근디 나는 생일이라고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빵집 총각이 내 생일인 걸 알고 축하해 주더라니깐.”
“우찌 알았디야?”
“우찌 알긴 우찌 알아! 누가 나으 생일이라 하구 케이크를 사온가분데, 언능 내놓지 않고 뭐하능가?”
“감 훈장님이 사 왔소.”
감 노인이 천천히 냉장고를 향했다. 탁자 위에 옮겨 놓고서 키 높이 상자를 벗기자 안에 있던 케이크가 드러났다.
“……!”
가운데가 뚫려있는 왕관 모양의 케이크.
이름은 구겔호프라고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아무도 그 케이크의 이름 따위는 몰랐다. 알 필요도 없다. 그저 그 위에 5월의 신부를 반기는 것만 같은 색색의 활짝 핀 꽃이 피어있고, 은빛 정장을 입고 은빛 구두를 신은 설탕 인형이 서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이거, 이거 금 씨고만!”
“금 언니네!”
“지금 입고 있는 옷인데? 미리 옷을 보여 줬수?”
“아니…… 이건.”
전에 대회 응원을 할 때도 입었던 정장이다. 생일 때 입으라고 일부러 아들이 맞춰 준 것이다. 구두 장식까지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옷을 기억해주었구나.’
미소 지으며 서 있는 설탕 인형을 바라보는 금천복의 눈가가 실룩거렸다. 코 옆의 주름이 깊게 패고 광대가 올라간다. 그녀는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시상에, 느무 이쁘네.”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던 여장부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자,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당황했다.
“아니, 아니, 언니 지금 우는 겨? 손수건 어딨누, 손수건!”
“여깄소!”
한참 동안 법석을 떨면서 다들 케이크 주변에 둘러앉았다. 완벽한 케이크였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거 이거, 초는 어디에 꽂으문 좋담?”
“요기 언니 옆에 꽂으까잉?”
화단이 조화롭고 아름다워 초를 어디에 꽂아도 방해가 된다. 그렇다고 초를 꽂지 않을 수도 없으니, 고민하던 노인들은 다 같이 감 노인을 바라보았다.
“감 씨, 워쩐디야?”
“으쩌까?”
“여기 꽂지.”
감 노인은 아무렇지 않게 민들레 옆에 긴 초를 하나 꽂았다. 그리고 바로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작은 불꽃이 타오르며 설탕 인형의 얼굴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역시 감 씨야!”
“오오.”
‘미리 진혁 군에게 물어보았던 대로, 여기 꽂으니까 괜찮아 보이는구만.’
감 노인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자, 자! 불 끄거라! 불 꺼!”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축하~합니다~!”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는 노래다. 다 함께 손뼉을 치며 부르는 그 노래를 들으며 금천복이 얼굴을 붉혔다.
‘고맙구려, 다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 다른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사-랑하는 금-천복-!”
그래서 오직 감 노인의 목소리만이 우렁차게 햇살노인정에 울려 퍼졌다.
“!!!”
감 노인의 목덜미가 홍시처럼 붉어졌다.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는 순간 다 같이 조용히 지켜보았다. 마치 태풍 직전의 고요처럼, 금천복이 입을 떼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감 노인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당장 대답해줄 필요는 없소.”
“아니, 감 어르신.”
감 노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전에 했던 이야기 기억하시오? 잘 달릴 줄 아는 남자가 좋다고 했잖우.”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