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39화
겉의 페이스트리를 조금 더 얇게 한다면, 입안에서 침으로 녹여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진혁은 멋대로 이런저런 요구를 해대는 이 할머니를 싫어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여기저기 소문을 퍼트려, 햇살 노인정에 어머니나 아버지를 보내는 가족들이 손에 손을 잡고 빵집까지 찾아오는 걸 보면 더욱더 그렇다.
“저도 부드러운 치킨 파이 같이 시켜도 되나요?”
옆에서 듣고 있던 김도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는 왜? 충치 있냐?”
자주 오는 손님이라 말을 텄는지, 일봉이 장난스레 하지만 걱정을 담아 물었다. 매일같이 그렇게 케이크와 파이를 먹어대면 충분히 이가 상할 만도 하다.
“아니요, 그냥…….”
“그냥?”
진혁이 말꼬리를 붙잡았다.
“그게 더 맛있을 것 같아서요……. 특별 주문하는 거니까. 지금 구워주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숙성 시간이 필요해서 내일 따로 찾으러 오셔야 해.”
“그럼 저는 그냥 치킨 파이요.”
빵을 받아가면서 도을이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할머니만 이것저것 만들어 주시고, 나는 아무것도 없고…….”
진혁이 도을이를 바라보았다.
“너도 내일 찾으러 와. 부드러운 치킨 파이를 따로 빼놓을 테니까.”
어떻게 만들지 생각해 본 바가 없다. 그저 아주 아주 아주 얇은 페이스트리 껍질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귀가 밝은 금천복 할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내가 먹고 싶은 거 다 부탁하는 거 아녀.”
“할머니는 맨날 먹고 싶은 거 다 얘기하면서요, 무슨.”
“내가 먹고 싶은 게 아니고, 노인네들이 못 먹는 걸 부탁하는 거지! 콩알만 한 게 못하는 말도 없어.”
할머니가 도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드럽다. 도을이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는 여기서 처음 먹은 황금 버터 앙금 소보루 먹고, 세상에 이런 빵이 다시 없었다며 너무너무 좋다고 했잖아요.”
“니는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나?”
금천복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잠시 두리번거린 후 직원들이 전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도을이의 귀에 속삭였다.
“맛있는 빵하고 먹고 싶은 빵하고 다를 수도 있제.”
“……? 그게 어떻게 다를 수가 있어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매, 잘생긴 총각이 귀도 밝구만.”
금천복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못 먹는 게 당연한 음식잉께 나는 괜찮다야.”
주섬주섬 이것저것 빵을 주워 봉지에 넣고, 꼬깃꼬깃한 오만 원짜리 지폐로 한 번에 계산한다. 도을이 학생증이 꽂힌 지갑에서 천 원짜리 다섯 장을 꺼내 계산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가득 빵을 안고서, 김도을과 금천복이 나란히 문을 나섰다. 방해되지 않게 구석에 서 있던 안영윤 부장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좋은 단골손님들이네요.”
“그렇죠.”
안영윤 부장을 좋지 않게 바라보고 있던 진혁의 눈매가 살짝 부드러워졌다.
“제가 처음 가게에 나왔을 때부터 제 빵을 맛봐주신 손님들이지요.”
일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맨날 와요. 다른 사람들도 자주 오는데 저 두 사람만큼은 아니지.”
안영윤 부장이 빙긋 웃었다.
‘그냥 대회에 나가서 우연히 우승한 풋내기인 줄 알았는데…… 빵집에서 꾸준히 일해온 모양이야. 손님을 아끼는 모습까지, 그림이 나쁘지는 않아.’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인사하고 나가려는 안영윤 부장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잠시만요.”
“예?”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죠.”
아버지는 비닐봉지에 꽉 차게, 빵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또 다른 봉지에 다른 빵들을 집어넣었다.
“이거는 가면서 드시고, 이 봉지는 가족분들하고 나눠 드세요.”
“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안영윤 부장이 멈칫했다.
“저, 이런 걸 받으려고 온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안 좋은 의도를 가지고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떻게든 구슬려서 오븐을 주지 않으려고 왔다. 미안해하며 안영윤 부장이 거절하는데 아버지가 굳이 손에 들려 보냈다.
“어허! 들고 가십시오. 번호판 보니까 서울에서 오셨는데, 가시는 길에 있는 그 휴게소, 라면부터 돈가스까지 맛있는 게 단 하나도 없어요. 내가 밥을 사드리면 좋은데, 보시다시피 가게가 바빠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환하게 웃었다. 안영윤 부장이 어색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가, 감사합니다.”
차를 타고 운전해서 돌아가는 길, 소망 휴게소에 멈춘 안영윤 부장은 조수석에 놓인 빵 봉지를 힐끔 바라보았다.
‘난 빵은 좋아하지 않는데.’
큰딸은 빵을 좋아한다. 유치원생이 어디서 겉멋이 들었는지 밥보다 빵을 더 좋아해서 맨날 빵을 사달라고 한다. 그래서 오히려 빵을 좋아하는 아내가 요즘 집에서 빵을 아예 안 먹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밥을 먹지 않는 버릇을 들이면 좋지 않다고 애써 참고 있는 것이다. 갓난쟁이에게 모유 수유를 하고 있는 탓도 있다.
‘딸에게 갖다 주면 좋아하긴 하겠지만…….’
양이 너무 많다. 아내가 딸 몰래 먹기에도 많고, 자기 혼자 먹기에도 많다.
“일단 라면하고 김밥이나 먹고 생각해 볼까.”
하지만 식당에서 막상 나온 음식을 본 안 부장은, 과거의 자신이 내린 결정을 매우 후회했다.
‘그 사장님이 괜히 한 말이 아니었군.’
노란색 면이 퉁퉁 불어 있는 라면은 끓인 지 십 분은 지난 것처럼 보였다. 안영윤은 주방 아주머니를 노려보았다. 손님이 많은 곳도 아닌데, 피곤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서 주방 안쪽에 엎드려 있다.
‘하, 따질 기운도 없다.’
오늘 운전한 시간만 거의 8시간. 이제 올라가면 다시 회사에서 오늘 못한 일을 처리해야 한다. 사장을 만나고 직접 보고해야 하는 것까지 고려하면 조금 더 서둘러 운전해야 한다.
‘김밥을 라면 국물에 찍어 먹으면 괜찮을 거야. 최소한 불어터진 라면발보단…….’
하지만 김밥 한 조각을 입에 넣은 안영윤 부장은 바로 라면 그릇에 김밥을 뱉어 버렸다.
“퉤!”
그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그릇째 퇴식구에 반납했다. 물로 입을 헹구고서 씁쓸한 표정으로 차로 돌아갔다. 장시간 운전해서 지쳐 있는 몸을 이끌고 간신히 운전대에 앉아, 방금 사온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집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 망할 놈의 휴게소는 밥알 대신 소금을 넣었나. 짜기는 또 엄청 짜네.”
커피를 입에 갖다 댄 안영윤 부장은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방금 아메리카노를 푸왘 하고 뿜어낼 뻔했다.
“아메리카노에 소금을 넣은 거야?! 맛이 왜 이래!”
당장에라도 물로 입안을 헹구고 싶다. 하지만 차 안에 있는 것은 아까 받아온 빵뿐이다. 안영윤 부장이 짜증스럽게 입맛을 다셨다. 일 차선에서 느릿느릿, 초보 운전 딱지를 붙이고 달리고 있는 빨간색 경차를 보자 더 화가 났다.
“추월 차선에서 왜 기어가고 있냐고.”
그렇지않아도 서둘러야 하는데, 저 차는 도대체 뭘 하는 짓인가. 빵! 하고 한 차례 경적을 울리자 앞의 차가 조금 빨라지기 시작했다.
“초보 운전이면 고속도로에 나오질 말아야지.”
투덜거리는데 아직도 입안에서 짠맛이 가시질 않는다. 그는 기분 나쁘고 텁텁한 짠맛에 인상을 찡그렸다. 안 부장은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오른손으로 더듬거리다가,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
“이거 하나면 만사 해결이지.”
그는 목캔디 통을 탈탈 털었지만 안에는 빈 비닐 껍질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온종일 되는 일이 없구만.”
다시 목캔디 통이 있는지 오른손으로 뒤적거리던 안 부장은 말랑거리는 비닐봉지를 잡았다.
“아.”
조금 전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던, 받아온 빵이다.
조금 전까지는 냄새가 나지 않았는데, 비닐봉지를 만지면서 뭔가 열렸는지 확 하고 달콤한 향내가 풍겨왔다.
빵을 좋아하지 않는 안 부장마저도 입안에 침이 고일 만큼 군침이 감도는 향기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제대로 먹은 밥이 아침 한 끼밖에 없잖아.”
그나마도 새벽에 출발하느라 허겁지겁 대충 먹어서, 제대로 된 식사라고는 할 수 없다. 안영윤 부장은 빵을 주욱 찢어 입안에 넣었다.
“……!”
마치 더운 여름날 먹은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고 부드럽게 입안에 녹아내렸다. 손가에 묻은 약한 끈적임이 전혀 성가시지 않을 정도로 달지만, 지나치게 달지는 않다.
“이 맛은…….”
안 부장은 방금 입에 넣었던 빵의 나머지 부분을 전부 집어 들었다. 무슨 빵인지 살펴보지도 않고 마저 입에 넣었다. 아까까지 남아있었던 불쾌한 맛을 이 맛으로 상쇄시켜야 한다!
부드러운 단맛. 이 맛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손으로 만져보면 크림이 아니라 빵인데 입안에 들어가면 크림처럼 살살 녹는다. 겉면에만 살짝 바삭함이 남아있는 딱딱한 껍질은 적당한 질감을 준다. 중간중간 박혀있는 자그마한 버터 덩어리가 빵의 향을 더 풍부하게 해주고 있다.
“하.”
순식간에 다 먹어버렸다. 주먹만 한 크기의 빵이었는데 이제 없다. 안영윤 부장은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왔던 거였어…….”
아무도 모르고 있던, 숨겨진 동네 맛집.
아버지의 기술을 비밀리에 전수받은 아들이 가게 홍보를 위해 대회에 나온 것이 분명하다.
“직접 낳아 키운 아이가 후계자라니.”
그건 조금쯤, 부러울지도 모른다. 쉬지 않고 그는 다음 빵에 손을 가져갔다. 두 번째 먹은 빵은 그리운 맛이 났다.
“샤오롱바오?”
아내와 아직 결혼하기 전, 데이트하면서 갔던 중국 식당에서 먹었던 그 맛이다. 하지만 돼지고기가 아닌 닭고기 맛이 나며, 겉에는 바삭바삭한 빵이 감싸고 있다. 분명히 다른데도 그때 생각이 난다.
“그땐 이렇게 힘들어질 줄 몰랐는데.”
결혼하기 전에는, 아이를 낳기 전에는 몰랐던 일들이 많다. 지금 둘째를 키우고 있는 아내도, 첫아이 때는 허둥거리는 일이 많았다. 걸어가기 전에 기어야 한다. 이제 갓 백일 지난 둘째가 막 몸을 뒤집기 시작했는데, 아직 되돌아 뒤집기는 하지 못한다. 큰딸은 몸을 뒤집기 전에 기기부터 시작했는데 참, 같은 부모 아래에서 자라는데도 그렇게 다르다.
“유치원생이 될 때까지 키우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지금도 미운 다섯 살, 한창 말을 듣지 않을 때다. 하물며 사춘기의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기로 결심하고 같은 전공으로 진학한다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얼마나 잘 키웠길래, 어떤 모습을 보여줬길래…….”
지금 큰딸이 자라서 고등학생이 된다면, 과연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할까. 아버지가 하는 일이 좋다고, 아버지를 따라서 같은 일을 하겠다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자랑스러워 하며 응원할까, 아니면 말리면서 이런 일은 하지 말라고 할까. 안영윤 부장은 닭고기 국물을 츄릅하고 빨아들이며 딸 생각을 했다. 이 빵은 국물만 따라내어 작은딸에게도 맛보여 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모유를 빨고 있는 작은딸, 고물고물한 어린 것에게도 맛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맛있다. 짭조름하고 달콤하면서도 폭신하다. 황홀하기 그지없는, 한순간의 천국이 지나갔다. 닭 국물을 전부 먹은 다음에는 너무나 만족스럽고 세상이 행복하다. 안영윤 부장은 핸들을 잡은 왼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삼십 년 동안 저 오븐을 쓰면서, 아들한테 모든 걸 가르쳤겠지. 반죽의 A부터 C까지.”
장인은 자신의 기술을 삼 푼은 숨긴다고 한다. 하지만 배우고자 하는 이가 자신의 혈육이자 후계자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