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52화
“내가 어렸을 적 요 앞에서 서당 훈장을 하셨어. 나도 거기서 배웠지.”
“그러셨군요.”
감 노인을 바라보는 진혁의 시선이, 조금 더 따뜻해졌다.
“빵을 좀 사셨습니까? 뭘 도와드릴까요, 선생님.”
“아니야, 다 했어. 여기 이 젊은이가 아주 선량해. 이런 노인이 하는 옛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큰 도움이 되었어.”
아버지가 크게 웃었다.
“하하, 이 젊은이가 제 아들입니다, 선생님.”
“그 말을 듣고 보니 이목구비가 좀 닮았네.”
감 노인이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마음 씀이 선하고 배려가 깊은 게, 운정이 자네하고는 닮지 않았는데.”
눈가에 주름이 패이고, 얇은 입술이 벌어지며 슬며시 올라간다. 여태껏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감 노인이 미소를 짓자, 놀랍게도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 자네가 장담하는 팥 께이끼는 내일까지, 가능하겠나?”
“물론이죠.”
진혁은 이미 생각해둔 것이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운 케이크로, 알알이 단팥 맛을 살리면 된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감 노인의 얼굴에는 아직 미소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선생님, 같이 가시죠.”
“어딜 가?”
“마침 저도 나갈 일이 있어서요.”
아버지가 감 노인을 따라 문을 나서며, 진혁에게 슬쩍 눈짓했다.
‘배웅하고 오마.’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갔다. 50대 후반, 장년의 아버지와 80대 후반인 할아버지. 둘이 나란히 걸어가자 마치 부자 관계처럼 보였다. 오후 느지막한 시간, 햇빛을 받은 두 사람의 아래로 그림자가 죽 늘어졌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아버지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가 진작에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이렇게 뵙게 되니까 좋네요. 아직 정정하시네요.”
“다 늙은 노인한테 무슨.”
감 노인의 그림자를 슬몃 피하며 아버지가 웃었다.
“소망시가 시로 승격하기 전에는, 여기서는 유일한 선생님이셨잖습니까.”
“허허허……. 서당 닫은 지가 언젠데. 이제는 심지어 학교에서도 천자문을 배우지 않는데. 다 옛것이지, 나처럼…… 다 지나간 이야기야. 젊은 애들은 컴퓨터니 뭐니, 이런 걸 배우느라 바쁘지. 프린터가 멋진 글씨를 쑥쑥 뽑아내고…… 서예를 하던 나 같은 사람들은, 허허.”
“선생님께서 저한테 가르침을 주셨으니까 저도 정신을 차렸죠.”
아버지가 농담처럼 말했다.
“그래, 자네가 좀 망나니였어?”
“조금 망나니였죠. 아주 조금.”
“지금 자네 아들 자란 걸 보면 알아. 운정이 자네가 아들을 잘 가르쳤으니 이렇게 잘 컸지. 금 씨가 빵집 총각이 착하다고 그렇게 칭찬을 많이 하더니만, 정말 그래. 내 눈으로 보니까 알겠네.”
“감사합니다.”
“허허허!”
아버지와 감 노인이 멀어지면서, 가게 안에서 진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단 말이야?’
새벽 5시에 나와서 밤 10시까지 가게를 여는 아버지. 일요일도, 추석도, 설날도 쉬지 않는 아버지.
항상 엄격하고 자신에게 철저하면서 가족을 아끼는 아버지.
아버지는 항상 굳센 등을 보여 주셨다.
그런 아버지 역시 어린 시절이 있었고, 막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니…… 여태까지는 몰랐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자신에게도 아버지가 알지 못했으면 하는 과거가 있으니까.
‘궁금하긴 하군. 어머니는 알고 계신가?’
진혁은 다시 빵을 비닐에 넣기 시작했다. 바스락, 바스락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난다. 옆에서 크림빵을 포장하고 있던 일봉이 놀라워했다.
“형, 제가 저번에 했던 말 기억나요?”
“뭐?”
“형이 빵을 비닐에 넣을 때 소리도 안 나서 신기하다고 했던 거. 그런데 이제는 규칙적인 바스락 소리가 나네요. 소리가 나긴 나는데, 무슨 드럼 치는 것도 아니고 박자가 완전 똑같아.”
“그래?”
‘그야, 일부러 소리를 내고 있으니까.’
진혁이 어깨를 으쓱하자 일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형도 사람이야.”
“당연히 사람이지.”
“가끔 사람 같지 않을 때가 있다고요.”
◈ ◈ ◈
진혁은 허공을 걷고 있었다.
‘이쯤이 좋을까.’
평소 가부좌를 하고 축기를 하던 곳은 자신의 방 안이다. 어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더 오감이 예민해지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조금 더 공기가 깨끗한 곳에서 수련을 한다면 어떨까?
이전에 그가 수련하던 곳은 십만대산의 제일 깊은 곳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평범한 시골의 공기와는 질부터 달랐다.
‘소망시의 공기가 나쁘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서울은…….’
서울의 공기는 마치 공장 굴뚝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것처럼 불쾌하고 끈적끈적했다.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소망시의 공기가 맑고 깨끗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깊은 산 속에 가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이름은 모른다. 그는 가장 가까운 곳에 보이는 산봉우리를 향해 천마군림보를 운용해 움직였다. 가족들은 모두 잠들어 있는 깊은 밤이다. 교교히 떠올라있는 달은 묵묵히 진혁을 비추었다.
“도착했다.”
그가 봐둔 봉우리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0여 분이 채 되지 않는다.
진혁이 해야 하는 수련은 육체적인 외공 수련이 아니다. 영혼을 통해 쌓아버린 내공은 이미 육체에 스며들어 그는 충분히 강건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무림에서의 생활을 겪은 혼백과 환골탈태한 육체의 사이에는 아주 작은 간격이 있다.
‘영혼과 육체의 조화를 이루어, 미묘한 간극을 없애 버려야지.’
혼백이 도달한 위치가 워낙 높은 탓이다. 일월신교 천 년의 역사 속에서도 탈마의 경지에 달한 자는 초대 교주를 비롯하여 아무도 없었다.
“999레벨 만렙 플레이어가 10레벨 캐릭터를 조종하는 꼴이지.”
아무도 듣는 이가 없지만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실 이미 한 차례 육신의 허물을 벗고 무공에 최적화된 몸으로 다시 태어난 진혁의 육체 또한 그리 평범한 몸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성에 차지 않았다.
‘깨달음의 경지를 낮출 수는 없으니.’
이름 모를 산봉우리 위에 올라, 그는 메고 온 팥 자루를 내려놓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잡스러운 먼지나 벌레, 새 따위가 침범하지 못하게 작은 결계를 치고 그는 가부좌를 틀었다.
‘육체를 훈련하는 수밖에.’
바윗돌을 들어 올리거나, 산의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달리는 방법 또한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오늘 할 일은 그렇게 힘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정교하고 세밀한 작업이었다. 진혁은 지극히 실용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 싫었다.
‘팥 한 알, 팥 두 알…… 일천여든세 알…….’
그는 마대자루에서 팥알을 하나씩 꺼내, 손끝으로 미묘하게 문질렀다.
천마수라장!
극미량의 강기가 아주 얇게, 거미줄보다도 더 얇게 손끝에서 펼쳐진다. 팥의 껍질을 다듬음과 동시에 팥의 안쪽을 살핀다.
‘팥은 콩과 달리 벌레가 안쪽부터 생기는 특성을 지니고 있지.’
일반인이라면 팥에 있는 미세한 벌레 구멍을 발견할 수 없지만, 진혁은 손끝의 감각만으로도 팥 껍질에 있는 자그마한 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고의 팥만 남길 거야.’
진혁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생각보다 너무 쉬운데.’
천마수라장은 극강의 무공이다. 아무리 낮은 강도로 펼쳐도 강기를 불출하는 이상, 호신강기를 일부러 해제한 상태로 천마수라장을 발출할 경우 피부가 찢어지며 모세혈관이 터져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가 조절하는 극미량의 기에 의해서 오히려 손끝에 굳은살이 생기고 있을 뿐이다. 그가 상상했던 극한의 미세 수련의 결과와 다르다.
‘…….’
겉까지 잘 다듬어진 최고급의 팥이 1/2, 그리고 상처가 있고 껍데기가 해졌거나 덜 자란 팥들이 1/4, 1/4은 벌레 먹은 것들이다.
‘이참에 아예 단팥빵용 팥소도 만들어둘 셈이었는데, 생각보다 양이 부족해.’
미세한 강기로 다듬어진 팥 알갱이들은 달빛을 받아 반질반질하게 빛나며 허공에 떠 있다. 진혁은 팥들을 극미량의 강기로 보호하며 포대 자루에 집어넣었다. 이미 골라낸 흠집 없는 팥들에 다시 흠집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제 내일 가서 팥을 삶아내면 되겠군.’
하루에 두 시간만 자도 충분하다. 실은 아예 자지 않아도 백 일 정도는 멀쩡할지도 모른다. 진혁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게를 향했다.
‘육체적인 수련 방법은 다른 것을 생각해 봐야겠어.’
화공을 익힌답시고 펄펄 끓는 철물에 몸을 담글 일도 아니고, 폭포수 아래에서 물을 맞을 일도 아니다. 그는 조금 더 세련된 방식을 원했다.
‘어떤 것이 좋을까…….’
금방 가게에 도착했다. 그는 빵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조리대 앞에 섰다. 굳이 손을 사용할 것은 아니나 손 역시 깨끗하게 씻었다. 언제나 작업하기 전에 하는 기본적인 의식이다.
오늘 만들 것은 팥을 이용한 구겔호프다.
구겔호프는 스위스에서 최초로 만들어져 유럽에 널리 퍼진 왕관 모양의 빵이다. 결혼식과 추수제 같은 지역 축제 때 먹는 경우가 많으며, 꽃과 잎, 초와 계절 과일로 장식하는 화려한 케이크다. 지역에 따라 건포도나 아몬드, 체리 브랜디를 넣기도 하며, 동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코코아나 견과류를 넣는다.
진혁은 이 특별한 구겔호프에 건포도 대신에 좋은 팥을 아주 많이 넣을 계획이었다.
‘팥의 식감은 부드러운 카스텔라류와는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약간은 거친 식감과 함께하는 것이 낫지.’
팥앙금은 떡과 잘 어울리지만, 금천복은 질긴 떡을 씹지 못한다.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휘핑한 버터 위에 슈가 파우더가 덮이고, 신선한 달걀이 그 위로 날아가 저절로 깨진다. 믹서기 없이도 스스로 빙글빙글 돌아 반죽이 저절로 휘핑되는 광경은 누구나 마술쇼라고 할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일봉이 없을 때는 내내 극미량의 강기를 보내 소용돌이를 일으켜 휘핑하고 있었던 진혁은 아무 감흥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스트가 부풀어 오르는 동안 약간 기다려야 한다. 진혁은 그동안 장식물을 만들기로 했다.
‘꽃장식은 퐁당(Fondant)으로.’
퐁당(Fondant)이란 설탕을 젤라틴과 글리세린 등과 함께 녹여 반죽 형태로 만들어 식힌 것으로 보통 장식을 할 때 많이 쓴다. 이전 대회에서 강 마리오도 퐁당을 이용해 크로크 마담과 크로크 무슈를 만든 바 있다.
그는 이전에 만들어 둔 흰색 퐁당 반죽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양손을 펼쳐 들자 퐁당 반죽이 스스로 그릇에서 뛰쳐나와 허공에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작고 가느다란 줄기부터 시작되어 꼬인 매듭은 점점 더 꼬이더니 가늘게 펼쳐지며 장미 꽃잎이 되었고, 수십 겹의 꽃잎이 겹쳐져 활짝 핀 장미 꽃송이가 만들어졌다.
‘장미만으로는 조금 촌스러운가?’
진혁은 장미에 매화와 안개꽃, 그리고 국화를 더해보았다.
‘국화는 아니군.’
장례식장에 주로 쓰는 꽃이니까, 이건 빼 버리도록 하자. 국화가 되었던 퐁당 반죽은 다시 해체되어, 뛰어든 녹색 식용색소에 물들어 이파리가 되었다.
‘아냐, 아냐. 식용색소도 쓰지 말자.’
한쪽 끝에서 튀어 오른 브로콜리가 얇게 썰려 순식간에 가루가 되었다. 브로콜리 가루와 함께 빙글빙글 돌며 합쳐진 새 퐁당 반죽은 우아한 잎사귀가 되어 차로록 가지런히 놓였다. 진혁은 허공에 장식된 꽃과 잎사귀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