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23화
임운정과 김만석, 두 사람은 빵집을 나서서 한참 걸었다.
“자네 아들이 군대 다녀와서 사람이 다 됐군.”
“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니야, 군대 가기 전에는 이런 녀석이 아니었어. 실습 시간에 캐러멜라이징할 때 실습용 프라이팬을 완전히 태워 버렸지. 그거 다시 사느라고 진땀 좀 뺐어. 그래도 내 체면에 학생한테 물어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거기도 예산이 없나 보구만.”
“그렇지.”
김만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나 다 그래. 그리고 이번에는 특히나 심각해. 지금 향경전에서 연패하고 있으니까 이사진에서는 지원금을 끊어 버린다고 난리야. 너희들이 잘못 가르쳐서 그런 거라고.”
“허, 참.”
아버지가 웃었다.
“자네가 자식 교육을 잘해서 우리 학교에도 좀 희망이 생기겠어. 이 정도 수준이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네. 우리가 메뉴에 대해서 조언을 해줄 필요가 없는 수준이야.”
“그렇지, 철우가 수쉐프로 데려가고 싶다고 난리야.”
“그놈이 과장해서 말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게. 제빵 업계에서 8-10년은 일한 수준이야. 이 년 동안 여기서 메뉴 개발만 했나?”
“아냐, 군대를 다녀왔어. 빵집에서 일한 건 정말로 얼마 안 돼.”
“미친 재능이군…… 정말로 자네 못지않아.”
“난 이제 다 죽었지.”
“솔직히 일봉이 자기보다 더 뛰어난 실력의 학교 선배가 있다고 했을 때 믿지 않았어.”
“그래?”
“그럴만한 실력이었으면 1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을 텐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거든.”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더니, 정말로 그런가 봐. 애가 갔다 와서 이십 년은 묵은 것같이 노회한 구렁이가 되어서 왔어. 요즘엔 밤마다 무슨 건강 체조를 시킨다네.”
“아들이 아버지한테?”
“아내가 당뇨 위험군이라는 진단을 받고 난 다음부터 설탕 없는 빵을 개발한다고 요즘은 이것저것 시험해보고 있어.”
“기특하구만, 효자네. 효자야.”
김만석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사실 내가 자네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데.”
“됐어, 무슨.”
“그때 자네가 조교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으면.”
“허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거야. 다 자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
“무슨 소리야. 난 어차피 학교에 남을 생각도, 공부를 할 생각도 없었어.”
“은사님은 나보다 자네를 더 마음에 들어 하셨으니까, 자네가 먼저 조교 자리와 석사 과정에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으면 분명히…….”
“그만.”
아버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다음에 열심히 살아온 건 만석이 자네가 알아서 한 일이야. 나한테 빚이라느니 뭐니 생각할 필요가 없어.”
“아들도 잘 키우고. 역시 자네 실력이 어딜 가는 게 아니야. 교수님 수제자였잖아.”
“이미 다 늙었지 뭐, 아들은 자기가 알아서 혼자 큰 거야. 내가 뭘 한 게 아니야.”
“그래도, 저렇게 자라기가 쉽지 않은데.”
‘대화가 너무 잘 들려.’
진혁은 멀리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일부러 신경을 껐다. 아마도 두 사람은 이 정도면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멀리서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잘 들렸다.
‘내가 이야기를 듣지 않는 걸 원한다면, KTX 정도는 타고 아예 다른 도로 가셔야지.’
처음에는 이 교수가 혹시 아버지를 적대시하는 자가 아닌가 하고 듣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아버지에게 은혜를 받았고,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 자였다.
‘역시 아버지는…… 내가 존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진혁이, 자네는 이번에 데코레이션 페어의 주제는 들었지? 어떤 걸 가지고 나가려고 하나?”
“이번에는 과일 조각이 주제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어느 과일인지는 아직 알려주지 않았어. 그리고 여태까지의 출제 경향으로 보면 아마도…….”
“올해는 얼음 아니면 초콜릿일 거예요.”
뚱뚱이 교수의 말을 끊고 일봉이 끼어들었다.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얘기해 주셨잖아요? 최근 5년간 얼음도, 초콜릿도 데코레이션에서 주제로 나온 적이 없었다고.”
“이번 같은 폭염이 심한 여름에, 얼음 조각을 할 만한 덩이 얼음을 얼려놓고 온도를 유지하려면 보통 일이 아니야. 행사 예산이라는 게 어디나 비슷비슷한데 얼음을 쓸 것 같지는 않아.’
“그럼 거의 초콜릿이겠네요.”
“자네, 초콜릿 모델링은 해 본 적이 있나?”
진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이 헌드레드 쿠키라는 걸 보니까, 다크 초콜릿의 성질에 대해서는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게 분명해.”
뚱뚱이 교수가 가져온 캐리어를 꺼냈다.
“하지만 여기 가게 안에 있는 상품들을 보면, 초콜릿은 거의 미니 초콜릿이나 이 쿠키, 케이크밖에 없구만. 초콜릿으로 커다랗게 뭔가를 만들어 본 적이 있나? 만들어본 작품 중 제일 큰 게 어떤 거지?”
진혁은 잠시 생각했다.
‘사지를 썰어버린 강시를 내장으로 장식해서 꼬챙이에 꽂아둔 적은 있는데.’
“……음, 설치 미술이요?”
멀리서도 잘 보이게 붉은 선혈을 화려하게 칠해 강조했고, 벌레들과 새들이 꼬이기 쉽게끔 높은 곳에 걸었다. 4리 바깥에서도 보일 수 있도록 멀리서 화강암 조각을 가져다가 깎아서 시체 받침대도 만들었다. 혈교의 잔당들에게 잘 보이도록 신경 썼다.
‘그것도 나름 조각이라고 할 수 있지.’
진혁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동안 뚱뚱이 교수가 물었다.
“깎아 만들었나, 붙여서 만들었나?”
“깎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붙여서 만들어야 더 모양을 낼 수 있는 모양들도 있지. 예를 들면 장미 꽃잎 모양 같은 것 말이야. 플라워 케이크의 장미는 깎아서는 만들 수 없어, 꽃잎 한 장 한 장을 만들어야 하지.”
진혁이 말했다.
“지금 가져오신 건 뭡니까?”
“모델링 초콜릿 재료. 기본적인 것만 간단하게 가르쳐 주겠네.”
일봉이 깜짝 놀랐다.
“2학년 때 실습하는 그건가요?”
“그렇지. 강 마리오 그놈은 분명히 할 줄 알아. 유튜브에서 봤다.”
일봉이 정색하며 교수님을 바라보았다.
“교수님! 그 녀석 유튜브를 본다는 것 자체로 걔한테 힘이 된다니까요! 아예 보지 않는 게 좋다니까요!”
“일봉아, 라이벌의 실력을 알고 분석해서 이겨야 하지 않겠니?”
“제가 수십 번 수백 번 걔 동영상을 돌려 봐서 오히려 걔 조횟수만 올려 줬단 말이에요…….”
일봉이 풀이 죽어서 말했다.
“그리고 봐도 봐도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순식간에 뚝딱 하고 만들어서. 저는 그렇게 안 되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혁이 물었다.
“모델링 초콜릿이라면 그, 물엿을 같이 넣어 반죽해서 초콜릿 모양 만드는 거 말입니까?”
“내가 예시로 좀 가져 왔는데, 볼 텐가?”
뚱뚱이 교수가 주섬주섬 캐리어를 열어 랩에 싸인 모델링 초콜릿 반죽을 꺼냈다. 진혁이 말했다.
“저 그거 만들 줄 압니다.”
“뭐? 독학을 했나?”
“얼마 전에 어머니 결혼기념일 케이크 만들 때 초콜릿 판 만들 일이 있어서, 조금 해 봤죠.”
일봉이 놀라며 말했다.
“새벽 케이크에 들어간 작은 행성들, 사온 게 아니고 직접 모델링 하신 거였어요?!”
“그걸 독학으로 해봤다니…….”
흠흠, 하고 뚱뚱이 교수가 고개를 들었다.
“작은 형태로 해봤다면 설명을 들을 때 이해하기 쉽겠군. 나는 큰 덩어리 위주로 간단하게 설명을 해 줄 거야. 일봉이 너도 같이 들어라.”
“예!”
“흠.”
딸그랑, 딸그랑.
외출했던 아버지와 꺽다리 김석만 교수가 돌아왔다.
“오, 출장 과외 수업인가?”
“비슷한 셈이죠.”
“그래, 열심히 해보라고.”
아버지가 웃었다.
“대회 전날 가르쳐주러 오다니 너무 늦은 거 아니냐고.”
“무슨 소리야, 혹시나 해서 들르러 온 거야. 그리고 이 녀석은…….”
몇 가지 팁을 가르쳐 주고 난 뚱뚱이 교수가 질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했을걸. 이미 데코레이션 대회에 출전할 레벨이 아니야.”
“그 마릴린인가 뭔가 하는 유튜브 하는 애보다?”
“그 녀석도 그 대회에 출전할 레벨은 아니야.”
“그래도 우리 진혁이가 어디 가서 지고 올 애는 아니지.”
아버지가 교수들을 배웅하며 말했다.
“조심히 돌아가라고. 만나서 반가웠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럼, 내일 잘 해주게.”
“알겠습니다.”
교수들이 돌아간 이후 일봉이 머쓱해 하며 말했다.
“사실 교수님들이 오셔서 과외를 해 주실 필요도 없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기술 아니에요? 한 번에 전부 따라 하시던데.”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초콜릿 모델링을 그 크기로 해본 건 처음인데.”
“그럼 아까 해보신 게 처음 해보신 거라고요?”
“그렇지.”
“하아…….”
일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 애들이 저보고 재능충이라고 했을 때는 이해를 못 했거든요.”
“그래?”
“저를 보는 애들 마음이 지금의 제 마음 같았겠죠. 솔직히 애들이 왜 그렇게 못하는지 이해를 못 했는데, 지금은 그 애들 마음이 제 맘 같네요. 하아. 세상은 재능을 공평하게 주시지 않아…….”
“안 가고 뭐 하고 있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정리하고 퇴근해. 뒷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까.”
일봉이 존경 어린 눈빛으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아르바이트생에게 맡겨버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직접 가게를 정리하는 모습까지, 이전에 일하던 가게와는 천지 차이다. 사장의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이 가게에서 일하기를 정말로 잘했어.’
“내일 대회시니까 제가 정리하고 퇴근하겠습니다.”
일봉을 뒤로하고, 아버지가 진혁에게 말했다.
“가자, 진혁아.”
“예, 아버지.”
7장
아버지와 함께 집에 도착한 진혁을 맞이한 것은, 새로운 생명이었다.
“진혁아.”
“어머니?”
주먹의 절반도 안 되는 털 뭉치를 안고서 어머니가 하얀 우유를 먹이고 있다. 어머니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노란색과 갈색, 검은색으로 얼룩덜룩한 무늬가 양쪽 귀와 등, 꼬리를 덮었고 다른 쪽은 흰색인 아기 고양이였다.
“이 애가 힘이 없어서 제대로 우유도 먹지 못하고 흘리네.”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요 앞에 쓰레기통 앞에서 발견했다. 우는 소리도 못 내는 조그만 녀석인데 그대로 두고 오면 어떻게 될지 뻔해서.”
죽음, 그 단어를 꺼리며 입 밖에 내지 않고 어머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미에게 버림받은 건지, 쯧.”
사람의 죽음은 물론이며 짐승의 죽음도 수없이 바라봐 왔다. 어미에게 버려진 작은 고양이의 생사는커녕, 인간의 생사에도 구애받지 않고 살아왔다. 후환을 남기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고작해야 이 정도의 일에 슬퍼하는 어머니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로 별것 아닌 일인데.’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나무에서 떨어져 있는 송충이를 보면 조심스레 주워서 나무 위에 다시 올려주고, 햇볕이 뜨거운 여름날 아스팔트 위의 지렁이를 보면 흙 위로 다시 데려다주는 분이셨다. 그렇다고 해서 송충이나 지렁이를 좋아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만지는 것을 무서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뿐이다.
눈가에는 주름이 깊이 패어 있고 입술은 가볍게 떨린다.
진혁은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생각했다.
“어머니, 키우시게요?”
“보니까 오늘도 제대로 넘기지 못할 것 같아.”
어머니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도 이 조그만 것이 할딱거리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그냥 두고 볼 수가 있어야지. 에휴.”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던 중 그 말이 진혁의 마음을 움직였다. 어머니의 저 애석하고 비통한 감정에 공감하기는 어려웠으나 과거의 자신을 돌아볼 수는 있었다.
‘그 녀석이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으면 나도 같은 처지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