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26화
진혁은 곧 집에 도착했다. 이번에 진혁을 맞이한 것은 진희였다.
“진혁아! 오늘 집에 오기로 했다며, 진짜 왔네. 시험은 잘 봤어?”
“오기로 했으니까 왔지. 별거 아냐.”
집에 너무 빨리 와버려서 시간이 맞지 않아, 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아예 동네를 몇 바퀴 돌고 왔다. 진혁이 방금 들은 말을 정정했다.
“시험이 아니고 대회야.”
“6:1로 예선 통과했다며, 어떤 거 만들었어?”
진혁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용.”
“요옹?”
“승천하는 용.”
“케이크나 과자 같은 거 만드는 대회 아니야? 도대체 무슨 재료로 그런 걸 만들어, 말이 돼?”
“어제 초콜릿 공예를 배워서 그걸로 해 봤지.”
“나날이 발전해 가는구나.”
진희가 감탄했다.
“너 진짜 이런 식으로 발전해 나가는 걸 보니 무섭다, 야.”
“뭐가 무서워?”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너무 열심히 사니까, 내가 뒤처지는 것 같은 두려움?”
“흐음.”
“스무 살 때는 진짜 내가 뭐든지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요새 일하다 보면 그렇지만도 않더라고.”
진희가 한숨을 쉬었다. 잠시 머릿속으로 진희의 근무표를 떠올려 보던 진혁이 말했다.
“그러는 누나야말로 오늘 원래 집에 올 계획이 아니었잖아?”
“너도 중요한 대회가 있고, 엄마가 고양이 때문에 너무 걱정하시길래 볼 겸 해서 한번 와 봤지.”
진희가 말했다.
“그런데 고양이는 아주 괜찮아. 아까 동물 병원 다녀왔는데 어미에게 버려진 이 나잇대 새끼 치고 정말 건강하다고 하더라고. 어머니는 바로 숨넘어갈 것처럼 얘기하시면서 아주 걱정하시던데, 진짜 다행이야.”
“아, 진호?”
“응.”
진혁은 거실 책장을 바라보았다. 아기고양이는 마루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상자 속 수건에 몸을 묻고 잠들어 있었다. 고양이는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진혁은 희미한 기억 너머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평소에 동물 주워 오면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뭐라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뭐라고 하지 않으시더라.”
“이름을 진호라고 지었으니까.”
“……? 진호라는 이름에 무슨 의미가 있어?”
진희가 진혁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거냐?”
“뭔데.”
진혁이 진중하게 물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자 그 위압감에 진희가 멈칫했다.
“너도 들은 적 있잖아. 너랑 나 다음에 태어날 뻔했던 동생. 그때 아이 이름을 진호라고 지을 예정이었다고 들었어.”
“…….”
“들으니까 기억나지? 여튼, 너랑 고양이랑 다 잘 있는 거 확인했으니까 난 간다. 부모님께 안부 전해 줘.”
진혁이 말했다.
“고민 있어서 이리 온 거 아냐?”
“그런 거 없어.”
“아닌데, 얼굴에 딱 고민 있어요 라고 쓰여 있는데.”
“자식이 군대 갔다 오더니 눈치만 빨라져서.”
진희가 피식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묻지 않아 줬으면 하는 눈치에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으면 됐어.”
진희가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나 간다.”
“그래.”
이 ‘알았어.’는 진혁이 ‘네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았다.’라는 뜻이다.
‘직접 말 안 한다면 다른 방법이 있지.’
어머니에게 물어보면 된다.
‘나한텐 말 안 해도 어머니에겐 말하니까.’
가족들이 자리를 비운 후, 모처럼 아무도 없는 시간이다. 현관에서 대화를 마치고 진희를 배웅한 후 집 안으로 들어간 진혁을 맞이한 건 작은 울음소리였다.
“야아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옹.”
조그마한 털뭉치처럼 보이는, 작은 고양이다.
“네가 있구나.”
고양이는 쪼르르 달려와 진혁의 가까이에 다가오더니 발목에 얼굴을 비볐다. 고양이를 안아 든 진혁은 그 작은 무게와 보드라운 감촉에 조금 놀랐다.
“어제는 그렇게 개털이더니, 하루 만에 나아졌구나.”
고양이에게 진기를 조금 불어넣어 주고 진혁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제 홀로 무공을 수련할 시간이다.
‘이곳에서 오히려 탈마의 수준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암천심법을 시행하며 대주천을 한다. 강렬한 기의 흐름이 단전에서부터 용출하여 전신을 파도처럼 달린다. 임맥과 독맥은 이미 뚫린 지 오래다. 현대의 기가 희박한 만큼 자신의 육체에 담긴 내공의 양이 더 많게 느껴진다. 사실은 이전의 팔 할 수준에 겨우 달하는데도.
진혁은 본래 압도적인 내공의 양으로 승부하는, 정파의 수제자 같은 타입이 아니었다. 부족한 내공을 사용해 세밀하고 정교한 초식과 예민한 기감,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승부했다.
원래 현대에서 기감 따위 없이 살아왔던 그는 기가 풍부한 세상에서 태어나 넘쳐나는 자연지기를 몸에 받아들이며 살아온 다른 이들에 비해 극소량의 기도 놓치지 않고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기가 더 내공수련에 적합할 수도 있지.’
진혁은 도가의 일원처럼 자연지기를 받아들여 자신의 힘으로 수련하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혼에서 출발하여 피와 뼈, 거죽 속에서 흐르는 기를 가졌다.
‘급하다고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체하지.’
뇌호혈에서 백회혈로, 대주천이 끝난 후 진혁은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좋아. 백 일까지 필요 없다. 이제 이 얼굴로 고정이군.’
거울 안의 진혁은 이전보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골격이 커졌으며 눈코입의 비례가 정확하다. 무림에서 입었던 육체와 얼굴부터 다르지만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같다.
‘이제는 이 얼굴과 유사한 얼굴 모습으로 조금씩 바꿔가면서 보이게 해야지.’
진혁은 옷매무시를 가다듬고서 방 밖으로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외모가 달라진 것에 대해서 엉뚱한 오해를 할 수 있어. 말투나 행동거지도 같이 달라졌는데 외모까지……. 진짜 진혁이 아니라고 의심할 수도 있지.’
진혁은 다짐했다.
‘앞으로 두 달 정도는 확실히 얼굴에 신경 쓴다.’
“니야아아오오오오오옹.”
방 밖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던 아기고양이, 진호다.
“뭐냐.”
진혁을 본 고양이는 조금 전보다 약간 더 생기 있어 보인다. 항렬자까지 맞추어 이름 지어준 녀석이다. 죽으면 어머니가 슬퍼할 것이다.
‘사실 죽어버리면 근처에서 비슷한 녀석으로 대충 데려다 놓을 생각이었지만.’
진혁은 고양이를 집어 들고, 극미량의 진기를 흘려보내 주었다.
‘이 정도면 어머니가 일 나간 사이에 픽 죽어버리지는 않겠지.’
아기고양이는 죽은 듯이 호흡을 멈추었다.
“……설마?”
진혁은 진기를 조금 더 불어넣어 주었다.
우드드드드드득!
얄팍한 털가죽이 경련한다. 거친 털이 빠져나가며 어린 털이 새로 솟아오른다. 얇고 가느다란 뼈가 움직여 최적의 위치로 이동한다. 진혁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오래 살다 이런 건 또 처음 보는군.’
그렇게 치면 사실 동물 따위에게 극미량이라도 진기를 불어넣어 준 적이 없긴 하다.
“짐승이 환골탈태하는 데에는 진기가 많이 필요 없군…….”
떨떠름하게 방금 알게 된 사실을 입 밖에 냈다.
어머니 손바닥의 절반만 하던 고양이는 이제 진혁이 손의 절반 정도는 되게 커졌다. 하지만 크기는 여전히 작은 그대로다. 기껏해야 1.2kg에서 1.5kg이 안 될 것이다.
아기고양이가 발딱 일어났다.
독한 냄새가 풍기는 검은색 물과 빠진 털들을 앞발로 덮으려는지 장판을 벅벅 긁는다. 진혁은 물걸레로 바닥을 훔치고서 고양이를 불러 보았다.
“진호야.”
시험 삼아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 보니 고양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혀를 집어넣은 것을 잊어버리고 맹하니 혀를 내놓은 채 파란 눈동자를 초롱초롱하게 뜬다. 진혁은 문득 궁금해졌다.
‘아무렇게나 불러도 대답하는 건가? 아니면 자기 이름에만 반응하는 건가?’
“광안마.”
다시 한 번 불러 보는데 자기 앞발을 핥으며 딴짓을 한다.
“혈도객.”
고양이는 한쪽 다리를 추어올리더니 다리 사이, 꼬리 아래에 있는 분홍색 항문을 핥았다.
“진희야.”
“야옹!”
고양이는 고개를 발딱 들더니 자그마하게 한 차례 울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군.”
진혁은 고양이를 힐끔 바라보았다.
“진호야.”
자기를 부른 것을 안다는 듯이 와서 진혁의 발목에 다시 얼굴을 비빈다.
“…….”
진혁은 고양이를 안아 올려 얼굴과 손발을 꼼꼼히 살폈다.
“털이 부드러워졌어.”
고양이가 환골탈태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다.
‘일단 고양이가 환골탈태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고.’
벌모세수(伐毛洗髓)를 해줄 수 있을 정도의 고수가 일개 짐승 따위에게 해줄 리가 없으니 여태까지 알 수가 없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네 복이지.”
신기하다는 듯이 털을 쓰다듬던 진혁이, 손을 멈추었다.
“얼굴 생김도 약간은 변했고. 털 무늬도 조금 달라졌고.”
진혁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고양이가 기분 좋다는 듯 가르랑거렸다.
“이거, 내 얼굴뿐만 아니라 고양이가 바뀌었다는 의심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건가…….”
전에는 매일같이 황사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식사를 할 때마다 얼굴을 숙여왔다. 하루에 반 각 정도, 집에서 약간 다른 얼굴로 보이게끔 조금씩 겉모습이 변해가도록 조정해와서 이제는 자신의 낯을 완전히 드러내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얼굴이 변한 것 같다고 하지만 다들 알아서 성형수술이라도 했나보다 하고 이해하는 듯싶다.
"내가 성형 수술을 했다고 멋대로 착각하는 건 상관없는데."
설마 고양이를 데리고 성형 수술을 받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양이 성형 수술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모르겠다.
"흠, 이걸 어쩐다.'
진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는 폴짝 뛰어올라 진혁의 어깨 위에 앉았다. 뺨에 콧잔등을 비벼오는 작은 동물을 보며 그가 한숨을 쉬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그는 고양이를 안아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머니가 믿어줄 때까지 계속 우겨보는 거지."
◈ ◈ ◈
한편, 가게에서는 아버지가 이제 막 퇴근하고 돌아온 어머니를 맞이하고 있었다.
“여보, 여기에는 웬일이야?”
“오늘은 진혁이도 대회에 나갔고, 손이 필요할 것 아녜요. 다행히 주인아주머니가 오늘은 한가하니까 일찍 가라고 하더라구요.”
“안녕하세요, 사모님.”
“네가 진혁이 학교 후배라던 아르바이트생이니?”
일봉이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여보, 이것 좀 봐.”
“이건……?”
냉장실을 꽉꽉 채운 하얀 덩어리들! 진혁이 미리 만들어 놓아 숙성되고 있는 반죽이다. 가득한 반죽을 본 어머니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어머. 이게 다 뭐예요? 설마 반죽이에요?”
어머니가 놀라면서 냉장고를 하나씩 열어 보았다.
“이게 이틀 치 양이야? 요즘 진짜 잘 팔리는구나.”
오랜만에 가게에 들른 어머니가 감탄하는 동안 아버지가 말했다.
“이틀 치는커녕 일주일은 판매해도 될 것 같아.”
“우리 진혁이가 정말 큰 사람이 됐네요.”
“그렇지, 대단하지. 이걸 언제 다 만들어놨나 몰라. 대회 전날에 그, 자네도 알지? 만석이가 와서 몇 가지 팁을 가르쳐준다고 했는데. 그것도 순식간에 흡수해 버리더라고.”
아버지가 흐뭇하게 말했다.
“만석 씨가 교수로 있어요?”
“진혁이 다니는 데에서 진혁이를 담당하고 있었나 봐. 군대 갔다 오더니 애가 아주 다른 사람이 됐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더라.”
“사실 보내면서 마음을 졸였는데…… 마음이 좋지만은 않아요.”
어머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혁이 걔가 원래 얼마나 순하고 여렸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책임감 강하고 부모님을 먼저 생각하는 애가 됐는지. 당신도 알잖아요. 철이 단단한 건 불에 달구었기 때문이고, 빵이 익은 것도 오븐에 넣었기 때문인걸.”
“왜 진혁이를 담금철에 비교하고 그래.”
아버지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손을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