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25화
8장
“B팀 시작합니다. B-1번, B-2번, B-3번…….”
보조 위원이 번호를 호명하였다.
“지금부터 2시간입니다!”
벨이 울리고 다들 작업을 시작했다. 진혁은 바로 재료를 가져와서 초콜릿 커버춰를 중탕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한순간, 그는 향을 내기 위해 자극이 강한 채소를 한 줌 집어 초콜릿에 섞었다.
다른 출전자들이 부산스레 반죽을 시작하거나 고기를 썰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스텔라 위스커스, 호주 베이킹 협회의 부회장으로 현재 초빙받아 온 페이스트리 쉐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너무 흔한 발상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던 여자다.
“저 3번, 저 남자는 뭘 하려고 하는 걸까요?”
“초콜릿으로 뭘 하려나 본데. ”
“아, 이제는 와플을 굽고 있군요. 초콜릿과 와플? 뭘 하려는 걸까요.”
진혁은 길게 구운 와플을 여러 겹 빠르게 쌓아 올려 거대한 뱀의 뼈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어냈다.
심사위원, 아드레아노 존부가 눈썹을 찡그렸다.
“저렇게 하면 무너질 텐데. 저 출전자는 중력에 대한 개념이 없나? 무게 생각 없이 저렇게 막 올리게?”
무너지지 않는다. 진혁의 초감각은 이 와플 조각이 2g의 초콜릿을 지탱할 수 있는지, 3g의 초콜릿을 지탱할 수 있는지 알려주고 있다. 이 정도라면 굳이 강기를 그물로 쳐서 초콜릿을 지탱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이다.
얇은 초콜릿 비늘을 위에 올리고 있던 진혁이 심사위원의 목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뭐야. 일반인들은 이 정도도 못 하는 건가?’
일부러 강기를 쓰지 않고 조심해가며 느리게 하고 있는데, 어디까지 서툰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건가?
‘일봉이는 이렇게 하면 역시 작은 사장님이라고 하면서 박수를 쳐 주던데.’
진혁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일반인의 동체 시력을 고려한 느린 속도로 용의 입과 혀, 뿔과 수염을 만들어낸다. 오돌토돌하게 돋은 등의 비늘을 섬세하게 하나씩 정확하게 빚어나간다.
“B-3번이 만들고 있는 건 뱀? 아니야. 용이로군.”
“하지만 와플과 초콜릿은 너무 평범한 조합이야.”
“데코레이션 능력은 확실하군요. 그렇지만 맛이 없으면 탈락이에요.”
“이제 30분. 과연 만들 수 있을까.”
심사위원과 관객들 모두 진혁에게 시선이 가 있다. 집중해서 자신의 음식을 만들고 있던 다른 참가자들도 힐끔 진혁을 바라보았다.
◈ ◈ ◈
‘뭐야, 저 속도. 미친 거 아니야?!’
아산에서 올라온 28살 김은동.
직업군인으로 살려고 하다가 제대하고 삼 년 전부터 제빵기술을 배웠다.
데코레이션에는 그다지 자신이 없지만 빵의 맛에는 자신이 있다. 애초에 이번 대회에 참석한 것 자체가 자신에게 부족한 ‘데코레이션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그는 예선을 통과할 자신이 있었다. 표찰을 잘못 단 사람에게 지적을 해준 것도 그러한 여유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는 지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 남자는 뭐지? 왜 이런 대회에 나온 거야?’
‘저 정도 실력이면 신인 대상으로 하는 이런 대회에 나올 게 아닌데, 왜 여기서 양민을 학살해?’
어린애와 어른이 대결하는 것 같은 실력 차이다. 케이크 장식의 거장이 나와 직접 실현하는 것 같은 섬세한 손길! 정확하고 빠른 솜씨로 하나씩 하나씩 비늘을 올려서 용의 70% 이상을 이미 완성했다. 그에 비하면 지금 김은동이 만들고 있는 ‘닭’은 마치 초등학생의 장난감 같다.
‘하지만 내가 비장의 양념으로 간해서 삶은 반숙 달걀은 아주 맛있으니까, 맛은 비등할 거야. 지금 디테일에 조금만 더 신경을 쓰면 돼.’
하지만 손이 떨린다.
‘저 엄청난 솜씨.’
김은동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야. 저 나이에 저 정도로 데코레이션을 하려면 밥 먹고 저것만 매일같이 했을 거야. 그만큼 맛에 신경 쓰기는 어려웠을 거야. 나와 완전히 반대라고 생각할 수 있지.’
수탉의 볏 모양으로 투박하게 깎아낸 당근을 방금 만든 닭의 머리 위에 올리면서 김은동은 다른 것을 모두 잊었다.
‘난 할 수 있어.’
땡! 땡! 땡!
시간이 다 되었다.
“B팀 심사하겠습니다.”
“장식 점수부터.”
“B-1은…… 이건 볼 것도 없군요.”
아드레아노 존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뭘 만든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토끼, 토끼입니다! 토끼 고기를 넣은 이스터 래빗 쿠키입니다.”
“쿠키에 고기를 넣는 발상은 그렇다 치고, 지금 귀가 무너졌잖아요.”
“겉모습부터 아웃입니다.”
“텍스쳐를 생각하면 쿠키에는 고기를 넣으면 안 됩니다. 차라리 베이컨 칩처럼 바삭바삭하게 했으면 모를까, 씹히는 질감 자체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
출전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다음은 김은동의 차례였다.
“B-2번.”
“닭 눈알이 어디 간 거죠? 이 닭은 장님인가요?”
“거, 거기에 있습니다.”
“동서양 보편적으로 눈알은 검게 표현하지 않나요? 아니면 이 닭은 죽어서 눈알을 희게 뒤집었나요? 잔혹 동화도 아니고, 동글동글 귀여운 닭 모양인데 마지막 디테일이 이래서야 어쩌겠어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냉정하게 평가했다.
눈알에 검은색을 칠하기 전에 마침을 알리는 벨 소리가 울려 버렸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 은동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드레아노 존부는 아무렇지 않게 시식용 조각을 한 입 맛보았다.
“보기보다 맛있군.”
딱 한 마디였지만 모든 사람이 집중했다. 그가 ‘맛있다’고 한 모든 작품은 A조와 B조에서 각각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관객들이 술렁거렸다.
“저 눈 뒤집은 닭이 맛있나 봐.”
“눈이야 점 하나만 찍으면 되는 건데 맛만 있으면 되지, 뭐.”
“그래도 이 대회 자체가 데코레이션 대회인데 거기서 데코가 엉망이면 어떡해?”
은동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됐어!’
“이런 생김새인데 이런 맛을 낸다는 게 놀랍네요. 일부러 못생기게 만들고 맛으로 놀라움을 주려는 서프라이즈인가요?”
계속해서 까다롭게 불평하던 스텔라도 ‘맛’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은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그럼 다음 참가자.”
진혁이 앞으로 나섰다.
“이건 아주 훌륭한 용이군요.”
콧구멍을 깊숙이 들여다본 아드레아노 존부가 피식피식 웃었다.
“이건 뭐죠?”
“코털입니다.”
“환상 속의 동물에게 코털이 왜 있어?”
“용의 코털을 건드리지 말라는 격언이 있지요. 그 말을 따라 재현해 보았습니다.”
진혁이 차분히 대답했다.
“뛰어난 실력에 유머 감각까지, 완벽하네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제 시식해야 합니다. 시식용 조각을 잘라 주시죠.”
“이렇게 완벽한 명작을 부숴서 먹어야 한다니 아까운 일이에요.”
“그렇다고 해도 맛에 대한 심사는 이루어져야 하니까.”
존부가 씨익 웃었다.
“모양은 확실히 잘 뽑아냈지만, 맛은 별개의 문제니까. 어디 모양만큼 맛도 좋은지 보죠.”
진혁은 단번에 조리용 칼날로 용의 머리를 잘라냈다.
심사위원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정도로 빠른 손길이었다.
“방금…… 방금 자른 거예요?”
“수염 하나 손상하지 않고 완벽하게 잘라냈군요. 어떻게 저런 묘기가 가능하지?”
“빵을 만드는 게 아니고 서커스를 해도 잘했겠어요.”
절묘하게 네 조각으로 잘라내 눈알과 코, 뿔과 귀가 하나씩 포함된 조각들! 하얀 접시에 올려진 조각난 용의 머리는 접시에 닿아도 수염 한 조각 갈라지지 않았다. 마치 정말로 작은 동물의 목을 잘라낸 것처럼, 잘린 절단부에는 자그마한 혈관과 뼈까지 재현되어 있다. 지나치게 섬세한 세공으로 인해 그로테스크해 보일 정도였다.
“안쪽에 골격과 핏줄을 넣은 거예요? 도대체 언제?”
“잘려도 부서지지 않는 디테일이라니, 대단하군.”
아드레아노 존부가 머리를 손으로 집어 들어 입안으로 가져갔다.
“……이 맛은?”
그가 물었다.
“뭐지?”
진혁이 빙긋 웃었다.
“놀라셨죠?”
“하바네로? 칠리? ……캡사이신 계열의 향신료를 쓴 것 같은데.”
아드레아노 존부가 입을 열었다.
“멕시코식 칠리와 초콜릿은 유명한 디저트인데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청양고추입니다.”
진혁이 정체를 밝혔다.
“용은 강력한 힘을 상징하죠. 그걸 매운맛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잘 어울리는군요.”
“맛있어요.”
“겉모습에 뒤처지지 않는 맛이 나오다니 대단합니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 심사위원들을 본 은동은 좌절했다.
‘저런 모양인데 맛까지 좋다니 사기 아니야?!’
심사위원의 평가는 만장일치로 이루어졌다.
“B조의 결승전 진출자는 3번입니다.”
“축하합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경기를 끝내고 나오는 진혁은, 핸드폰의 진동에 전화를 들었다. ‘어머니’라는 글자가 반짝이며 수신된 전화를 알렸다. 그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끝나는 시간은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네 아버지에게 물어봤지.”
생각났다는 듯 어머니가 덧붙였다.
“요즘은 네가 가르쳐준 건강 체조를 해서 그런지 기운이 나.”
“그건 다행이군요.”
진혁이 빙긋 웃었다. 어머니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결과는 어떻게 됐니?”
“내일 한 번 더 해 봐야 알 수 있어요.”
“예선을 통과했구나!”
어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축하한다.”
진혁이 물었다.
“그 말씀 하시려고 전화하셨군요.”
“그것도 있고.”
어머니가 말했다.
“작은 진호가 위기를 넘겼어.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아. 다리 부러진 것도 자연 치유력 덕분인지 괜찮아졌어.”
“그래요.”
“우리 집에서는 키우기가 어려우니까, 맡아줄 사람을 찾아보려고 해.”
전화 너머로 안도감과 행복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진혁이 미소 지었다.
“그래요, 누가 맡아줄 사람이 있대요? 아무 데나 보내려는 건 아니죠.”
“동네에 알아보려고. 왜, 그 전에 부녀회장 기억나니? 환희네 엄마.”
“알죠.”
“그 집에서 동물을 키울까 하고 알아보고 있었던 기억이 나서, 거기 물어보려고 해.”
“그래요, 뭐 그 집 정도면. 심성이 나쁘지 않죠.”
친구한테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울던, 불을 무서워하던 아이다. 고양이를 해칠 녀석은 아니다. 진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서울에서 자고 올 생각이니?”
“……아.”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던 진혁이 멈칫했다. 이 정도 거리면 진혁에게는 몇 분 거리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기차와 버스를 타고 세 시간 이상 와야 하는 거리다.
“생각보다 일찍 출발해서요, 집에 가서 자려고요. 어머니 얼굴도 보고요.”
하지만 백일이 걸릴, 부모님을 위한 환골탈태 준비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중간에 하루라도 빼먹는 것은 곤란하다.
“그래, 그럼 어서 오렴.”
어머니는 밝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