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37화
마케팅 일을 아예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디지털 마케팅을 주로 맡아 하는 현주임이 올린 기안을 결재하며 사인한 것밖에 한 일이 없다. 어깨너머로 십여 년간 봤으니까 그런 스타일로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백 사장의 지시를 받은 안 부장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자가용을 운전했다. 경기도 소망시까지 가는 길, 퇴근 시간이 겹치면서 차까지 막혀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아…….”
한숨이 절로 푹푹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일개 대학생에게 제과제빵 대형 오븐을 많이 사용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까. 차라리 돈으로 주겠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사기처럼 받아들일 것이다.
안영윤이 한숨을 쉬었다.
“사장님이 마아아아않이 사용해 달라고 요청하라고 하셨지.”
아니면 일반 가게나 학교에 기증하는 것을 권유하라고 했다.
‘사실 일반 가정집에 그걸 어디 놓을 데라도 있겠어?! 걔도 골치 아플 거야. 많이 써달라고 부탁하고, 어려우면 은근슬쩍 학교를 추천해.’
더군다나 그는 홍보 모델로 섭외된 것도 아니고, 단지 상품을 받은 것뿐인데 말이다.
“나라면 그냥 팔아 버릴 텐데.”
한두 푼도 아니고, 그냥 중고로 팔아 버리는 편이 훨씬 이득일 것이다. 운전대를 잡는 손에 굳은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든 이번 일은 수습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제 갓 유치원에 들어간 큰딸과, 태어난 지 백일밖에 안 된 아기의 분윳값이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전화로 이미 받은 주소 앞에 도착한 안영윤 부장이 눈을 껌뻑였다.
“……가정집이 아니라, 베이커리라고?”
안영윤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오가는 손님들의 얼굴은 밝고, 양손에 쥔 비닐봉지에는 종류별로 빵이 가득하다. 장사가 잘 되는 가게다.
‘아예…… 배송받는 단계부터 일반 윈도우 베이커리에 팔려고 각을 잡아둔 건가?’
그렇다면 협상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실패다. 안영윤 부장의 어깨가 축 처졌다.
◈ ◈ ◈
가게에 도착한 진혁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해도 자랑스러우셨던 모양이다.
“향인 대학교 실습교수 임운정.”
진혁은 소리 내어 작은 팻말을 읽었다. 빵집 간판 아래에 걸린 조그마한 팻말은 목패를 깎아 만든 것이다. 어제 들은 바에 따르면 이미 급료를 받고 일하고 있는 일봉의 경우에는 당장은 실습으로 인정받기 어렵지만, 다음 학기부터는 복학해서 실습생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일봉이 졸업한 후에는 새 실습생을 받게 될 것이다.
‘아버지도 발전하고 계시군.’
노력하고 나아가는 것은 좋다. 아버지가 올해 쉰다섯, 여섯이던가.
‘아직 젊은 나이니까. 뭐든지 할 수 있지.’
이제는 육체도 젊어졌다.
‘가까운 시일 내에 진실을 말씀드리긴 해야 할 텐데.’
아버지가, 그리고 어머니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낡은 그릇에 금이 가다가 깨져가는 것은 수없이 봐왔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라면 그저 손 놓고 세상사 전부 그렇다고 한가롭게 싯구 따위를 읊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상을 받았다고 해서 특별히 진혁의 일상에 달라진 것은 없다. 어젯밤에도 다음날 팔 예정인 반죽과 케이크를 미리 준비했다. 새벽에는 와서 당일 굽는 것이 맛있는 빵들을 구워내고, 어제 준비해둔 반죽을 굽는다. 케이크를 예쁘게 포장해 냉동고에 내놓는다. 단지 오늘은 아버지 어머니가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난 날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진혁은 익숙한 솜씨로 빵을 비닐봉지에 넣으며 생각했다.
‘일이십 년 안에는 말씀드려야지.’
건강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의 깨달음으로 환골탈태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혁보다는 빠른 속도로 노화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일반인들과 같은 속도로 늙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노화속도가 느린 무공 고수들은 가까운 사람들이 점차 나이 들고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자식과 손자, 증손주와 고손주가 모두 늙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축복이라기보다 형벌에 가깝다.
‘진희 녀석도 환골탈태를 할 필요가 있군.’
겉으로는 누나라고 불러주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동생이라 생각한다. 특히 진희보다 백 살 이상 나이를 먹어버린 지금은 더욱더 그렇다.
오전 6시가 되자 일봉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형! 오늘은 제가 가게 연다니까요.”
“오랜만에 가게 나왔는데, 뭘. 당연히 내가 하는 일이야.”
“와…… 진짜…… 조리대 청소는 또 언제 해 놓으신 거예요? 쓰레기도 벌써 비우시고.”
청소를 했다기보다 조리대에서 작업하지 않았다. 쓰레기는 아예 태워서 재로 만들어 버린 후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서 묶어 주었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별거 아냐.”
“형 같은 사장님이 세상에 어디 있어. 저 평생 고용해 주세요.”
신뢰에 가득 찬,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가 부담스럽다. 일봉이 부산스럽게 반죽을 성형하기 시작했다. 어젯밤 진혁이 만들어서 숙성시켜 놓은 반죽들이다.
“형이 만든 반죽은 진짜 깔끔하단 말이야.”
손을 씻었고 장갑도 끼었다. 일봉이 빵을 만드는 모양은 답답할 정도로 느렸지만 진혁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 정도가 일반인의 속도인가…….’
그렇다면 진혁이 하는 속도는 지나치게 빠른 셈이 된다.
‘유튜브를 보고 이 정도 속도면 된다고 생각했더니.’
대화에서는 진혁이 반죽하고 움직이고 조립하는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스피드 진혁’이라는 이상한 별명까지 붙었다. 진혁은 있는 힘껏 느리게 작업했기에 그 별명이 억울했다.
‘평범한 모습을 보였건만.’
천마강림보를 선보이지도 않았고, 마룡청섬을 뿌리지도 않았다. 잠시 대회를 돌이켜본 진혁에게 일봉이 말했다.
“녹색 농부 조합에서 형 보고 싶대요. 제안할 것도 있다고.”
“녹색 농부 조합?”
“형이 어제 말했잖아요. 농약 안 쓰는 토종 쌀이랑, 풀어 키운 소에서 짜서 직접 만든 생치즈랑 우유 전부 관심 있다고.”
관심은 있지만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다.
“벌써?”
“제가 평화 일봉 농장의 후계자 아닙니까.”
일봉이 자신만만하게 웃음 지었다.
“녹색 농부 조합에서 단체 카톡방이 있거든요. 저희 아버지도 있긴 한데, 여기 농부들이 다 젊은 애들이라서 아버지보다는 제가 더 말을 많이 해요.”
“그래서?”
“제가 형에 대해서 밑밥을 잘 깔아놨어요. 만나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그냥 치즈하고 쌀, 우유를 공급받으려는 건데, 뭘 밑밥까지 깔아.”
“아니, 아니, 아니죠.”
일봉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형 치킨 파이를 먹어 봤으니까요. 그 치킨 파이에 우리 닭이 들어간다는 사실만으로 프리미엄이 붙을 겁니다. 그 치킨 파이는 파이킹이라고 불러도 된다고요. 엄청난 물건이에요.”
“파이 뭐?”
“파이킹이요. 세상 모든 파이를 찜쪄먹을 물건이라니까요.”
진혁은 일봉이 말하면서 더 동작이 느려지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일반인은 말을 할 때 움직임을 천천히 하는 습관이 있군…….’
이것도 참고해야 할 것이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벌써 개점시간이 되었다. 다 구워진 빵들을 꺼내며 진혁이 외쳤다.
“개점한다.”
“예! 형!”
일봉이 잽싸게 나가 가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학생이 잽싸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저요! 저부터!”
“먼저 빵부터 골라.”
여러 차례 와서 낯익은 손님을 보며 일봉이 피식피식 웃었다.
“제가 뭐 먹는지 알잖아요.”
“크림슨 트리플 치즈 케이크 두 개. 그리고 블랙 앤 화이트 크림소라빵 하나?”
진혁이 끼어들었다. 중학생 김도을은 진혁이 처음 케이크를 내놓았을 때부터 꾸준히 사가던 단골손님이다. 거의 금천복 못지않을 정도로 자주 온다. 김도을이 치즈케이크를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어제는 치즈 케이크 맛이 조금 달랐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첫날 밑 준비는 진혁이 미리 해두고 갔지만 둘째 날은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극구 말렸기 때문이다. 어제는 아버지가 밑 준비를 하고 케이크를 구웠다. 겉으로 보기에도, 실제로 맛보기에도 크게 다른 점이 없었어야 했다.
‘이 녀석 보기보다 예리한데.’
진혁이 대답했다.
“오늘은 같을 거야.”
“음…….”
김도을은 잠시 파이 대 앞에 서서 고민했다. 두 사람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어차피 학교에 가야 하는 중학생이라 오래 고민하지 못한다. 아니나다를까 김도을은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치킨 파이도 두 개 주세요!”
“치킨 파이 두 개 포장까지.”
계산을 마치고 케이크와 빵, 그리고 파이까지 전부 포장한 봉투를 품에 안은 김도을은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원래 종업원들이 해야 할 말인데 도을이 하면서 뛰쳐나갔다. 이제 학교까지 빵을 안고 달려가는 것이다.
“쟤는 맨날 점심을 빵으로 먹네. 빵은 괜찮은데 케이크를 점심으로 먹는다는 게…….”
일봉이 김도을의 건강을 걱정하며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최소한 치킨 파이는 건강에 좋을 테니까.”
진혁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희 부모님께서 기른 닭이잖냐.”
“그렇죠? 저희 어머니도 원래 몸이 많이 약하셨는데, 닭이랑 녹색조합 음식들 먹고 많이 좋아지셨다고 했어요.”
일봉이 기운차게 말했다. 김도을 이후에도 여러 손님들이 밀어닥쳤고, 삼십여 분이 지난 후에야 잠시 가게가 조용해졌다. 빵들의 빈자리에 새 빵을 올려놓으며 일봉이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환경호르몬이니 항생제니 뭐니 하는 얘기가 많잖아요.”
“흠.”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녹색 농부 조합에서는 오프라인 판매만 하지 않아요. 온라인으로 서울이랑 부산, 대구랑 대전에 다 보내고 있거든요. 꾸준히 구매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아토피 아이들 엄마들이랑, 암 환자들같이 건강을 신경 쓰는 사람들이나, 5성급 호텔 같은 데서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저희도 생닭이랑 가슴살만 팔다가 이제 훈제 가슴살을 팔기 시작했거든요. 그런 가공식품이 온라인에서 잘 팔려요. 형 빵을 온라인에 입점하는 건 생각해 봤어요?”
“……빵을 온라인에서 판다고?”
“네, 케이크는 지금 당장에라도 팔 수 있을 걸요. 녹색조합에서 유통 쪽은 확실히 해주니까, 형도 큰 사장님이랑 같이 한 번 생각해봐요.”
일봉이 씩 웃었다.
“지금 가게 매출이 주에 이천 넘게 나오잖아요.”
“그렇지.”
“그 네 배는 넘게 나올걸요.”
일봉이 자기 가슴을 탕탕 쳤다.
“한번 믿어 보시라고요.”
그때 문이 열리고 헐레벌떡 아버지가 뛰어 들어왔다.
“내가 너무 늦었지? 미안하다.”
진혁이 웃었다. 환골탈태를 겪은 육체는 피로감에 젖어 알람에도 깨지 못하고 깊게 잤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악몽을 꾼 것도 아니고 몸도 가벼운데 왜 이렇게 늦잠을 잤는지 모르겠어. 숙취도 아니고.”
막 들어온 아버지를 본 일봉이 놀라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