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44화
진혁이 하는 말에 진희가 발끈했다.
“야!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진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혁아, 너는 일하는 거 안 힘들어?”
화제를 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눈가가 씰룩이는 것을 애써 참고 있는 것이 보인다.
‘뭔가 잘못 건드렸나?’
진혁이 말했다.
“안 힘들어.”
“옛날에는 반죽하는 게 어렵다며. 많이 하니까 좋아졌어?”
진희의 질문에 진혁이 잠시 생각했다.
“요즘은 반죽보다는- 다른 걸 생각하고 있지.”
“어떤 걸?”
“내 실력이 좋아지는걸.”
탈마의 경지. 지금 이 경지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케이크 속에 답이 있었다.
‘이후에도 또 다른 경지가 있어.’
만류귀종!
모든 진리는 한 점으로 통한다.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케이크를 움직이면서 깨달았으니, 앞으로는 제과제빵에 좀 더 정진할 셈이다.
“지금도 엄청난 실력인데, 더 좋아지려고?”
진희가 감탄했다.
“허허. 이런 녀석이니까 내가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지. 아들 가르치기도 힘들다.”
아버지가 기특해하며 파하하 웃으셨다.
잠시 조용해졌다. 수저와 젓가락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반찬 사이를 오갔다.
“우리 아까 이야기했던 걸 지금 말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어요, 아버지?”
진혁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신중하게 턱을 만지작거렸다.
“진희에게 가게를 맡기자고?”
“아뇨.”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생각한 것은 전혀 다른 제안이었다. 하지만 진혁이 말을 이어나가기 전 진희가 다른 소릴 했다.
“어머니는 안 힘드세요? 파출부 일 그거 이제 그만두셔도 되지 않아요?”
어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루 이틀 하던 일도 아닌데, 가게 매출이 아무리 올라도 그렇지. 달걀은 한 바구니에 담는 게 아니야. 느이 아부지랑 진혁이랑 다 같이 한 가게에 매달려 있으면, 누구 한 명은 다른 걸 해야지.”
진혁은 갈비찜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간장이 짭조름하게 배어든 갈비찜은 육질이 부드럽고 쫄깃하였다. 무는 순간 입안에 퍼지는 간장의 양념과 고기의 육즙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이상한데?’
너무 맛있다.
어머니께서 만드셨다면 갈빗살이 맨숭하게 삶아져 있고 적은 양의 간장이 뿌려진 느낌이어야 한다. 진혁이 물었다.
“이 갈비찜, 진희 네가 만들었어?”
“어머니 도와드려서 양념만 했어.”
‘진희에게 요리를 하는 재능이 있었구나.’
이전에는 몰랐다. 진희가 와서 요리를 할 정도로 집안에 여유가 있지 않았다. 진희는 항상 돈을 벌러 밖을 뛰어다니곤 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진혁이 아버지에게 눈짓했다. 아버지도 갈비찜을 먹고 있었다. 한쪽 뺨을 우물거리며 아버지가 말했다.
“여보, 일 그만두자.”
“하지만…….”
어머니가 망설였다. 진희가 강하게 말했다.
“엄마, 나도 일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식구가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은 건 아니지. 그리고 2년을 버텼으니까 앞으로 10년도 더 버틸 수 있어. 괜찮아요.”
“그리고 어머니, 사실 어머니께서 가게 일을 도와주시는 게 더 매출에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지금 저희 가게에 새로운 판매루트가 생겼거든요. 진희야, 너도 병원 그만두고 이쪽 오는 것 생각해봐. 지금 우리 매출이 월 8천이야.”
“팔천!”
어머니가 기함을 했다.
“언제 그렇게 올랐대?”
진희도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내 일 년 연봉의 두 배가 넘잖아. 대단한데! 그걸 한 달에 번다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택배 판매가 시작되니까, 사람을 더 뽑을 필요는 있어. 한 명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믿을만하고 일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사실은 당신이 해주는 게 제일 좋지.”
어머니가 곱게 눈을 흘겼다.
“여보. 힘들면 파출부 일을 그만두라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가게 일을 도우라는 거였군요?”
“택배 판매요?”
진희가 되물었다.
“어디에 파는데요?”
“화웅 제과제빵기계공업이라고, 중소기업이 하나 있는데. 회사 1층에 있는 베이커리 빵집에 우리 빵집 빵을 가져다 팔고 싶대. 아직 분량은 정확히 안 나왔는데, 샘플을 좀 보내 보기로 했어.”
“잘됐네요, 여보!”
어머니가 반색했다.
“빵, 아니 일 양이 얼마나 늘어나는데요?”
“일단 샘플로 조금만 받아보기로 해서. 주문서가 정식으로 들어와 봐야 알아.”
“거기만 생각할 건 아닙니다. 온라인 판매도 생각하고 있어요.”
진혁이 숟가락을 움직이며 말했다.
“온라인 판매?”
“이번 주 수요일에 녹색 농민 조합을 만나기로 했거든요.”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평화 일봉 농장에서 말 나왔던 그거 말이니?”
“예. 그쪽에서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고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어요.”
진혁이 진희를 바라보았다.
“진희야, 너도 옛날에 가게 차려 달라고 했잖아. 이번에 가게 들어와서 일을 배워 볼 생각은 없어?”
다짜고짜 가게를 맡을 수는 없다. 하지만 만일 2호점을 내게 된다면 그 점장을 진희에게 맡겨 볼 생각은 있다. 진희가 호쾌하게 웃었다.
“왜 이렇게 갑자기 진지하게 굴어? 괜찮아. 네가 가게 차려 주지 않아도 내 연봉 그리 못나지 않아. 내 나이에 연봉 삼천오백 받으면 진짜 잘 받는 거야.”
“그야.”
“너랑 아빠한테 빈대 붙을 생각 요-만큼도 없네요. 나도 능력 있는 여자랍니다~.”
진희는 과장된 씩씩함을 보이며 힘차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눈가에는 다크 서클이 짙고,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피곤해 보이지만 눈빛만큼은 살아 있다.
“회복되어 고맙다고 말하는 환자들 보는 것도 보람 있고, 이제 슬슬 선배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했는데.”
“간호사 일이 그렇게 적성에 맞아? 힘들다고들 하던데.”
“힘들지! 죽을 만큼 힘들어!”
“그럼 가게로…….”
“하지만!”
진희가 양손으로 탁자 위를 탕하고 쳤다.
“지금 그만두면 내가 힘들어서 그만둔 것 같잖아!”
“힘들어서 그만두는 것 맞잖아. 너 간호사 일 하는 거 적성에도 안 맞는다며.”
묘하게 지기 싫어하는 녀석이다. 그러고 보면 초등학생 때도 공기놀이 따위에 졌다고 밤늦게까지 공기 연습 따위를 하곤 했다.
‘승부욕이 강해. 무림의 좋은 무가에 태어났다면 끊임없이 수련했을 거야.’
“지금 그만두면 내가 그년한테 지는 것 같다고!”
“그년?”
진희가 씩씩대며 빵을 짓이길 듯이 씹었다.
“나보다 고작 3개월 먼저 들어온 주제에 선배 노릇 하는 애가 있어. 일은 나보다 쬐에에에에끔 잘해. 하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더 잘하게 될 거라고.”
“……간호사가 서로 경쟁하는 직군이었나?”
“아니야! 그러니까 환장할 노릇이라고. 내가 일을 더 잘하고 싶단 말이야.”
왜에에엥. 왜에에에엥. 어디선가 파리가 들어와 식탁 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케이크 근처를 알짱거리는 파리를 바라보던 진호가 폴짝 뛰어올랐다.
“앗, 안 돼!”
진희가 비명을 질렀다.
“내 케이크!”
하지만 파리를 낚아챈 진호는 마치 묘기를 하듯, 케이크 위가 아니라 그 옆에 아슬아슬하게 착지했다. 얼룩진 꼬리를 흔들며 나지막이 울었다.
“야아오옹-.”
나 잘했지- 하는 모냥 신나 보였다.
“너무 귀엽다.”
“세상에! 얘가 파리도 잡아! 우리 집 복덩이네.”
어머니가 깔깔 웃었다. 아버지가 고양이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진희를 똑바로 응시했다.
“진희야, 너 하고 싶은 만큼 해 봐라.”
“오은영 걔가 그만둘 때까지 나도 버텨 볼 거예요. 꼬리 내리고 도망쳤단 이야긴 듣기 싫으니까.”
“그래.”
아버지가 푸근하게 웃었다.
“정말로 힘들면 조금 쉬어도 돼. 이 아버지가 이제 여유가 있어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구나.”
진희가 머쓱하게 웃었다.
“여태까지 키워 주신 게 얼만데. 제가 엄마 아빠 쉬게 해드려야죠.”
“우리 딸이 그런 기특한 소릴 다 하네.”
어머니가 살짝 미소 지었다.
“맞다. 그나저나 이번에 엄마랑 아빠, 건강 검진 좀 받아 봐요.”
진희가 생각났다는 듯이 짝하고 박수를 쳤다.
“작년에 생애주기건강검진 받고 올해에 아무것도 안 받으셨죠? 이번에 직원 할인 프로모션으로 건강 검진이 나왔어요. 아빠 무릎도, 팔도 계속 쑤신다고 하셨는데 이번에 한번 받아 봐요.”
아버지가 물었다.
“그게 얼만데?”
“얼마 안 돼요.”
“안 받아도 된다.”
“아버지!”
진희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아빠 나이가 이것저것 질환 예방하기에 딱 좋은 나이란 말이에요. 모처럼 딸이 해준다고 할 때 좀 순순히 받으면 어때서요. 그것도 직원 할인하는 좋은 기횐데.”
“그게, 이제는 하나도 아프지 않아.”
빈말이 아니다. 아버지는 진심으로 얘기하고 있지만 진희는 믿지 않았다. 어머니도 거들었다.
“그래, 나도 저번에 보양식으로 닭을 먹고 난 다음에 발목 쑤시던 게 확 사라졌어. 너도 언제 거기에 닭 좀 먹으러 가자. 평화 일봉 농장 앞에 닭집이야.”
“십 년을 하루같이 아프다고 계속 말씀하셨다가 갑자기 아프지 않게 되실 리가 없어요.”
진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빠, 제가 지금 혈압 좀 재 드릴게요. 저번에 혈압도 조금 높은 편이었잖아요.”
“먹던 거나 마저 먹으렴.”
“두통도 전혀 없고 아주 괜찮다니까.”
진희는 방으로 들어가 혈압계를 가져왔다. 튼튼하고 무거운 수은 혈압계였다.
“전자혈압계는 부정확한 경우가 많아서 일부러 이거 들고 왔어요. 엄마 아빠 재 드리려고.”
“…….”
아버지가 픽 웃었다.
“그래, 재 줘라.”
“재 줘라라뇨, 재 줘서 고맙다 하셔야죠!”
말하는 진희도 웃고 있었다.
진혁은 진희가 아버지의 옷소매를 올리고, 검은색 혈압계 커프를 감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청진기를 양쪽 귀에 꽂고 나서 혈압계 커프 아래에 청진기의 은색 동그란 부분을 갖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