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56화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백진영이 황급히 말했다.
“다, 당연히 똑같이 만들려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예뻐서…… 주문 제작 받는 케이크라고 해도 이 정도라면…….”
특급 호텔의 웨딩 케이크는 이 정도 정교하지 못하다. 또한 개인 얼굴이 들어간다면 최소 50만 원부터 시작한다. 백진영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대회에서 수상하신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슈가 크래프트(설탕 공예)까지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필요해서 최근에 익혔죠.”
“가게에서 일하시면서 대단하십니다.”
유튜브를 통해 30분 만에 배웠다고 말할 타이밍은 아니다. 백진영이 이어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저희 가게를 통해서도 주문 제작 케이크를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진혁은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겨 보았다.
“일주일에 1~2개 정도라면 상관없습니다.”
이번에 케이크를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꽤 재미있었다. 백진영이 물었다.
“이 케이크 사진을 공개하시기 어려우시면, 샘플을 하나 만들어 주세요. 샘플비는 저희가 지불하겠습니다. 이 정도 디테일이라면 개당 100만 원 정도로 주문예약을 받겠습니다. 선금받고 제작하는 형태로요.”
평소 동요하지 않던 진혁은 조금 놀랐다. 진혁이 눈을 크게 뜬 것을 본 백진영이 서둘러 말했다.
“금액이 부족하신가요? 고급 호텔이나 웨딩홀과 연계하시면 더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희는 그쪽 커넥션은 없어서…….”
백진영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통감하며 씁쓸해했다.
“케이크의 경우에는 저희가 그냥 전달과 예약만 해드리겠습니다. 따로 원하시는 것이 있는지 정리하는 것도요. 그냥 저희는 전달 창구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백진영이 성심껏 말했다. 진혁이 물었다.
“왜 그렇게 하려고 하십니까?
“진혁 씨는 분명히 크게 성공하실 겁니다. 저희는 그걸 도와드리면서 파트너로 같이 가고 싶습니다.”
진혁은 백진영을 바라보았다.
“지금처럼만 해주신다면 계속 같이 가게 될 겁니다.”
“혹시 저희가 독점으로…….”
“그건 어렵습니다.”
조금 전까지 마치 불이 들어온 신호등처럼 초롱초롱하던 백진영이 약간 풀이 죽었다.
“여, 역시 그렇겠죠.”
“스마트 스토어에 입점하는 곳과 계약을 이미 했거든요. 온라인으로 계절 타르트와 계절 머핀, 냉동 샌드위치가 나갈 예정입니다. 치킨과 베이컨 파이는 아직 상의 중이고요.”
샌드위치야 애초부터 콜드 샌드위치로 만들어서 냉동하면 된다. 다만 진혁이 만든 치킨 파이는 안에 들어있는 육수의 맛이 중심이기 때문에 해동할 때 오븐으로 하는 편이 맛이 살아났다. 민병철은 전자레인지에서 해동했을 때의 맛도 좋다고 주장하지만, 진혁은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았다. 말은 상의 중이지만 거의 병철은 조르고 진혁은 거절하는 상황이며, 아마 냉동 파이가 온라인으로 팔릴 일은 없을 것이다.
백진영은 자신과 경쟁하는 유통업체 사장을 생각하자 초조해졌다. 하지만 삼촌에게 배운 대로 최대한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물론이죠, 그렇지만 강남 지역의 오프라인 판매는…….”
“그건…….”
진혁이 잠시 뜸을 들였다. 백진영이 아무리 무표정하게 있다고 해도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보면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다. 백진영에게는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잠시 흐르고, 진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역시 아버지와 상의해야 하기 때문에, 제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진혁의 말이 끝나면서 동시에 저쪽에서 촬영 감독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촬영 다 끝났습니다! 그럼 이제 아드님도 이쪽으로 오세요!”
“저도요?”
“예!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서서 반죽을 하시는 모습을 찍으려고 합니다!”
촬영 기자재를 든 스태프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촬영, 잘하시기 바랍니다.”
“예, 나중에 확인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진영은 꾸벅 허리를 숙이며 자리를 피했다.
“저런 사람은 고민 따위는 없겠지……. 인생에 걱정이 하나도 없을 거야.”
◈ ◈ ◈
쉐프복을 입고 당당하게 서 있는 진혁을 본 촬영 감독은 순간 눈빛이 변했다.
“누구야? 이번에 특별히 초빙한 모델이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 왜 누구야. 강유 닮지 않았어?”
옆에 서 있던 스태프가 속삭였다.
“이목구비가 닮았잖아요. 방금 촬영하신 일반인 분 아드님이시래요. 이쪽 촬영 바닥에는 발을 대본 역사가 없다시는데? 제가 아까 다 확인했어요.”
“이상한데, 여기서 본 게 아니고. 마스크가 낯이 익어.”
“저렇게 잘생긴 얼굴은 원래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보면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거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진혁은 아버지와 달리 NG를 전혀 내지 않았고, 순식간에 촬영이 끝났다.
“혹시 모델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마추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촬영 감독이 조심스럽게 진혁에게 다가와 말을 꺼냈다.
“자세도 바르고, 카메라를 보면서 시선 처리도 정확하고요.”
“모델 일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촬영 감독이 명함을 내밀었다. AK 프로덕션, 박재훈이라고 쓰여 있다. 진혁은 모르지만, 이 분야에서는 이름을 날리는 명감독이다.
“저희하고 일, 한번 해 보시죠.”
거절당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듯, 자신만만하게 박재훈 감독이 말했다.
“대우는 섭섭지 않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모델을 서 본 적은 없지만 수만 명의 사람 앞에서 제전을 행하고, 의식을 치렀던 경험이야 있다. 옷을 입혀주는 시녀들 앞에서 서 있던 적도 손에 꼽을 수 없이 많다.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만약 생각이 바뀌시면 저희에게 꼭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촬영 감독은 자신의 명함을 다시 집어넣지 않았다. 진혁은 일단 받았다. 옆에서 바라보던 백정흠 사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아무렴, 우리 의조카님 외모가 모델 같기는 하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는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자식이 군대 갔다 오면서 물이 올랐는지, 희한하게 잘생겨진 것 같단 말이야.”
“형님하고 똑 닮았는데요, 뭘.”
“이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도 원래는 얼굴이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칼 좀 대셨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이상하게 갑자기 어느 날 좋아졌다니까.”
“저도 그랬으면 좋겠슴다.”
농담으로 치부하며 진혁은 화제를 돌렸다.
“하하.”
촬영 팀이 전부 기자재를 챙겨 떠나고 난 후, 진혁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촬영은 어떠셨어요?”
“그냥 옛이야기 조금 하고, 빵 만드는 흉내 조금 내고.”
“흉내요?”
“연기를 너무 못해서 결국 실제 빵 반죽을 갖다 드렸어. 그때부터 긴장을 좀 푸셨는지, 다 진짜 제빵사같이 보이더라고.”
백정흠 사장이 킬킬대며 웃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저희 아버지야, 원래 꾸미거나 거짓말하는 건 못하시는 분이니까요.”
“이 녀석. 아버지에게 못하는 말이 없다.”
이제 아버지와 이 정도 농담은 가볍게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회귀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편집이 다 끝나면 보내 드리겠습니다.”
촬영 감독이 기자재를 챙겨 가는 스태프들 뒤에서 뒤돌아보며 아쉬워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우리 아들은 아주 뛰어난 파티셰라서, 아쉬울 게 없어.”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백정흠 사장이 잠시 손을 턱에 가져가더니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박 감독, 좀 매력적인 제안을 가져와야지. 우리 의조카도, 제빵 관련이나, 가게 홍보가 될만한 거라면 모델에 관심이 있을걸? 쉐프복이라든가, 제빵용 주방 도구 같은 것들. 모델료도 받고, 주방 도구도 갖추고.”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이었다.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군요.”
“가르강튀아의 나이프나, 코르시나 쉐프복 같은 데라면 더할 나위 없죠.”
둘 다 탑 급의 쉐프들이 사용하는 제품들이다.
“아드레아노 존부를 봐. 그는 자기 자신이 브랜드야. 쉐프복도 주방 도구도 전부 협찬을 받고 있지. 협찬하는 사람들도, 그도 도움을 서로 도움을 받는 윈윈(Win-win) 관계야. 진혁 군은 곧 제빵계에 혜성처럼 떠오를 테니까, 관련 업계에서 모델 제안을 받고서 개인 협찬을 받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해.”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그냥 평범한 시골 빵집 파티셰일 뿐인데요.”
“평범한 시골 파티셰가 강남에서 매일 빵 전 품목 전매를 오전 한 시간 만에 달성할 수는 없지.”
백정흠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자네는 평범한 시골 빵집 파티셰가 아니야.”
“저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백진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임진혁 씨가 이번에 주문 제작 받아 만드신 케이크 사진입니다.”
“허……!”
“이건……!”
아버지와 백정흠 사장, 두 사람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햇살경로당에서 케이크를 찾으러 온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슈가 크래프트 실력이 늘어난 줄은 몰랐구나.”
“금 씨 어르신께서는 어차피 설탕 부분은 드시지 못하니까요. 아예 따로 장기보관할 수 있게 슈가 크래프트 쪽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허, 참.”
“진영아. 사진은 허락받고 찍었겠지?”
“예. 그리고 주 1회, 가능하다면 2회 주문 제작 연결 창구 역할도 해드리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그걸 해도 괜찮겠나?”
백정흠 사장이 심각하게 물었다.
“물론 여기보다 우리 쪽에서 주문을 접수받는 게 우리 쪽에서 더 유리하게 홍보는 되겠지만…….”
진혁이 자연스럽게 바통을 떠넘겼다.
“아버지, 방금 진영 씨가 저렇게 제안을 하셔서 제가 아버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최종적으로 결정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이 너는 괜찮으냐? 일주일에 이 정도 디테일로 1개라니. 그럼 네가 잠도 못 자고 만들어야 하는 개수가 아니냐?”
진혁이 가볍게 대답했다.
“이 정도면 만드는 데 별로 안 걸려요.”
“성장하는 속도가 무섭구만……. 대회 때 동영상을 봤는데, 그때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손이 빨랐지.”
백정흠 사장이 중얼거렸다.
“이 케이크 건은 우리가 따로 이익 보지 않고 그냥 구매 창구 역할만 해 주려고요, 삼촌.”
“그래, 그래. 잘 생각했다.”
백정흠이 흐뭇하게 웃음을 흘렸다.
“제 조카가 그렇게 욕심 덩어리는 아닙니다. 사업 하는 아들하고 딸하고 달리, 좀 여유 있게 키웠더니 확실히 그게 드러나지요.”
친아들과 친딸 이야기를 하는 백정흠은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조카 이야기를 할 때 뿌듯해 하는 것과는 다른 표정이다. 반면 사촌 이야기를 듣는 백진영의 얼굴은 아주 잠깐 찌그러졌다. 그는 곧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진혁은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벌써 두 번째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백씨 집안 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진혁이 상관할 바는 아니다.
“그럼 우리 애가 힘들지도 모르니, 일단 가게 일과 병행하면서 주 1회 케이크 주문까지 받는 거로 부탁드립니다.”
“빵 주문도 제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조금, 양을 좀 늘렸는데요, 아버지. 어머니도 이제 오실 거고요.”
“음, 그래. 그건 괜찮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샘플은 언제까지 받을 수 있을까요?”
“어떤 거로 생각하시는데요?”
백정흠이 미소 지었다.
“곧 내 환갑이 다가오는데 말이야, 그때 쓸 수 있는 케이크면 좋겠어. 이 30년 된 오븐을 테마로 한 3층 케이크 같은 건 어때? 다음 주라 조금 급한가?”
아버지가 걱정스레 말했다.
“지금 주문받는 빵 양도 늘렸는데, 괜찮겠나?”
“1주일이면 충분합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