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30화
진혁이 웃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죠.”
“자네 여기 대회 참가자인가? 그래도 마음대로 오븐을 쓰지는 못할 텐데……. 시험 전에.”
“자, 자.”
진혁은 통밀가루를 한 봉지 집어 들고서 물었다.
“혹시 여기에 조리대로 쓸만한 곳이 있을까요?”
“그럼, 이 도마를 쓰게나. 히노끼목을 깎아 만든 건데…….”
이스트와 소금은 오면서 얻은 것이 있다. 아까는 별 필요 없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잘됐다.
“밀가루값은 선불로 드리죠.”
“아냐, 아냐. 자네가 이걸로 빵을 만들어 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아저씨가 웃었다.
“우리 밀 취급하는 사람 중에 빵을 만든다는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야. 자네같이 젊은 청년이 내 이야기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그걸로 됐네.”
밀가루 500g과 이스트 5g, 그리고 소금.
‘소금을 4g과 5g 중 어느 정도를 넣는 것이 좋을까…….’
미세한 분량 차이로도 맛이 달라질 수 있다. 진혁은 이번에는 5g을 전부 넣어보기로 했다. 생수통에 담겨 있는 500㎖의 물을 그대로 스텐볼에 쏟아부었다.
“저기 뭐야?”
“밀가루로 즉석에서 빵을 만드나 봐.”
“신기하다.”
“원래 저 밀은 글루텐이 부족해서 반죽이 잘 안 된다고 들었는데.”
누군가가 아는 척을 했다. 진혁은 최대한 신경 써서 어제보다 더 느린 손놀림으로 반죽을 하였다. 찬물을 섞으면서 약간의 양강지기를 보내어, 반죽에 좀 더 찰기가 생기도록 온도를 조절한다.
‘느리게, 느리게 해야 돼. 보통 사람처럼 해야 해.’
사실 이 종류의 통밀빵은 굳이 반죽을 하지 않아도 되는 종류다. 하지만 잘 섞이게 하기 위해서 손으로 주무르는 것뿐이다. 진혁의 손놀림을 본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가와 관심을 표현했다.
“반죽기 없이 엄청난 속도로 반죽을 하네.”
“저게 원래 저렇게 안 될 텐데…….”
우리꼬맹이밀을 이미 써봤는지 누군가가 조그맣게 중얼거렸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밀 자체에 관심을 보였다.
“이게 우리나라 토종 밀이에요?”
“예!”
“저희도 샘플을 받아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겨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배송료는 이번에 주셔야 합니다.”
몰려든 사람들은 아저씨에게 밀에 관해서 물었다. 진혁에게 빵에 관해서 묻는 사람도 있다.
“지금 여기서 구우실 거예요? 아니면 하루 발효한 다음에 내일 구우실 거예요?”
“오늘 오후에 구울 겁니다.”
랩을 씌운 빵 덩어리에서 기포를 뺀 후에, 발효를 위해 다시 올려놓았다. 진혁이 공기층을 많이 넣어둔 보람이 있어 발효는 금방 되었다.
“자네, 이거 구울 데도 없잖은가.”
걱정스러워 하는 아저씨를 뒤로하고, 반죽을 손에 든 진혁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적당히 CCTV 없는 구석에서 삼매진화로 구워버리면 되겠지.’
9장
진혁은 한 손에 반죽을 들고 사람 없는 쪽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제과용 도구와 오븐이 죽 늘어선 구역이었다. 세일즈맨 한 명이 진혁에게 아는 척을 했다.
“이 오븐은 어떠실까요? 가정용으로도, 사업용으로도 부담 없는 50L 컨벡션 오븐입니다!”
진혁이 말없이 반죽을 보여주었다. 세일즈맨이 자신만만하게 장담했다.
“이…… 이 오븐을 테스트해보시겠어요? 지금 조금 전에도 요런 빵을 한 번 구워냈답니다.”
방금 나온 작은 미니 치즈 케이크들을 보여주면서 세일즈맨이 열성적으로 말했다.
“그 반죽도 훌륭하게 구울 수 있을 겁니다.”
“에, 뭐.”
진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꼭 오븐이 필요한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쓰게 해주신다면야.”
“물론이죠! 고객님, 이건 제 명함입니다.”
오븐 팬 위에 진혁의 반죽을 올린 세일즈맨이 웃으며 말했다.
“이 팬도 저희가 이번에 새로 낸 신상품입니다. 제가 아침에 번쩍번쩍하게 닦아 놨으니 위생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흠.”
위생 문제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고열의 양강지기로 자가 살균을 할 작정이었던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시간은 어떻게 할까요?”
“제가 맞추죠.”
진혁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사실 온도는 중요하지 않아.’
다이얼을 돌리며 진혁은 조심스레 극미량의 진기를 빵 안쪽으로 보냈다. 처음 접하는 재료이니만큼 성질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오븐 안에서 적절하게 진기가 순환하며 빵이 골고루 부풀어 오르며 공기를 품게 만들어줄 것이다.
“10분밖에 안 구우십니까?”
세일즈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까 저쪽에서 직접 하신 반죽이십니까? 재료는…….”
“통밀입니다.”
“통밀빵이면 이 온도라면 20분에서 30분은 굽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고객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할 말은 하는 세일즈맨이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이건 조금 특별한 반죽이라서요.”
“그렇습니까.”
세일즈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대회는 잘 봤습니다. 초콜릿 드래곤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요.”
진혁은 순간 머쓱해졌다.
“비늘을 하나하나 만드는 게 그 시간 내에 불가능할 텐데, 장식 솜씨도 장난이 아니고. 초콜릿에 고추라니! 맛에 대한 센스까지 있으셔서 감동했어요.”
세일즈맨이 감격한 눈빛으로 말했다.
“가시기 전에 사인 한 장만 해주고 가시죠.”
“사인이라니.”
내민 A4용지와 매직을 받은 진혁이 당황했다. 매일같이 결재 서류가 올라오던 옛 시절이 떠오른다.
“여기 있습니다.”
‘교주라고 쓸 뻔했다.’
진혁(眞赫), 참 진에 빛날 혁.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휘갈겼을 뿐이다.
“글씨도 잘 쓰시네요. 혹시 서예도 하셨어요?”
“아닙니다.”
“역시 그 용 모습을 볼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한 분야에서 최고인 사람은 다른 분야에서도 최고인 법이죠.”
“…….”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오븐이 띠링! 하고 울렸다.
“다 됐군요.”
먹음직스러운 빵의 향기가 솔솔 풍겨 나온다. 세일즈맨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결승전 준비용 빵이세요?”
“아니요, 저쪽에 있는 우리꼬맹이밀로 테스트 겸 만들어 보는 겁니다.”
세일즈맨이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맛…… 볼 사람은 필요 없으세요?”
세일즈맨의 얼굴을 바라본 진혁이 피식 웃었다. 열망에 가득 찬 눈동자에는 오직 빵만이 가득 담겨 있을 뿐이다.
“조금만 잘라 드리죠.”
“카, 칼이 없는데.”
두리번거리면서 칼을 찾는 세일즈맨을 진혁이 제지했다.
“칼은 필요 없습니다.”
진혁은 손날로 가볍게 빵을 네 갈래로 절단했다. 굳이 강기를 사용할 필요도 없이 맨손으로도 깔끔하게 빵은 자를 수 있다. 사실 빵집에서도 일봉이나 아버지가 볼 때가 아니면 거의 칼을 사용하지 않는다.
거친 식감이 살아날 수 있게 기포가 많은 빵 단면이 깨끗하게 잘려 보인다. 그 단면을 본 세일즈맨이 놀라워했다.
“우와! 정말 칼로 자른 것처럼 깔끔하게 잘리네요. 이 정도면 정말 칼이 없어도 되겠습니다. 손재주에 서예에, 손날 칼까지 못하시는 게 없네요.”
세일즈맨이 빵 한 조각을 조심스레 맛보았다.
“이건…….”
“어떻습니까?”
“너무…….”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었다.
“이 일을 하길 잘했습니다.”
“예?”
갑자기 너무 멀리 나갔다. 세일즈맨이 황급히 정정했다.
“제가 팔고 있는 오븐으로 이런 맛이 나는 빵이 구워지다니, 아니 물론 고객님께서 훌륭한 솜씨를 가지셔서 그렇지만요. 저도 너무나 자랑스럽네요. 제가 행복해지는 맛입니다. 그만두지 않고 회사 다니길 잘했어…….”
열심히 이야기하더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회상을 하고 있다. 진혁이 가볍게 묵례했다.
“오븐을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오늘 대회도 이기세요. 결승도 꼭 구경하겠습니다.”
세 조각의 빵을 가지고 돌아온 진혁은 우리꼬맹이밀 앞에 빵을 내놓았다. 조그맣게 톡톡 잘라내 시식용 빵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게 조금 전에 만든 빵인가? 어디서 구웠어?”
“컨벡션 오븐 회사에서 오븐을 빌려주고 싶어 하더라고요.”
“수완이 좋구만.”
아저씨가 감격하며 빵을 받았다.
“이게 우리꼬맹이밀로 만든 빵이란 말이지…….”
빵에서 풍겨 나오는 감칠맛 나는 향기! 그윽하고 고소하며, 가을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다. 아저씨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내가 먹어봐도 되나?”
“당연하죠.”
그러고 보니 직접 맛을 보지 않았다. 진혁도 조금 떼어서 한 조각을 입에 넣어보았다.
“나쁘지 않군요.”
“나쁘지 않아?!”
아저씨가 탁상을 탕하고 쳤다. 작은 빵조각들이 튀어 올랐다.
“나쁘지 않다니! 이 빵은 아주 환상적이야, 빵의 격변이라고!”
아저씨의 눈가에 눈물이 언뜻 비쳤다.
“이 밀이 원래 우리 건데, 일본하고 미국에서 빼가려고 했던 걸 아나?”
“예에?”
“일제 강점기 시절에 우리꼬맹이밀을 가져가서 일본에서도 개량해서 쓰고, 미국 농학자가 그 밀을 또 개량했어. 그리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서 노벨평화상을 타기도 했다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식량 증산에 대해 큰 공을 세웠다고 노벨평화상까지 탔어! 우리 밀이 큰 역할을 한 거지.”
진혁이 묵묵히 들어주자 아저씨, 김금관이 명함을 내밀며 진중하게 말했다.
“내 아버지 대에 홍수가 들이닥쳤을 때도, 땅문서고 뭐고 다 포기하고 머리 위에 씨앗을 이고 지고 가서 구해낸 종자야. 모닥불 피워 말려서 간신히 종자를 살려냈지. 다른 집 종자는 전부 홍수에 쓸려가고, 구해낸 것들도 전부 썩어버려서 우리 집 것만 남았어. 하마터면 일제가 개발한 개량종만 남을 뻔했지.”
“네.”
“요즘 사람들은 밥보다 빵을 더 좋아한다니, 이 밀로 빵을 만들면 더 판로가 늘어날 거야. 단백질 함유량이 적어 건강한 밀이니까.”
진혁은 가득한 밀가루 상자들을 내려보았다. 통밀과 일반밀, 국수와 누룩, 미숫가루와 통밀까지. 다양한 밀 제품이 촌스러운 포장에 싸여 가득 놓여 있다. 아저씨가 눈가를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울지 않으려고 하는 듯, 눈가를 한껏 찌푸렸다.
“지금 이 빵에서는 노벨평화상 맛이 나.”
‘그게 무슨 맛이지.’
“……아, 예. 저도 이 밀가루를 조금 주문하려고 하는데요.”
“주문은 무슨! 이런 맛으로 빵을 만들어 준다면 내가 자네한테 빵을 만들어 달라고 갖다 바쳐야지. 내가 은혜는 아는 사람이야. 어디서 돈을 주려고 해.”
진혁이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빵의 진한 향기는 조금씩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아까 그 반죽을 구워 오신 거예요?”
아까 와서 반죽을 구경하던 남자다.
“시식용인가요? 먹어도 되지요?”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여대생이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여러 사람이 다가와 순식간에 복작복작해졌다.
“자, 자. 한 줄로 줄을 서세요.”
많은 손님들을 대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진혁이 인파를 정리했다.
“한 조각씩만 드셔 보세요. 우리꼬맹이밀로 설탕, 버터, 우유 없이 만든 통밀빵입니다.”
“여기 청년이 방금 만든 빵이요! 맛있소, 아주, 아주 맛있소!”
아저씨가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