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38화
“사장님 피부가 엄청 좋아지셨어요. 팩이라도 하셨어요?”
“그렇지? 너희 집에서 먹은 닭요리가 효능이 진짜 좋은 것 같다.”
“에이, 저희 집 닭고기가 아무리 온몸의 혈액순환을 돕고 피부도 곱게 해준다고 해도 하룻밤 만에 사장님 피부를 깨끗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에요. 입술 아래 점도 없어지셨잖아요. 그렇다고 피부과에 다녀오신 것도 아닐 테고요.”
아버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잘 잤나 봐.”
“그 잠 저도 좀 자보고 싶네요.”
일봉이 부러운 듯이, 뺨에 약간 얽은 자국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제가 중학생 때 진짜 호르몬이 샘솟았거든요.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여드름을 터트리고 짜고 장난 아니었어요. 그랬더니 얼굴이 완전 달 뒤편같이 크레이터가 짱짱해요.”
아버지가 위로해주었다.
“네 생각만큼 심하지는 않아. 그냥 조금 여드름 흉터가 있는 정도지.”
“소보루빵하고 똑같이 생겼다고요.”
“소보루빵은 좀 더 입체적이지.”
진혁이 위로인지 욕설인지 모를 말을 하자 일봉이 웃었다.
“와, 형! 진짜, 팩폭이에요.”
딸그랑, 딸그랑!
문밖에서 양복을 입은 40대 중년 남자가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임진혁 씨가 어느 분 되십니까?”
그는 나이 또래가 비슷해 보이는 두 남자 중 누가 진혁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두리번거리며 두 사람을 응시했다.
“접니다.”
진혁이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저는 화웅 제과제빵기계공업사의 마케팅부장인 안영윤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가볍게 묵례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양손으로 공손히 명함을 내밀며 진혁을 바라보았다.
“먼저 데코레이션 페어에서 우승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기서 오셨군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오븐 배달을 이 주소로 요청하셨는데요. 혹시 여기 가게와는 관계가…….”
임운정이 앞으로 나섰다.
“이 녀석이 제 아들입니다.”
“아버지 가게로군요.”
안영윤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후계자 수업을 받고 계셔서, 상업용 오븐이 필요하셨던 거군요.”
“그렇습니다.”
“사실 오븐의 사용과 활용에 관해서 상담을 하고 싶습니다만, 혹시 사장님께서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지요?”
“알겠습니다.”
아버지가 나서려는데 진혁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제지했다.
“수상 상품 배송에 왜 상담이 필요합니까?”
안영윤 부장이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한참 동안 밖에 서 있던 탓이다.
“아시다시피 상품이긴 하지만, 이 제품을 실제로 사용하셔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실제로 사용할 겁니다.”
진혁이 직원용 출입구를 열어, 안쪽에 보이는 오래된 오븐을 가리켰다. 이직하면서 오븐에 관해 처음 공부한 안 부장이 보기에도 최소한 십오 년은 넘어 보이는 옛 모델이다. 그 위에도 화웅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것도 저희 모델이네요?”
“예. 보시는 대로 이십 년 넘게 쓴 오븐입니다.”
안영윤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건 대단히 옛날 모델인데요. 지금은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도 없는…….”
“단순하고 튼튼해서 오랫동안 잘 썼어요. 개업할 때 투자랄까, 선물이랄까, 당시에도 고가의 물건이었는데 친우의 도움을 받았죠.”
아버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의미가 있는 물건이기 때문에 오래 쓰기도 했습니다. 쉽게 고장 났다면 아무리 선물 받은 것이었다고 해도 이만큼 버텨주지 못했겠지요.”
스마트폰 속에서 무언가를 검색한 후 안영윤 부장의 얼굴색이 변했다.
“혹시 그 이야기, 자세히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안영윤 부장이 진중하게 말했다. 진혁이 물었다.
“배송 주소와 설치 날짜만 확인하시려고 온 게 아닙니까?”
“그런데 저 기계는,”
안영윤이 심각하게 말했다.
“이 오븐은 저희 회사가 처음 영업을 시작했을 때, 특별 주문으로 들어온 기계입니다. 사장님께서 술자리에서 몇 번이나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하긴, 당시에 친구가 이 크기의 기계가 없다고 따로 주문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갓 신생 업체로 출발한 저희 사장님께서 일부 부품은 주문제작을 하다시피 해서 직접 용접하신 기계입니다…… 아직까지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기뻐하실 겁니다.”
아버지가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도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였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었죠. 저 오븐하고 같이 나이를 먹었다고 할 정돕니다.”
안영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핸드폰을 들더니 옛 오븐에 들이대려고 했다. 아버지가 물었다.
“가게 내부를 찍으시려고요?”
“아닙니다, 저 오븐만 찍으면 됩니다.”
“그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진혁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아버지가 허락하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오븐의 사진을 찍은 후 안영윤이 결심한 듯이 말했다.
“제가, 잠시 전화 한 통만 하고 바로 들어오겠습니다.”
다급하게 문을 박차고 나가는 중년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일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들어와서 오븐을 보고 갑자기 나가시네요.”
“오늘은 오븐을 가져오지 않았나 보군.”
진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언뜻 보면 냉정하게 보일 수 있는 그 말 사이에서 실망을 읽어낸 아버지가 진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큰 물건을 주소만 받고 대뜸 배송할 리는 없지. 설치될 장소를 확인하러 오는 것이 보통이야. 예전에 저 녀석을 주문받을 때도 그랬지.”
문 너머라고 해도 진혁에게는 안영윤 부장의 통화내역이 들려오고 있다. 진혁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애초에 배송을 하러 온 게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요.”
“음? 뭐라고?”
“아닙니다.”
◈ ◈ ◈
“사장님, 접니다.”
“그래. 담판은 지었어? 뭐라든?”
“찾았습니다.”
“뭘?”
“사장님이 옛날에 말씀하신 기계요. 어음 기한이 당겨져 당장 급전이 필요해서 망하기 직전이었는데, 갑자기 특별한 사이즈의 오븐을 주문한 의사 선생님이 있었다고 하셨잖습니까.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셨다고,”
“그 얘기는 지금 또 왜 해?”
전화기 너머에서 백 사장이 으르렁거렸다.
“나중에 오븐 잘 쓰고 계시는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그 당사자분이 사망하셔서 어디서 쓰고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고, 직접 찾아가서 설치해주신 그 위치에 가게가 없었다고 하셨던 그 기계요.”
“안 부장!”
전화기 너머로 호통소리가 들렸다.
“벌써 삼십 년이야,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그건 이미 고철이 되어 어디 팔려 갔을 거야. 나는 포기했어.”
백 사장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 소중한 기계는 그런 일반 가정집에 갈 물건이 아니라고 잘 얘기는 했냐고!”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같이 우렁차게 외치는 사장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안영윤 부장이 급히 말했다.
“그 기계를 찾았다고요, 사장님!”
“비슷한 거겠지.”
“지금 사진 보내드리겠습니다.”
“허!”
사장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자동차 안에서 안영윤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통화를 가게에 있는 분들께 들려 드릴 수는 없지…….”
호통을 들었지만 안영윤의 표정은 밝았다.
“보시면 분명히 아실 거다.”
몇 번이나 보았던 사진이다. 벌써 몇십 년 전의 흑백사진. 회사의 사무실에 가장 커다랗게 뽑혀 걸려 있는 그 사진 속의 오븐. 평범한 직육면체 형태의 오븐처럼 보이지만 그 오른쪽에 새겨져 있는 화웅의 마크 속에는 사장이 직접 새겨넣은 이니셜이 음각으로 따로 들어가 있다.
‘글자를 쓸 때 오른쪽 획이 치켜올라가는 버릇은 지금도 그대로니까.’
띠띠띠띠띠.
백 사장의 전화가 다시 왔다. 사진을 확인한 것이다. 조금은 침착해진 백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자네가 직접 찍은 건가? 사기꾼이 보낸 게 아니고?”
안영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정중하게 제안해 봐.”
누그러져 있는 사장의 말투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가득 묻어 있었다.
“여태까지 잘 써주셔서 고맙다고도 말씀드리고. 나도 한번 찾아간다고 이야기 좀 해라.”
“예! 알겠습니다!”
◈ ◈ ◈
다시 문을 열고 나타난 안영윤 부장의 얼굴은 화색에 가득 차 있었다.
“새 오븐은 내일 당장 도착할 겁니다. 최우선으로 보내 드리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진혁과 아버지, 일봉 셋 모두 입을 모았다.
“사실은 저희 사장님께서도 이 기계를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우리 가게는 계속 여기에 있었는데? 못 찾을 수가…… 아.”
아버지가 손뼉을 탁 쳤다.
“처음에는 그놈이 자기 집에 갖다 놨다가, 나중에 트럭째 싣고 와서 다시 설치했지. 깜짝 놀라게 해 준답시고 복잡하게 굴었어. 신혼 여행에서 돌아오니까 가게에 오븐이 탁! 와 있었다고, 아예. 그게 유품처럼 되어 버렸지만.”
안영윤 부장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곳에 찾아가도 없었던 것이군요.”
“음?”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안영윤 부장이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다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가게에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이미 내일 배송 오는 오븐만으로도 저희는 충분히 좋은데.”
아버지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안 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옛 오븐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안 부장이 운을 떼었다.
“혹시 처분하시려고 하신다면 살 의향도 있다고 하십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말했다시피 친구의 유품 같은 거라, 계속해서 쓰려고 합니다. 하는 데까지 손봐가면서 쓰려고요.”
“내일 누가 와서 오븐을 좀 보고 싶다고 하는데요.”
“수리공입니까?”
아버지의 입이 벌어지며 입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갔다.
“사…… 수리공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안영윤 부장이 말을 더듬었다.
“내일 직접 보고 말씀을 나누시면 되겠습니다. 이야기가 잘 되면 처분하실 수도 있고요.”
아버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이봐요. 지금 내가 중요한 물건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왜 처분 이야기를 자꾸 합니까.”
“알겠습니다.”
딸그랑, 딸그랑!
바깥에서 종이 울리고, 낯익은 손님이 들어왔다. 중학생 김도을, 요즘 매일 저녁을 케이크와 치킨 파이로 먹고 있는 인근의 중학생이다. 도을이가 오면 보통 따라 들어오는 손님이 있다.
“금천복 씨.”
“씨는 무슨, 징그럽게! 그냥 할멈하고 불러라.”
고물을 처분하고 나면 이 시간이 되는지, 중학생들 하교 시간에 맞춰서 오는 할매다.
“새로 나온 치킨 파이라는 것이 그토록 요물이라며?”
“요물요?”
“맛있다 이 얘기지, 무슨!”
할머니가 호탕하게 웃었다.
“우리 햇살 노인정에 이빨 빠지고 틀니 없는 노인네들이 많아. 그놈들이 치킨 파이란 것을 먹을 수 있을까?”
“잇몸만 있어도 드실 수 있게 부드럽게 만들어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