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43화
극한의 음한지기를 이용한다면 오히려 치즈가 얼어 버릴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단 하나다.
‘살균.’
하루 간의 숙성 시간을 거치는 이유는 유제품의 특성상 상하기 쉽기 때문에 보관 기간을 늘리려는 데에 있다. 부수적으로 맛이 좋아지는 점은 덤일 뿐이다. 숙성 시간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치즈케이크는 만들고 2~3시간 이내에 바로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박테리아가 번식하기 때문에 먹을 수 없는 물건이 되어버린다. 숙성 시간을 거친 치즈케이크가 40도 이하의 온도에서 제대로 보관하면 5~6일간 잘 먹을 수 있는 것과 별개다.
이 치즈케이크를 가져간다면 분명히 가족들은 절반은 남겨 다음에 먹는다고 할 것이다.
‘2시간 후에 발생할 박테리아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면 더 잘 보인다.
크림슨 트리플 치즈케이크.
그가 오늘 만든, 세 가지 치즈와 설탕과 달걀노른자 등이 역변화를 거쳐 만들어진 바삭하고 말랑하며 납작한, 원기둥 형 물체.
광활한 신강의 한구석 십만대산의 산봉우리 위에서 축기하며 수련을 한 적은 있지만 이러한 작은 물체에 신경을 집중해 본 적은 없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
치즈케이크는 우주와도 같았다.
형체를 잃고 작게 분해되어 치즈에 구석구석 골고루 달라붙어 있는 설탕 조각은 별과도 같다.
30% 이상 함유된 필라델피아 크림치즈는 자그마한 행성처럼 골고루 분포되어 든든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0%밖에 포함되지 않은 국내 브랜드의 크림치즈는 조용하고 진하며 짭조름한 맛으로 케이크의 단맛을 강조하고 있다.
세 번째 치즈, 진혁이 직접 균주를 구입해 우유와 생크림을 넣어 만든 크림치즈가 50% 이상. 이들은 마치 찬란한 태양처럼 반짝반짝 빛나며 전체적인 맛을 낸다.
이미 원래의 색깔과 맛과 형태를 잃고 단백질 자체가 변성된 달걀노른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전체 구조를 끌어당기고 받쳐주면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아름답다.’
단 한 번도 이렇게 케이크를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하에는 파도가 물결치고 하늘에는 바람결이 구름을 싣고 와 별을 가리는 것처럼, 케이크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순간뿐이다. 케이크 내부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크림치즈는 너무나도 약한 물체다.
‘냉장고에서 나온 순간부터 벌써 무너지고 있어.’
인간의 눈으로는 판별할 수 없지만 심안으로 꿰뚫어보면 다르다.
냉장고 안에서부터 나온 순간부터 안쪽의 크림치즈들은 형태가 무너지려 하고 있다. 이제 조금 후면 박테리아가 번식하기 좋은 사육장처럼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진혁은 양손을 들었다. 그는 굳이 자신의 진기를 주입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케이크와 그 주변의 공기에 의지를 전달했다.
‘그대로 있어라.’
치즈들은 진혁의 명령을 들었다.
달걀노른자는 치즈들을 꽉 붙잡았다.
케이크는 더 이상 분해되기를 멈추었다.
“……!”
의념이 그대로 통하는 순간 진혁은 깨달았다.
나이 들어라.
어려져라.
그러한 명령은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치즈케이크가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대로 있고 싶어 하고 있어-지금이 제일 완벽한 조화를 이룬 상태라는 것을, 케이크도 알고 있어.’
분해되어 각자 다른 요소였을 때에는 알 수 없는 조화.
‘영혼이 있는 것도 아닌, 단지 내가 만들어낸 물건인 뿐인데.’
심검의 단계.
초식이 없이 마음이 검이 되고, 의지만으로 벨 수 있는 단계.
몽상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생각하던 그 단계에 이미 진혁은 도착해 있었다.
‘한국에 돌아오면서 나는 이미, 탈마의 단계에 있었어.’
혈교를 제패하여 전부 처벌하였으며 정파의 최고수라 불리는 검제 남궁소천와의 비무에서 승리했다. 천하제일마라 불리며 무림의 최일봉으로 일컬어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마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고만 생각했다.
‘내공이 부족하고 육체가 다르기 때문에, 아무도 나의 마기를 느끼지 못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깨달음이 찾아왔다.
‘오히려 이들은 마기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는 만큼 더 마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
진혁은 암천신공을 통해 내공을 쌓아왔으며, 줄기줄기 남푸른 호신강기를 내뿜어 부하와 적들을 위압해 왔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잘못된 믿음의 결과일 뿐이었나.
‘그것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광대놀음이었나?’
신호등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횡단보도에 서 있던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혁은 걷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암천신공의 본질은 본래 마기가 아니야.’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운의 모습이 마기였을 뿐이다. 그것이 그대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전대 교주의 경우 같은 천마신공을 익혔으나 그 발출하는 강기의 색깔은 진혁과 다른 눈부신 흰색이었다.
암천심법을 바탕으로 한 천마신공. 전수자마다 강기의 색은 전부 다르다고 했기에 그저 그러려니 했다. 역시 마기라고 생각했다.
‘일월신교에서 전수되는 심법은 당연히 마공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마공이란 무엇인가? 정공이란 무엇인가?
광폭대주 혈와수가 익힌 혈와수라공은 마공이다.
광안마가 익힌 천안투마공은 마공도 정공도 아니다. 하지만 정파에 의해서 잡기에 가까운 마공으로 분류되었다. 마공과 정공은 포괄적인 분류일 뿐,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 검을 든 자의 의지가 어느 쪽을 향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탈마의 경지라니.’
진혁은 뒤늦은 깨달음에 머리가 멍했다.
‘그것도 치즈케이크가 상하는 걸 막으려다가.’
그는 광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하하하!”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제 막 내공을 쌓기 시작하는 초급 무림인이나 저지를만한 실수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발은 땅 위에 닿아있지 않았다. 맞은편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네 조기축구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 동체 시력은 좋다는 소문을 듣는 오 씨다.
“지금 방금 저기에, 사람 서 있지 않았어?”
“아니? 사람이 어디에 있었다고 그래.”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신호등 옆에 서 있다가, 방금 없어졌잖아.”
오 씨의 아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못 봤어.”
“내가 착각했나 봐.”
진혁은 바람같이 사라져 빵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걸어 들어가는 동안 조리대 위로 접혀 있던 상자가 내려왔다. 마치 상자가 스스로 일어나 펴지는 것처럼 케이크가 들어올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하였고, 기다리던 듯이 케이크가 그 안으로 튀어들어 갔다. 빵집의 판매대 앞에 선 진혁은 상자 속에 들어 날아오는 케이크를 그대로 받아들었다.
“초와 칼은 필요 없지.”
관객이 있었다면 마술사의 쇼라고 박수를 쳤을 만한 장면이다. 진혁은 시선을 들어 가게 바깥을 바라보았다. 오늘 낮과 전혀 다르지 않은 광경이지만 진혁에게 들어오는 광경은 달랐다.
단순한 사물처럼 보이던 모든 것에도 각자, 그곳에 서린 기운이 있다. 이곳의 땅은 죽어가고 있으며, 하늘은 드높이 청명하고, 매대의 빵들은 점차 최상의 상태에서 변화하는 중이다. 진혁의 손에 들린 케이크는 이 순간에 고정되어 있다. 진혁 자신의 기운이 케이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다.
집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진혁이 왔어?”
진희가 밝은 표정으로 문을 여는데, 조그마한 털뭉치가 빼꼼 하고 문 사이로 톡 튀어나갔다.
“잡아!”
“진호 또 나갔어!?”
“잡아라, 진혁아!”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들려왔다. 진혁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아 올렸다.
“진호. 네 방으로 돌아가.”
“야아아옹-”
목덜미를 잡힌 고양이가 우는소리를 냈다. 진희가 황급히 고양이를 빼앗아 안았다.
“얘, 얘! 이 조그만 애를 그렇게 안으면 어떻게 해.”
“……케이크.”
진혁이 케이크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나 받아.”
“어! 이런 거 필요 없다고 해도. 아이참. 고마워!”
진희가 밝게 웃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진혁이 왼손으로 잡고 있는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저놈이 신기하게 진혁이를 따른단 말이야.”
“그래도 요전부터 나랑 당신도 좀 따라다녀요.”
“그런데 진희 말만 안 듣네.”
“그럼, 다른 지역에 살다가 주말에만 가끔 오는데. 당연히 사랑받기가 어렵지.”
진혁은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느릿하고 진중하게, 천천히 움직였다. 진희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진호가 나한테만 안 와. 자주 보다 보면 나한테 다가와 줄까?”
“……글쎄.”
진호는 진혁의 발목 옆에 머리를 부비대며 고롱거렸다.
“솔직히 내가 진혁이보다 오늘 집에 오래 있지 않았어? 쟤는 온종일 가게에 있고, 집에서는 잠만 자잖아.”
“넌 집에선 잠도 안 자잖니.”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나보다 진혁이를 더 좋아하다니.”
“자, 자. 진혁이도 왔으니 밥부터 먹자.”
어머니가 차린 상은 생일상처럼 찬 가짓수가 많았다. 갈비찜에 잡채, 수란에 도라지무침, 오이 냉국에 소고기 장조림까지. 전부 진희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내가 제대할 때는 이런 여유가 없었지.’
보통 반찬은 김치, 거기에 달걀부침이 하나 있으면 좋았다. 가게 수입이 간신히 월세를 내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엄마, 다 너무 맛있어요.”
진희가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이후 처음이다.
“그래, 처음에 너무 힘들다고 하더니 2년이나 잘 버텼어.”
어머니가 진희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사실 별거 아닌데. 우리 병동에 20년, 30년 다니고 있는 선배들 많아요.”
진희가 눈가를 실룩였다.
“요즘도 병동에서 일하는 게 많이 힘드냐.”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진희가 고개를 저었다.
“일 년 지나니까 조금 나아진 것 같아요. 신규 때는 원래 다 그렇게 힘들다고 하니까. 나만 특별히 힘든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해야죠.”
“뭐가 제일 힘든데?”
어머니가 물었다. 진희가 잠시 진혁을 흘긋 바라보다가 말했다.
“밤에 일하는 거요.”
“야간 근무를 자주 해?”
“한 달에 7일은 하는데, 이게 진짜 너무 힘들어요. 아무리 긴장하고 있어도, 새벽 4시쯤 되면 순간적으로 앞이 깜빡깜빡하는 느낌이 있어요. 다음날 아무리 자도 피곤이 안 풀리고.”
순간적으로 진희 얼굴에 짙은 피로가 서렸다.
“그만두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