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22화
그날 저녁. 진혁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요즘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세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여기저기가 쑤시고 그렇지. 그래도 요즘은 좀 덜해졌어. 여름이라서 그런가?”
‘추궁과혈의 효과입니다.’
“제가 요즘 쓸만한 건강 체조를 배웠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이 하셨으면 좋겠어요.”
“휴우, 그러게. 그런 걸 하면 좋지. 그런데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보다 얘, 오늘은 빵 가져온 것이 없니? 전에 가져왔던 까만 과자, 그 뭐니, 헌디 쿠키 같은 거 말이야.”
진혁은 아버지와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설탕과 초콜릿이 압도적으로 많이 들어가는 헌드레드 초콜릿 쿠키! 대단히 얇게 구운 과잣장과 초콜릿을 번갈아 겹쳐 놓은 과자는 당뇨를 악화시키기에 딱 좋다. 그래서 아버지와 진혁은 의논한 끝에 다른 것을 준비했다.
“오늘은 다른 걸 가져왔어요.”
“그래? 우리 진혁이가 만든 거라면 뭐든지 맛있지.”
어머니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얘, 네가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구두를 신고 돌아다닐 때 발이 하나도 안 아프더라. 구두가 나한테 맞춘 것처럼 꼭 맞았어.”
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진혁이가 뭘 했어?”
“구두에 광을 내주고, 볼을 늘려 줬어요. 그랬더니 너무 편해서 온종일 자랑했죠.”
“군대에서 배웠다고?”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혁이 수습했다.
“네, 저, 그. 후임 중에 업계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좀 배웠습니다.”
‘혈강시 만드는 기술을 알아내서, 조금 써 봤죠. 따로 제물을 바치진 않았으니까 괜찮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버지가 납득했다.
“구둣방 출신? 그럼 군화 손질도 빨랐겠네.”
“그렇죠, 윤기부터 다르죠.”
“진혁아, 니 어미 말고 아부지도 신발 있다.”
“……넵. 오늘 밤에 닦아 놓겠습니다.”
“자식, 농담이지. 괜찮다, 매일 내가 직접 닦고 있으니까.”
“아니에요, 아버지. 그리고 두 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세요. 오늘부터 매일 건강 체조를 같이하고 주무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꼭 해야 해?”
어머니가 망설였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짙다.
“예, 꼭 해야 합니다.”
진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소파에 앉은 어머니의 등 뒤로 가서 어깨를 살살 주무르며 미세한 양의 진기를 흘려보냈다.
“이제는 조금 덜 피곤하시죠?”
“어머, 어머. 정말로 피곤한 게 훨씬 덜하네.”
어머니가 살짝 웃었다.
“네가 어깨 주물러 주는 게 정말로 효과가 좋구나.”
“그렇죠? 건강 체조는 더 효과가 좋을 겁니다.”
“그래?”
아버지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제일 먼저 기세(起勢)입니다.”
양다리를 벌려 양발에 체중을 균형 있게 싣고, 허리를 대나무와도 같이 곧게 편다. 스쿼트 하듯이 뒤로 엉덩이가 빠져서는 안 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세는 참혹했다.
“한쪽으로 기울어지시면 안 됩니다. 이쪽으로 해서. 네, 잘하고 계세요.”
엉망진창인 자세를 교정해 주며 진혁은 부모님에게 진기를 주입하여 단전을 활성화할 수 있는 기초를 닦는 데에 주력했다.
‘어차피 자세로 무공을 익히실 건 아냐. 이건 환골탈태 전의 핑계일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눈으로 차마 봐줄 수 없는 자세였다.
‘부모님이 아니라 내가 무림으로 떨어져서 정말로 다행이다.’
일주일은 빠르게 지났다.
벌써 다음날이 데코레이션 페어를 준비해야 하는 날이다.
“자네가 그, 임진혁이라고?”
일봉이 제과학과의 교수님을 두 명이나 모시고 왔다. 한 명은 키가 크고 비쩍 말랐고, 다른 한 명은 작고 통통하며 배가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솔직히 말해서 얼굴을 봐도 누가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다. 하지만 꺽다리 교수는 진혁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자네는… 놀랍군. 그 치즈 케이크를 만든 사람이 임진혁이 자네였단 말이야?”
하지만 좋게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말투에서 미묘한 실망감이 느껴졌다. 주방에서 아버지가 나왔다.
“제 아들을 잘 알고 계시는가 보군요?”
인사부터 건네던 아버지의 얼굴이 굳었다.
“너는……”
“임운정이……? 나야, 나. 김만석. 철우 녀석한테 작은 빵집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여기인 줄은 몰랐네.”
꺽다리가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만나니까 진짜 반갑다. 나는 1학년 때 얘 지도교수였어. 당시에는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은 아니었는데.”
일봉이 당황해서 진혁을 보고는 교수에게 말했다.
“교수님! 왜 그러세요?”
꺽다리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뚱뚱이 교수가 덧붙였다.
“김만석 교수님이 전부터 이야기하던, 빵을 잘 만드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분이신가 봅니다. 아드님이 그 실력을 물려받았나 봐요. 대기만성하는 타입이었는지, 이번에 트리플 치즈 케이크를 맛보고 저희 교수진 전부 그 아이디어와 실력, 정교한 데코레이션에 감탄했습니다.”
칭찬하는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비꼬는 말투!
일봉이 쩔쩔매고 있지만 진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니기 싫은 학교를 억지로 대충 다녔지. 출석도 엉망진창이었으니까 저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
두 사람 모두 팔에 있는 근육이라고는 생활근 뿐, 최근에는 빵을 제대로 만들어 본 적도 없으리라. 비리비리하고 제 실력도 모르는 것이 알량한 지위를 믿고서 앞에서 말하고 있는 걸 보니 우습다. 굳이 상대해 줄 필요도 없다.
“흠흠, 흠,”
딱히 진혁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꺽다리 교수가 헛기침을 했다.
“알다시피 향경전은 이십 년을 넘게 이어온 전통적인 행사야. 그런데 올해는 우리가 계속 지고만 있어서 자네 도움이 필요하네.”
뚱뚱이 교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직원에게 들었습니다.”
진혁은 일봉의 이름이 아닌 직위를 호칭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여기의 책임자이며,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렸다. 눈치가 없지 않은 뚱뚱이 교수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 크림슨 트리플 치즈 케이크는 사실 우승을 하고도 남을 만한 수준이지.”
키다리 교수, 김만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5성급 호텔 의전에서 메인으로 낼 만한 수준이야. 그 케이크 하나만으로는 부족해. 데코레이션 페어에 나갈 생각이라면, 그만한 수준의 다른 디저트들이 갖추어져 있어야 하지. 마카롱이나 한입 초콜릿 같은 것도 만드나? 여기에는 없어 보이는데. 만들어 본 적은 있겠지?”
걱정스러워 하면서 일봉을 흘깃 바라본다.
“강 마리오라는 놈이, 아주 바리에이션이 넓어. 일봉이도 못하는 편은 아닌데 그놈이 워낙 괴물 같다 보니…….”
일봉이 씨익 웃었다.
“저희 작은 사장님, 아니 진혁 선배가 더 바리에이션이 넓어요.”
“음?”
뚱뚱이 교수가 관심을 보였다.
“그러고 보면 여기서 팔고 있는 저 쿠키하고 파이는…….”
꺽다리 교수가 말했다.
“운정이 자네가 개발한 신메뉴야?”
아버지가 씩 웃었다.
“아니, 아들 녀석이 개발한 신메뉴야.”
일봉이 흥분해서 말했다.
“크림슨 트리플 치즈 케이크만이 아니라 다른 과자나 쿠키들도 유명해요. 이번에 새로 개발하신 마늘 아이스크림과 거기 곁들이는 치킨 파이도 그렇고. 그러고 보면 교수님들, 그 케이크 말고 다른 건 먹어보신 적이 없으시죠?”
“그렇지, 다른 메뉴는…….”
“먹어보면 아실 거예요.”
일봉의 눈이 빛났다.
“저희 작은 사장님이 얼마나 뛰어나신 분인지.”
“허 참, 일봉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진혁은 특별히 다른 메뉴를 준비하지 않았다. 일봉이 가져온 것은 치킨 파이와 헌드레드 초콜릿 쿠키, 그리고 블랙 어니언 타르트와 블랙 앤 화이트 크림소라빵이었다. 전부 진혁이 개발해낸 신제품들이다.
“헌드레드 초콜릿 쿠키……?”
쿠키라기보다 페이스트리를 극히 바삭하게 구워 쿠키의 식감을 재현해낸 것에 가깝다. 김만석 교수가 순식간에 한 접시를 먹어치웠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페이스트리와 초콜릿은 확실히 잘 어울리지만, 페이스트리 위에 녹인 초콜릿을 얹는 정도로만 활용하고 있지. 바삭한 식감을 내기 위해 여러 층위의 과자를 겹겹이 쌓을 경우에 중간에 녹인 초콜릿이 들어가면 그 바삭한 식감 자체가 나오지 않게 돼.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얇은 초콜릿이, 과자 생지를 녹이지 않고 얇은 판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건가?!”
입가에 초콜릿이 잔뜩 묻은 채 입맛을 다시며 김만석 교수가 말했다. 이미 눈빛이 바뀐 채였다.
“끊임없는 연구 끝에 우연히 하나의 명품이 나올 수는 있지만…… 자네는 특히 페이스트리가 강점이군.”
“이 치킨 파이는……!”
뚱뚱이 교수는 치킨 파이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이 페이스트리 안에서 국물을 유지하고 있는 쫄깃한 반죽, 이건 뭐지? 안쪽은 찹쌀가루로 반죽해서 국물을 담을 수 있게 한 건가?”
“잘 아시는군요. 하지만 찹쌀가루 말고 다른 걸 섞었습니다.”
“하……! 자칫하면 질겨져 오히려 파이의 맛 자체를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엄청난 시도야.”
하나씩 빵을 먹어보며 두 교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새벽 케이크는 데코레이션과 반죽 비율만 달리 한 버전이군. 흐음…… 아니야, 이 정도도 놀라워. 무스를 다루는 솜씨가 경지에 올랐어.”
“그렇습니다.”
“하나만 물어보겠네. 초콜릿의 달콤쌉싸름한 맛에 바삭한 텍스쳐를 주려고 이렇게 한 건가? 얼마나 실력이 뛰어난지 보여주고 싶어서?”
뚱뚱이 교수가 물었다. 진혁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냥 그게 맛있어 보여서요.”
곧이어 아버지가 다른 빵들을 가져왔다. 블랙 앤 화이트 크림소라빵에, 블랙 어니언 타르트까지!
겉모습을 보자마자 꺽다리가 놀랐다.
“어떻게 회색이 아닌 검은색과 흰색 크림으로 데코레이션을 한 거지?”
“흰 크림을 바르고 이후에 검은색 데코용 펜 같은 거로 그린 게 아닐까.”
뚱뚱이 교수가 의문을 품었다. 일봉이 제과용 칼을 꺼내 소라빵을 반으로 잘라 보여주었다.
“보세요, 이 안에 있는 초콜릿과 우유 크림의 마블링을요.”
“허?”
“두 개의 크림을 섞어서 짜낸 게 맞군.”
반으로 자른 한 개의 크림소라빵! 두 개를 나누어 먹으며 두 사람은 계속해서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초콜릿과 우유가 섞이지 않고 따로따로 맛을 내고 있는데?”
그들은 빵을 그냥 먹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 먹어보고 다시 분해해서 살펴보고 다시 한 입 먹는다. 음식을 먹는다기보다 그 안에 담긴 정수를 빨아들이려는 것 같은 작업이다.
이미 맛있는 음식을 먹은 교수들은 기대감에 차 있다.
“이 어니언 타르트는 가장자리가 금색으로 빛나는 것 같군.”
“보기에도 나쁘지 않아. 달콤한 향도 강하고.”
“혹시 설탕을 추가로 넣어서 볶았나?”
“아뇨,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디단 향을 내는 거지? 양파를 특별한 걸 썼나?”
“그냥 볶았을 뿐입니다.”
‘강기로요.’
당신들이 어떻게 해도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혁이 웃었다.
“잘 볶으면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캐러멜라이징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아까와는 다른 표정으로 김만석 교수가 진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진혁의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담배 한 대 피울까?”
진혁이 끼어들었다.
“저희 아버지 금연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악우를 만났는데 한 대쯤이야 피울 수 있지.”
“어머니께 이를 겁니다.”
“…….”
뚱뚱이 교수가 킥킥대며 웃었다.
“김만석 자네도 담배 좀 끊어 봐. 여기 이렇게 아들이 직장에서 지키고 금연을 도우니, 원. 금연에 실패하질 못하겠네.”
“우리 나이면 건강 생각해야지.”
“흠흠, 흠.”
키다리 교수가 과장되게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했다.
“담배 피우자고 안 할 테니 이 앞에 잠깐 나가지.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으니.”
“다녀오십시오.”
진혁이 바로 정중하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