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0화 (50/656)

제 050화

14장

“곱창집 아들 만나서, 이야기는 잘했냐?”

집에 들어온 진혁을 맞이한 것은, 아버지의 호기심 어린 인사말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고양이 진호를 무릎에 올려놓고 쓰다듬고 있었다. 고양이는 들어오는 진혁을 보더니 폴짝 뛰어내려 진혁에게 다가왔다.

“예.”

“뭐라든?”

“계약서를 가져왔으니까 직접 보세요. 제가 보기엔 나쁘지는 않은데.”

“어디 보자.”

아버지는 받아온 계약서를 보더니 호오, 하고 혀를 찼다.

“너한테 빵 개발비를 따로 준다는 게 맘에 드는구나. 이런 생각도 다 하다니, 병철이 그놈도 기특하네. 아들 잘 가르쳤네.”

진혁이 빙긋 웃었다.

“제가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네가?”

아버지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병철이 녀석이 사업적인 수완이 대단하다고, 수원댁이 입에 침이 마르게 자랑하던데. 허, 참.”

고양이가 진혁 발목에 얼굴을 비비며 묻히자, 어머니가 흐뭇하게 웃었다.

“거 봐요. 당신이 월급제가 아니라 수익 배분으로 하니까, 진혁이도 사업적으로 눈을 떴잖아요. 그렇게 하길 잘했어요.”

‘아니, 어머니. 그거랑은 상관없는데요…….’

진혁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신강, 십만대산이라는 시골구석에서 중원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진혁이 무력뿐 아니라 상업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강함을 숭상하였던 교주들과는 달리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있었기에 ‘금와상단’이라는 상단에 투자를 하여 좋은 성과를 보기도 했다. 진호는 진혁의 오른쪽 발목에 냄새를 충분히 묻힌 다음, 왼쪽 발목에도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후각으로는 느낄 수 없을, 묘한 고양이 쿰쿰내가 자신의 발목에 덮어씌워 지는 것이 느껴진다. 조그마하고 따뜻한 작은 털뭉치가 계속해서 부비적거리자 기분이 요상했다.

‘이 녀석도 가족들처럼, 나를 두려워하지 않아.’

고양이를 안아 든 진혁이 아기고양이의 이마를 콩 하고 아주 살짝 건드렸다.

“어디 네 냄새를 묻히려고 해.”

어머니가 물었다.

“그게 자기 냄새를 묻히려고 하는 거야, 그게? 집에 들어올 때마다 내 발목에도 비비더라고. 반가워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셈인가 봐요.”

대충 대답하고 진혁은 다용도실로 향했다. 고기 구운 냄새가 한껏 밴 외출복을 세탁기에 넣고, 세제까지 잘 붓고 세탁 버튼을 누른다.

삑, 삑 소리가 나자 어머니가 바깥에서 외쳤다.

“진혁아, 고맙다!”

“별것 아닌데요, 뭘.”

진혁이 바닥에 편안하게 앉자 어머니가 복숭아를 깎아 내왔다.

“일하느라 힘든데 집에 와서 집안일까지 하고. 우리 아들이 최고다, 최고.”

어머니가 직접 깎은 복숭아는 하얗고 토실했다.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자 입안에서 과즙이 퍼져서 좋은 맛이 났다.

“요즘 과일이 괜찮네요.”

어머니가 웃었다.

“과일도 조금 좋은 걸 사면 아주 맛있지. 사실 이렇게 비싼 과일은 사 본 적이 없는데, 느이 아버지가 너는 좋은 걸 먹어야 한다고 하더라.”

“예?”

좋은 건 예전에 실컷 먹었다.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어머니가 마저 말을 이었다.

“제과제빵도 넓게 보면 요리에 속하니까, 맛있는 걸 먹어본 사람이 맛있는 걸 만들 수 있다고. 네 미각에 테러 좀 그만하라고 하더라.”

어머니의 요리가 대단히 뛰어난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어머니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진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니 요리가 어디가 어때서요.”

“그렇지? 네 아버지가 입맛이 까다로워서 그래.”

아버지는 옆에서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종이를 읽고 있었다. 사업계획서를 포함한 계약서고, 수정한 부분이 있어도 양이 꽤 된다. 계약서를 전부 읽어본 아버지가 물었다.

“그래, 그래서 계약하기로 한 거냐?”

“아버지 의견을 듣고 결정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가 휘파람을 불었다.

“네가 보고 괜찮으면 그 자리에서 사인하라고 했잖아?”

“그래도 아버지 의견을 들어봐야죠. 그리고 다음 달부터는 어머니도 같이하실 거니까, 어머니 의견도 중요하구요.”

아버지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역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아들이 부모의 의견을 존중한다는데 기분 나쁠 부모는 없다.

“그래, 알겠다. 네 의견은 어떠냐?”

“나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약간 교활한 데가 있지 않나, 싶긴 한데.”

“흠.”

“요즘 세상에 사업하는데, 사람을 금방 믿고 따르는 소 같은 놈이면 같이 사업하기야 좋지만 이놈이 어디 가서 사기당하지 않나, 하는 걱정까지 해야 하니까요. 길거리에서 누가 말 걸면 바로 고개 끄덕이면서 다단계 잡혀가기 딱 좋은 사람은 아니니까. 사람이 맘에 안 드는 건 아닙니다.”

진혁이 짧은 감상을 이야기하자 아버지가 웃었다.

“누구 구체적인 모델이 있구만? 일봉이 말하는 거냐?”

“……꼭 일봉이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진혁이 뜨끔해서 말을 돌리자, 아버지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믿을만한 사람 많이 만나서, 세상을 믿는 것도 그 나이 때에는 복이다. 너도 분명히 군대 가기 전에는 일봉이하고 별다를 바가 없었던 거 같은데, 군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비가 궁금할 지경이다.”

“…….”

“하지만 물어보지는 않으마. 네가 말하고 싶으면 얘기해라.”

“그래, 어디든 집 떠나면 고생인데, 하물며 나라를 지키러 갔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어.”

어머니가 크게 자른 복숭아 한 조각을 진혁에게 내밀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네 의견을 따르려고 한다. 네 뜻은 어떻냐?”

“계약은…….”

진혁이 입을 열었다.

◈          ◈          ◈

이른 아침, 한 여자가 분주한 강남역 거리를 걷고 있었다. 긴 머리에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검은 뿔테 안경까지 착용했다. 질끈 묶은 포니테일은 허리 뒤로 길게 늘어뜨렸고, 입고 있는 옷은 상하의 전부 트레이닝복이다. 낡은 운동화는 벌써 5년 넘게 신었다. 책이 가득 담긴 흔한 백팩까지 메고 있는 것을 보면 누구나 그녀가 강남의 회사원이 아니라 시험을 준비하며 학원에 다니고 있는 처지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아…….”

벌써 2년 차 취준생으로 접어든 김가영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없는 처지고, 파트타임으로 하는 편의점 알바는 간신히 학원비를 감당할 정도라 구멍 뚫린 양말도 새로 사 신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편의점 근무를 하면서 그날그날 유통기한이 지난 빵과 샌드위치 따위를 싸게 사 먹을 수 있어 그럭저럭 먹고 산다.

‘언제쯤 9급에 합격할 수 있을까.’

나름 공부에는 자신 있어 도전했던 공무원 시험이지만, 지금은 그 자신감도 점점 더 깎여나가고 마모되어 아주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다.

‘엉뚱한 생각 하지 말자. 열심히 공부하면 될 거야.’

30분 후에는 학원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라 서둘러야 하는데, 그녀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평소 지나칠 때마다 진한 아메리카노 향기가 풍겨왔던 곳이다. 향기에는 돈을 낼 필요가 없기에 항상 김가영은 그 앞을 지나며 잠시 후각에 사치를 허용하곤 했다. 언젠가는 돈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마시고 싶은 것을 마시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때가 오리라고 믿었다.

‘합격하기만 하면…….’

9급에 붙으면 핸드드립 커피를 언젠가 마셔 볼 것이다. 유통기한 지난 편의점 커피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으리라고.

“냄새가 너무 좋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곳에서 나고 있는 향긋하고 신선한 빵의 내음은, 언젠가 9급에 합격하면 찾아오리라는 해묵은 결심으로 맞설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시식용 빵 매대 앞에 기둥처럼 붙박여 선 채로 김가영은 냄새를 맡았다.

킁킁.

엄지손가락 크기로 작게 잘려 있는 시식용 빵에서 좋은 향기가 풍겼다. 길거리의 먼지에 덮이지 않게 얇은 비닐로 한 겹 싸여 있었는데도 향내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 드셔도 됩니다.”

“!”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시식용으로 내놓은 거예요.”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검은 앞치마를 입고 서 있었다. 명찰에는 백진영이라고 쓰여 있다. 백정흠 사장의 조카이자 이 가게의 주인이지만, 김가영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옆에 있는, ‘맛있는 만큼 기부금을 내세요! 지체장애인 협회에 기부금이 전달됩니다.’ 라는 팻말을 힐끔 보고서 김가영은 망설였다.

“제가 먹어봐도 맛있어요.”

속삭이는 듯한 점원의 말에 김가영은 그만 손을 뻗고 말았다.

“그럼 하나만 먹어볼게요.”

얇은 비닐이 벗겨지며 바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작은 조각을 콱 깨물며, 김가영은 눈을 감았다.

폭신한 빵이 찢어지며 입안에는 달콤하고 따뜻한 부드러움이 퍼졌다. 지나치게 달지 않고 포근한 맛이다.

“음.”

밤마다 먹는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이나, 굳어 버린 샌드위치 빵 따위와는 수준이 다르다. 난로처럼 따뜻하고 솜털처럼 부드러운 맛에 김가영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너무…… 맛있어요.”

맛있는 것을 먹어본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그녀의 짧고 지친 인생에서 맛 따위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하지만 영혼을 울리는 이 맛을 보고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맛있는 것이 전부다. 이런 걸 먹고 살고 싶다.

‘이 빵을 조금이라도 더 먹고 싶다.’

하지만 돈은 없다. 여기도 강남에 있는 빵집 중 하나, 시식용이 아닌 가격은 분명히 가영이 감당할 수 없는 돈일 것이다. 폭주한 욕망은 뜻밖의 결론을 내렸다.

“혹시 아르바이트 모집 안 하시나요?”

“예?”

김가영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야구모자를 벗었다.

“아차, 이런 꼴을 하고…… 제가 실례했습니다.”

모자를 벗은 김가영을 보고서 백진영은 깜짝 놀랐다. 모자 속에 가려진 그녀는 당장 TV에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미인이었다.

“저희가 마침 아르바이트생을 하나 더 뽑으려고 하고 있긴 하는데,”

백진영이 앞치마 앞에서 명함을 꺼내주었다.

“이력서를 가지고 찾아오시면 검토해 보겠습니다.”

김가영이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다른 손님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까 도착한 전철에서 내린 사람들이 우르르 오면서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냥 먹어보면 되죠?”

“엄청 맛있다!”

“기부금 안 내고 그냥 더 살 순 없어요?”

“그건 어렵습니다. 내일부터는 정식 판매를 할 예정이니까요, 기다려 주십시오.”

◈          ◈          ◈

한편, 진혁은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햇살노인정에서 온 두 사람이다.

키가 작고 뚱뚱한 홍 노인, 그리고 키가 크고 빼빼 마른 감 노인 둘이 대표 삼아 빵집을 방문한 것이다.

‘무림에서는 노인과 어린아이, 여자를 조심하라고 하지.’

하지만 저 두 사람이 기운을 숨긴 괴짜 고수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곳은 중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봉이 평소 방문하는 손님들과는 다른 연령대의 손님을 보고서 친절하게 물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지만 노인 두 사람은 문앞에서 기웃거리며, 빵이 놓인 매대 근처에는 접근하지 않았다.

“저, 여기가 금 씨 할매가 맨날 빵 사 오는 그 빵집이 맞제?”

“글치. 이곳이 맞아. 임 씨네 아들이 하던 그 빵집.”

“빵을 직접 보시고 고르셔도 됩니다.”

“저기, 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는 홍 노인과 달리 키다리 감 노인이 주저하며 뒤에 섰다.

“파는 것인데 근처에 가면…….”

“손님인데 뭐 어때요!”

진혁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금 씨가 맨날 오는 빵집은 역시 다르구마. 요 앞에 가게들은, 쯧쯧.”

“노인을 공경할 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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