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33화
진혁은 별달리 생각해둔 말이 없어 할 말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을 뿐이다.
“오븐을 받게 되어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텔레비전 카메라가 그런 진혁을 촬영하고 있었다. 시상식 도중, 강마리오가 바로 옆에 서 있는 진혁에게 속삭였다.
“왜 여태까지 아무 데도 나오지 않았지?”
강마리오가 분한 듯이 말했다.
“원래는 일봉이가 나올 차례인데 말이지. 걔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걔는 우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느라 바빠.”
“우리 가게? 너 벌써 네 가게를 갖고 있어? 대단하군…… 하긴, 그러니까 그 정도의 솜씨가 가능하겠지!”
“아니, 우리 가게라니까. 아버지가…….”
“벌써 아버지에게 인정받아서 가게를 물려받다니!”
“…….”
진혁은 더 이상 대화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진혁이 입을 다물었음에도 강마리오는 계속해서 떠들었다.
“네 고도의 심리적 작전은 이번에는 통했지만 다음에는 통하지 않을 거다. 다음에는 내가 재킷 위에 배낭을 메고 올 거야! 내 행운의 재킷을 빌려 입고 한 번 이겼다고 해서, 다음번까지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 좋을 거다.”
진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븐이면 됐어.’
그는 편안하게 상장과 상패, 오븐 교환권을 수여받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10장
그날 저녁, 행사가 끝나자마자 소망시로 돌아온 진혁은 적당히 가게 근처를 서성거리며 거리를 청소하고 있었다.
‘길거리에 이런 돌멩이 따위가 있으면 아버지가 걸려 넘어지실 수도 있지.’
진혁은 회귀 전, 아버지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신 후 모든 사고가 시작된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턱이 이렇게 높으면 위험할 수도 있어.’
가게 근처의 도로는 이미 청소해서 깨끗하지만 가게에서 향인 대학교 쪽으로 가는 길, 그쪽은 아직 완벽하게 청소되지 않았다. 진혁이 거리를 돌아보고 있는데 멀리, 가게 근처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븐을 받게 되어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이런 이런, 임진혁 우승자는 대단히 효자로군요!>
데코레이션 페어의 결승 장면을 보여주며 일봉이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기뻐서 팔짝팔짝 뛰고 있다.
“이겨 버렸어! 강마리오 그 자식을 이겼다고요! 와, 이 자식 완전 풀죽은 표정 좀 봐!”
광안마가 흔히 하는 표현을 빌자면 ‘자기 내장을 꺼내서 줄넘기하고 싶은 것처럼 폴짝폴짝 뛰는’ 중이랄까. 진혁은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가족들이 진혁이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진혁 선배는 정말 대단해요. 실력도 있는데 성실하고, 다른 사람들도 아끼고.”
“열심히 해주니 고맙지.”
아버지가 웃으며 일봉에게 말했다.
“만석이에게 들었는데 사실은 일봉이 나갈 거였다면서. 양보해준 거냐?”
“아니, 양보가 아니에요.”
일봉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나갔으면 완전 발렸을걸요? 진혁 선배나 되니까 압도적으로 이기고 온 거죠.”
“허허.”
“다음에 만나면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하려고요.”
진혁은 더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도록 좀 더 먼 곳을 향했다.
‘오븐 배달은 다음 주까지는 온다고 했지.’
해야 할 일이 많다. 기존에 사용하던 오븐을 처리하고, 아버지와 의논해서 우리꼬맹이밀로 어머니가 드실만한 빵도 만들어 보고, 평화 일봉 농장에서 오는 닭고기로 고기 파이를 만들 생각이다.
‘즐겁군.’
그전에도 내내 바쁘게 지냈지만 이런 종류의 바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궁가주를 비롯한 구파일방의 수뇌를 견제하고, 후계자를 선정하기 위해 적당한 녀석들을 찾아 키우고, 장로라는 놈들이 말썽부리지 않게 한 대씩 때려주고.’
중간중간에 광안마를 시켜 아랫사람들도 부리고, 혈도객에게 이런저런 일도 시키고.
‘교주님에게 적당한 부인이 있다느니 하며 헛소리하는 애들도 한 대씩 때려주고.’
피와 살인과 파괴와 서류와 서류, 그리고 또 서류가 있었다.
‘지금이 딱 좋아.’
진혁은 기지개를 켰다. 산 위에서 조금쯤 바람을 쐬다 가도 늦지 않으리라.
◈ ◈ ◈
건물과 건물 위를 뛰어다니면서 산 쪽으로 가던 진혁은 낯익은 기운을 발견했다.
‘금천복 할멈.’
사실 할멈이라고 말하기도 우습다. 진혁 자신보다 새파랗게 어린아이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진혁을 챙겨주려고 하고, 배려하려고 한다.
‘옛날 생각이 나게 만들지.’
자신의 정의가 있으며 그것을 관철한다. 명천대의 대장으로 무림맹에 잠입했던 시절, 이름 없는 무가의 후손임을 위장했을 때 그는 진철 사태의 호의를 받았던 적이 있다. 아미파의 장문 진철 사태는 꼿꼿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한미한 가문 출신인 자가 실력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명문 정파의 자제들보다 기회를 덜 받는다며 목소리를 높이셨어.’
진혁은 그 은혜를 원수로 갚지 않기 위해, 자신의 위장 신분이 죽은 것처럼 처리했다. 진철 사태는 통합 장례식에서 그의 가짜 죽음을 애도했다.
‘신세를 졌지.’
나중에 전장에서 만났을 때, 진철 사태는 일월신교의 소교주 도산검림 진혁을 알아보지 못했다. 반면에 진혁은 선명하게 치솟는 하늘색 강기를 내뿜는 아미파의 장문을 한문에 알아보았다.
‘한 번 살려 줬지.’
그리고 광안마가 엄청나게 화냈다.
‘저년이 우리 귀한 신도들을 얼마나 죽였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그 후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금천복 할매는 아무리 봐도 진철 사태와 닮았다. 품이 넓고 넉넉하며 다른 사람들을 챙긴다. 부모님과 누나, 가족이 아닌, 생면부지의 타인을 응원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올지 아닐지 계산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섣불리 화를 내지 않고 상대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서 상황을 살펴본다.
그 금천복 할매가 지금 소리높여 누군가를 꾸짖고 있었다.
기차역에서 내린 인파들이 수군거리며 금천복 할매를 곁눈질했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어디서 사람을 다치게 하고 그냥 가려고 해!”
“아니라고 했잖아!”
옆에서는 아이 어머니가 아이를 껴안고 울고 있다. 이마에 담배빵 자국이 난, 서너 살 정도 된 여자아이가 큰 소리로 울어 젖히는데 어떤 상황인지 모를 수가 없다. 금천복 할매의 손녀와 며느리, 그리고 아들로 보인다.
‘명약관화한 상황이군.’
다른 사람들은 구분할 수 없겠지만 미세한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방금 찍힌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중년 남자의 손에 들린 반쯤 피운 담배를 보면, 범인은 이 남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격렬하게 부정했다.
“내가 아니라고, 이 미친 할멈이 어디서 쌍욕 질이야!”
20대 정도로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는 담배꽁초를 무기처럼 휘두르며 으르렁댔다.
“할매 얼굴에도 담배빵 한 번 났으면 좋겠어, 어? 나는 아니라고! 난 방금 불붙였단 말이야. 저기 지나가는 저 새끼 아니야?!”
너무나 사소한 일이다. 이전의 진혁이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일. 하지만 지금 저기서 화내고 있는 사람은, 오늘 진혁을 응원하러 온 금천복이다. 벌써 몇 달째 매일같이 얼굴 보고 빵을 사 가는 단골손님이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아버지나 일봉에게 들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그녀의 아들이 행사장 근처에 산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다.
‘어떻게 할까.’
그는 아주 잠깐 고민했다. 지금 서울에서 내려온 기차가 있으니 자신이 여기에 등장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저런 놈팡이 따위에게 본때를 보여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조용히 빵을 만들면서 가게를 번성시키고, 가능하면 진희에게도 가게를 하나 차려 주고. 그 와중에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으면 좋다. 이런 평화로운 나날이 깨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아래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더 격해졌다.
진혁은 아이의 이마에 난 자국과 남자가 손에 든 담배의 끝 모양을 바라보았다. 천안투마공을 이용할 필요도 없다. 기본 시력 자체가 좋아졌기 때문에 100m 이상의 거리에서 담배꽁초 끝 모양을 판별하는 것은 진혁에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
‘이놈이 맞긴 맞군.’
진혁이 담배꽁초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담배꽁초가 붉은 궤적을 그리며 하늘로 움직였다. 담배를 든 20대 남자가 짜증 내며 담배를 든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든 것이다. 지금 이 팔의 모양으로 추측해 보건대, 아래로 내리꽂는다면 악악대는 금천복 할매의 입안에 쑤셔 넣기 딱 좋은 자세다.
어린아이와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금천복은-
“남의 소중한 단골손님을 다치게 하면 안 되지.”
진혁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담배꽁초는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날아오르더니 20대 남자의 발목에 정확히 안착했다.
“으아아아악!”
남자는 발목을 붙잡고 날뛰었다. 웅성거리고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저 남자가 애 얼굴을 담배로 지져 놓고 안 했다고 버팅기다가, 자기 발목에 셀프 담배빵을 했어.”
“바보 아냐?”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멀리서 아주 조그마한, 모래알만 한 돌을 튕겨내어 담배꽁초가 떨어지도록 조작한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쭙잖은 히어로 노릇 따위를 할 생각은 없다. 그저 지나가다가 아는 사람을 한 번 보았을 뿐이다. 진혁은 가볍게 지붕을 뛰어넘어 가게로 향했다.
“아버지.”
“진혁이 왔냐, 우리 우승자님!”
가게가 끝날 시간이다. 전표를 보고 있던 아버지가 진혁을 바라보며 외쳤다.
“축하한다!”
아버지가 자랑스러워 하며 진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잘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들어오는 오븐, 보니까 그렇게 큰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두 개 같이 쓸 수 있어요.”
“……진혁아.”
“옛날 것을 버릴 필요는 없어요. 그러니까 이참에 새것을 이쪽으로 옮기고, 두 개를 병행해서 쓰면 됩니다.”
“고맙다.”
옛 오븐을 버리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
산악회에서 어이없이 죽어버린 옛 친구에 대한 추모인지, 자신의 옛날에 대한 그리움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진혁은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을 들어드릴 생각이었다.
“네가 이길 줄 알았다.”
“해 봐야 알죠.”
아버지가 웃었다.
“외식 한 번 해야지. 그러잖아도 네가 풀어 키우는 우리 토종닭 좀 먹고 싶다고 했다며.”
‘그게 그렇게 되었나?’
“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