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29화
‘어라, 일부러 떨쳐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약한 현대인이란.
‘이렇게 천천히 걸어가는데도 따라오지 못한다니.’
행사는 생각보다 크고 부스가 많았다. 데코레이션 페어는 아주 작은 부분이다.
‘학교에서 추천받은 대학생들만 나갈 수 있다고 해서 조그만 동네 대회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빵용 재료와 도구, 포장재료와 초콜릿 커버춰, 업소용 기계별로 항목이 나뉘어 있다. 진혁은 업소용 재료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객하던 여자가 진혁을 바라보며 외쳤다.
“여기 인스턴트 이스트 한 번 보고 가세요!”
‘인스턴트 이스트라니, 꼭 인스턴트 생라면 같잖아.’
드라이 이스트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사용해 본 적은 없다. 아버지는 항상 생 이스트를 선호하셨다. 진혁은 여자가 권유하는 인스턴트 이스트를 힐긋 보면서 걸어갔다.
‘나름대로 장점은 있군.’
생 이스트보다 보관이 편하고, 사용하기도 쉽다. 알록달록한 마카롱 코너와 울긋불긋한 투명박지와 유리병, 길고 짧은 레이스 리본들이 가득한 포장 코너를 지났다.
‘우리 가게의 포장이…… 촌스럽군.’
여태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그냥 빵을 맛있게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진혁은 유리병과 갈색 빵 봉지, 그리고 투명박지 브로셔를 하나 집어 들었다.
“오늘 대회 출전하시는 쉐프님이십니까. 어느 대회 나가시죠?”
양복을 입은 판매사원이 브로셔를 한 장 더 주면서 밝게 웃었다.
“……데코레이션 페어.”
데코레이션 페어는 대학생들만이 나가는 대회다. 판매사원의 미소가 조금 사그라들었다.
“학생이시군요…….”
학생인 게 무슨 상관이지? 진혁은 부스 위의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대용량 도매 전문’이라고 쓰여 있다. 판매사원이 설명했다.
“저희가 소규모로 판매를 할 수가 없게 되어 있거든요. 죄송해요.”
직원은 바구니를 뒤지더니 주섬주섬 샘플을 집어 들었다.
“여기 정제소금하고 이스트 샘플인데, 이것도 저희 회사에서 취급하는 거예요. 5g씩인데 이거라도…….”
포장지를 보러 왔는데 소금과 이스트를 주다니? 진혁은 지금 가게에서 쓸 대용량을 생각하며 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판매사원은 무례하지는 않았으나 친절하지도 않았다.
‘굳이 여기서 살 필요 없지.’
그때 뒤에서 낯익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잡았…… 다!”
강마리오는 진혁을 잡으려 했지만 부스의 입간판을 붙잡았다. 순간 균형을 잃은 간판이 휘청이고 강마리오가 함께 균형을 잃었다. 지금 이대로 넘어진다면 틀림없이 오른손목을 삐어 버릴 것이다.
진혁은 아주 잠깐 고민했다.
‘이걸 잡아줘야 하나.’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흘러간다. ‘부상 때문에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경운대, 향인대에 패배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진혁은 가볍게 손을 뻗었다.
강마리오의 몸을 직접 건드릴 필요는 없다. 허공섭물은 고강한 내공을 가진 자가 실제로 접촉하지 않고 물체에 간섭할 수 있는 힘이며, 반죽을 하거나 재료를 섞거나 블루베리 껍질을 벗기는 등 다양한 데에 이용하고 있다.
‘물론 무림에서는 그런 용도로 사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지만.’
조금 전까지 비틀거리며 입간판과 함께 넘어질 뻔하던 강마리오는 놀랍게도 균형을 되찾고서 스스로 얼떨떨해했다.
“조금 전에…… 날 잡아준 게 너야?”
강마리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뒤돌아서 물었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
강마리오는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판매사원이 강마리오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유튜브 방송하시는 강마리님이시죠?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조금 전에 진혁을 대하던 것과는 180도 다른 태도다. 사무적인 친절함에서 정말로 기뻐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방송의 홍보 효과인가.’
진혁은 잠시 자신이 방송을 한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았다.
삼매진화로 반죽을 구워내고, 허공섭물로 재료의 껍질을 벗기는 모습을!
‘……의외로 괜찮을지도 모르겠는데?’
실제로 보여준다면 의심하면서 믿지 않겠지만, 방송한다면 콘텐츠가 될지도 모른다.
‘훌륭한 CG라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그런 광대놀음은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건 박력분 샘플인가…….”
진혁은 다섯 개의 부스 중, 제일 왼쪽에 있는 밀가루 업체를 방문했다.
총 여섯 개, 찻잔 받침 같은 크기의 접시에 샘플로 나와 있는 밀가루를 들여다보며 하나씩 비교해 보았다.
“어떤 게 타입 55 밀가루죠?”
유럽산 밀가루는 한국과 달리 강력분, 중력분, 박력분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프랑스산 밀가루의 경우 타입 45인 단백질 10%의 밀가루를 박력분, 타입 55인 단백질 11.5%가량의 밀가루를 중력분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보는 중력분과 단백질의 함량이 다르기 때문에 결과물이 미세하게 달라질 수 있다. 전부 아버지가 가르쳐준 것들이다.
“제과용으로 찾으시나요?”
여사원이 웃으며 레시피 표를 내밀었다.
“프랑스산 밀가루를 많이 써보셨나 봐요.”
“책으로만 봤습니다.”
“제일 좋은 건 원하시는 질감이 나올 때까지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시는 거예요.”
여사원은 표를 짚어가며 하나씩 설명했다.
“타입 45와 타입 55를 비율대로 섞어서 만드시고자 하는 질감에 가장 가까운 것을 만드시면 됩니다. 기존의 중력분과는 다른 식감을 만드실 수 있어요. 여기 저희 밀가루로 만든 샘플 빵도 있는데, 드셔 보시겠어요?”
여사원이 작은 냉장고에서 꺼낸 과자빵을 내밀었다. 진혁은 잠시 망설였다.
“저희가 오늘 아침에 구운 거예요.”
레시피까지 함께 손가락으로 짚어 주며 자신 있게 여사원이 말했다.
“드셔 보시면 저희 밀가루를 주문하시게 될 거예요.”
이런 종류의 자만심은 싫어하지 않는다. 진혁은 빵을 한 입 맛보았다.
“탄력부터 다르군요.”
프랑스어로 적혀 있는 신문에 감싸져서 나온 과자빵은 감칠맛이 나며 바삭바삭했다. 신문 기사에는 바게트빵과 동양인이 함께 나온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을 진혁이 힐긋 바라보자 여사원이 설명했다.
“저희 밀가루는 원래 주로 프랑스에서 납품해요. 이 빵집은 23회 파리 바게트빵 대회에서 수상한 빵집이에요. 한국계 이민 2세대 요리사가 저희 밀가루로 만든 바게트빵이 1등을 했답니다.”
“한국에도 납품하고 계십니까?”
여사원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소곤소곤 속삭였다.
“원래 말하면 안 되는데……, 잘생겼으니까 특별히 이야기해 드릴게요. 강남에 있는 아드레아노 존부의 디저트 팩토리에서도 저희 밀가루를 써요. 어차피 배합 비율도 공개하지 않지만, 납품하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건 모를까 저희한테서 밀가루 받는 걸 공개적으로는 알리지 말아 달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러니까 손님도 비밀로 해주세요.”
진혁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똑같이 만들었는데도 같은 맛이 나오지 않았던 것. ……재료부터 달랐기 때문이군. 역시.’
갤럭시 치즈 케이크의 맛을 재현하는 실마리다. 진혁은 바로 55번과 45번, 75번 밀가루를 짚었다.
“알겠습니다. 샘플로 이것과 이것, 이것을 각각 5㎏씩만 부탁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어디로 보내드리면 될까요?”
“여기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주문을 마치고 나서 둘러본 다른 가게들도 나쁘지 않았다.
‘가끔은 이런 데도 와볼 만하군.’
평상시에는 계속 밀가루를 받던 업체에서 받아오기만 했으니, 바깥에서 고를 수 있다는 것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진혁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프랑스산 밀가루는 미네랄의 함량이 높고 식감이 거친 빵을 만드는 데에 좋지. 하지만 우리 집은 도정한 미국산 소맥 밀가루를 받고 있어.’
닭고기는 중원에서 맛보던 것과 한국에서 맛보던 것의 맛 차이가 컸다. 품종 차이도 있겠지만 그보다 대량 사육방식과 기존에 풀어 키우던 방식 차이가 크게 느껴졌다. 평화 일봉 농장에서 받아서 구워 본 닭의 맛은 중원에서 먹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살결부터 쫄깃하고 씹기에도 좋고, 이상한 약 맛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어.’
진혁처럼 미각이 예민한 이가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도 드실 테니까. 이왕이면 몸에 좋은 재료를 쓰고 싶지.’
닭고기의 예시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미국에서 수입해온 밀가루보다 우리 땅에서 농약 없이 재배한 밀을 써 보고 싶다.
‘우리 밀은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저쪽에 초라한 부스가 하나 보였다. 프랑스와 미국, 일본과 독일산 밀가루 부스가 반짝반짝하고 깨끗하며 줄이 죽 늘어서 있는 것에 비해서 초록색 줄무늬 차양이 쳐진 그 부스에는 제목도 뭣도 없었다. 옆에는 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더 창고처럼 보였다.
“실례합니다.”
“어서 오시오.”
주름 깊은 얼굴을 한 중년 아저씨가 반겼다.
“국산 밀입니까?”
“그렇죠.”
아저씨가 주섬주섬 검은색 비닐봉지를 꺼냈다. 비닐봉지 안에 담긴 밀은 입자가 곱고 희었다.
“우리꼬맹이밀은 외국 밀보다 글루텐 함량이 낮아요. 점성이 떨어지지. 반죽이 어렵긴 한데, 그만큼 소화에는 좋아. 당뇨에도 좋고, 우리나라 사람에게 딱 좋은 밀이야.”
“이름이 꼬맹이네요.”
“수입 종자 밀에 비해서 키가 절반 이상 작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소. 기원전 삼백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던 밀인데.”
아저씨가 슬픈 얼굴을 했다.
“내가 충남 아산에서 올라왔는데…… 삼대째 우리꼬맹이밀 농사를 짓고 있어요. 솔직히 미국에서 배 타고 들어오는 싼 밀이랑 경쟁하면 너무 비싸. 맨날 우리 밀을 사 가던 사람들이 나이 들어 자식 대로 넘어가서는 우리 밀을 안 들여와. 농사짓다 이런 게 있다고 해서…… 밀을 싸짊어들고 올라왔는데, 뭐.”
그는 북적북적한 사람들로 가득한 수입 밀 유통사 쪽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삐까번쩍하게 비닐도 씌우고, 포장도 만들고, 사람도 좀 부르고 했어야 하는 건데. 저런 생각을 못 했어. 나 같은 촌놈이 뭘 한다고……, 휴.”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 아저씨에게서는 고집쟁이의 냄새가 났다. 오직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진혁 자신은 가족들을 생각하며 버텼고, 혈도객은 예와 의를 다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검에 미쳐 있던 남궁가의 노인네에, 창에 충분히 미치지 못한 하북 팽가의 애송이까지. 광안마는 복수를 바라보았다. 사랑만을 바라보며 살아오던 사람도 있다.
현대에 함께하는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작은 빵집이란 공간에 매달리고 계시고, 어머니는 자식들을 소중히 여기신다.
이런 사람은 싫어하지 않는다.
“빵집에 납품하신 적은 있으십니까.”
“요즘 이걸로 라면이랑, 국수를 만들어 보려고 하고 있긴 한데…….”
“흐음…….”
진혁이 잠시 생각했다.
“제가 이걸 써 보고 싶긴 한데, 어떤 빵이 제일 좋을지는 여러 번 만들어 보면서 시제품을 해 봐야 알아요.”
“그렇지.”
늙은 아저씨의 어깨가 축 처졌다. 순식간에 십 년은 더 나이를 먹은 모양새다. 젊은 청년이 와서 관심을 보여 준 것에 기뻐하던 바람이 꺼지니 폭삭 늙어 보였다.
“그러니 만들어 보죠.”
“……에?”
“이쪽에 이 상자, 이건 통밀가루죠?”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봉투 안에 든 건 전립분이야.”
쌀이 현미와 백미로 나뉘는 것처럼, 밀가루 역시 통밀가루와 백밀가루로 나눌 수 있다. 도정을 더 한 백밀가루보다 통밀가루 쪽이 더 밀의 영양분이 높으며, 당지수도 낮다. 당지수는 음식을 먹은 후 소화되어 혈액 중의 포도당으로 바뀌기까지의 시간을 수치로 표시한 의학적 지표이다. 진혁은 당뇨 위험군이 되었다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말했다.
“재료는 다 있으니 여기서 바로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아까 얻었던 5g짜리 이스트와 5g의 소금.
“오븐이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