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21화
“너,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환희 어머니가 아이를 안아 올리려고 하는데 진혁이 제지했다.
“불 앞에서 의자 위에 서 있는 애를 그렇게 안으려고 하시면 다칠 수도 있습니다.”
환희가 곤란한 듯이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자연스럽게 뒤집개를 넘겨받은 진혁이 마저 양파를 프라이팬에 볶기 시작했다.
‘익어라.’
아이에 정신 팔린 엄마와 엄마에게 집중하고 있는 아이.
순식간에 양기에 녹아버린 양파는 더 이상 손질할 필요 없이 완벽하게 캐러멜라이징된 상태가 되었다. 본래라면 세 시간 이상 볶아야 나올, 완벽하게 구워진 양파!
환희가 멀쩡한 것을 확인한 환희 어머니, 부녀회장이 따지듯이 진혁에게 물었다.
“잠깐, 우리 이야기부터 하자구요. 왜 아이가 여기 와 있죠? 너 학원은?”
진혁이 아이 앞으로 나섰다. 위압감 있는 그림자가 위로 드리운다. 부녀회장이 떨면서 아들을 끌어안았다.
“너, 너 그렇게 불을 무서워하더니.”
양팔 소매를 걷은 소년의 왼쪽 팔목에는 선명한 흉터가 드러나 있다.
“타르트를 직접 만들고 싶다고 하더군요.”
진혁이 말했다.
“자신을 믿어주었던 친구를 위해서 직접 만들고 싶다고.”
“환희야.”
아이 어머니가 잔뜩 찡그린 얼굴을 들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나이에 비해 깡마른 아이는 어머니에게 쉽게 안겼다.
“엄마, 여기 빵집 아저씨가 불을 진짜 잘 다뤄. 하나도 안 무서운 불이야.”
“안 무서운 불이 어디에 있어! 불은 다 무서운 거야.”
“정말로 괜찮아.”
아이가 작은 팔로 제 어미의 등을 토닥였다.
“엄마, 나 병원 가고 싶어.”
“병원? 병원은 왜?”
“이거 다 만들어지면 도영이한테 갖다 줄 거야. 사장님이 내가 만든 거니까 내가 다 가져가도 된댔어.”
“재룟값은 주셔야죠.”
진혁이 웃었다.
“잠시 바깥에 앉아서 기다리시죠. 요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저씨! 제가 마저 할래요.”
환희가 진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부녀회장이 환희의 손을 꼭 잡았고, 진혁이 고개를 가로저았다.
“넌 나가.”
“……네.”
“어머니랑 같이 기다려.”
잘 볶아진 양파 위에 달걀을 깨어 함께 볶은 다음, 페이스트리 위에 양파와 달걀을 올리고 오븐에서 굽는다. 원래대로라면 화씨 375도의 오븐에 35분을 구워야 하지만, 진혁은 간단하게 자그마한 삼매진화를 피워내 그 문제를 해결했다.
‘불타올라라.’
순식간에 구워진 블랙 어니언 타르트! 거기에 발사믹 식초를 살짝 더해 향을 더 강하게 해준다.
주방 바깥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일봉에게 사과하는 부녀회장의 목소리다.
‘제가 괜히 소리를 질렀네요.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아닙니다. 놀라실 만하지요. 저도 조카가 있는데 너무 예쁘고 귀여워요. 엄청 소중하고요. 그런데 자기 아이면 오죽하겠어요. 그리고 주방 바깥에서 들었는데, 전에 불에 덴 적도 있다면서요? 저희는 애가 당연히 엄마 허락을 받고 온 줄 알았습니다.’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닌데.’
‘엄마, 나는 전교 회장 하고 싶지 않아. 도영이한테 가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타르트를 주고 싶어.’
‘그래, 나중에 엄마랑 둘이서 있을 때 이야기하자.’
진혁은 작은 종이상자에 넣어 포장한 타르트와 별개로 따로 맛볼 수 있게 두 개를 접시에 올려 들고 나왔다.
“환희가 직접 만든 타르트입니다.”
“………!!”
드셔 보시겠습니까, 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부녀회장이 조심스레 양손으로 타르트를 받았다.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우리 애가 아기인 줄만 알았는데 벌써 어른이 다 됐네요. 엄마가 다 해줘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습니까.”
“아까 소리 질러서 죄송해요. 애가 불 앞에 있는 걸 보니 너무 놀라서, 그때 악몽이 생생하게 떠올랐어요, 애가 불에 닿아서 비명을 지르는데 제가 문 끝에서 부엌까지 달려가는데 그 시간이 어찌나 오래 걸리던지 백년은 걸리는 줄 알았어요. 주방에는 칼도 있고 불도 있고 위험한 장소니까, 그 이후엔 아예 부엌엘, 전혀 못 오게 하면서 조심을 했어요.”
“그러셨군요.”
관심 없는 이야기다. 진혁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했니?”
“네.”
“그래.”
환희 어머니가 환희를 내려다보았다. 번진 마스카라에 엉망이 된 블러셔. 붉은색이 묻어나온 입술까지 얼굴이 엉망진창이다. 그렇지만 부녀회장은 진혁을 한 번 바라보더니 지갑을 열어 주섬주섬 지폐를 꺼냈다.
“이 정도면 되나요?”
진혁이 금액도 보지 않고 돈을 받았다.
“네에.”
“……고맙다고는 하지 않을게요. 저에게 말도 없이 애를 위험한 주방에 데려가신 건 사실이니까.”
“초등학교 주문은 없던 거로 하겠습니다.”
“예, 예. 그렇게 해주세요.”
아이 손을 꼭 잡고서 어머니가 나갔다.
딸그랑, 딸그랑.
종소리가 들리며 문이 닫힌다. 닫힌 문 너머로 부녀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희야. 도영이네 면회 가보자. 차 타고 가면 그렇게 멀지 않으니까.”
“응!”
“네가 하고 싶지 않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 엄마는 네가 전교 회장을 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지.”
“학교를 지키고 싶다고 한 거잖아.”
“그게 회장이 되고 싶은 거지.”
“엄마는!”
더 이상 두 사람의 목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었을 무렵, 바닥을 닦고 있던 일봉이 힐끔 진혁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사장님, 저 애 불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시켜 주려고 일부러 주방에 데리고 온 거예요?”
“아니, 그 반대야.”
“네?”
진혁은 어젯밤의 대화를 떠올렸다.
‘엉뚱한 사람에게 피해 오게 하지 말고, 네가 빵을 망치고 싶으면 네가 망쳐.’
‘그, 그럼 제가 직접 빵을 만들게 해주세요!’
‘네가 일부러 망친 빵을 납품한 나는? 우리 가게는?’
‘그, 그건…….’
‘밀가루 날리는 헛소리 하지 말고, 곱게 들어가서 자라. 꼬맹이답게.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꼬마 같으니라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상대해 준 것은 아이의 눈매가 누군가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동은 달랐다.
‘무서운 줄 알아요!’
아이가 울컥하며 외쳤다. 소년은 소매를 걷어 보이며 팔 전체를 뒤덮은 화상을 보였다.
‘전 불이 무서워요. 화상으로 엄청 고생했어요.’
‘그럼, 이렇게 하자.’
진혁이 씨익 웃었다.
‘너희 어머니가 주문한 블랙 어니언 타르트는 불을 대단히 많이 쓰는 요리야.’
‘그런데요?’
‘네가 내일 오후에 너희 어머니보다 더 일찍 와 봐. 네가 불을 써서 30분간, 요리를 망치지 않고 해내면 내가 네 부탁을 들어주지.’
‘제 부탁이 뭔데요? 맛없는 빵 만드는 거요?’
‘네가 빵을 망치고 싶을 정도로 학생회장을 하기 싫다고, 어머니에게 말할 기회를 주겠다는 거다, 멍청아.’
‘어.’
‘수단과 목적을 헷갈리지 마, 어디서든.’
‘…….’
‘내일 빵을 구우러 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그리고 아이는 시간에 맞추어 나타났고, 용감하게 불 앞에 섰다.
“뼛속까지 깊이 새겨진 공포에 맞설 줄 아는 남자는, 나이에 상관없이 존중받아야 하지.”
“작은 사장님?”
“딱히 도와준 게 아니야. 그냥 재미 삼아 시켜 본 거지.”
“작은 사장님은 역시 그릇이 크셔서…….”
그가 일월신교 훈련생의 몸에 들어가 버렸을 때, 처음에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다. 20대의 몸, 그리고 현실! 완전히 마비되었던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기뻤지만 죽음과도 같은 훈련을 매일같이 계속하면서 꿈일 거라고 울부짖었다. 그런 진혁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있었다.
‘불을 무서워하는 점이 그 녀석이랑 닮았어.’
그 녀석은 집과 부모를 전부 화재로 잃었다고 했다. 조그마한 불씨만 보여도 깜짝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만큼 어둠 속에서 눈이 밝았고, 그것을 강점으로 삼아 훌륭한 자객으로 거듭났다.
‘결국 내가 죽여야 했지만.’
훈련생 백 명 중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명뿐.
가족에게 돌아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사장님? 마음이 따뜻한 사장님?”
진혁이 잠시 사색하는 동안 일봉이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그건 아니다.”
진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서 덧붙였다.
“아참, 블랙 어니언 타르트와 치킨 파이 350개 주문은 듣던 대로 취소다.”
“아…….”
일봉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진혁이 물었다.
“벌써 주문 들어갔냐?”
“사실 큰 사장님이 저희 집 닭으로 주문 넣어주신다고 했거든요…….”
“허어.”
“서른 마리 넘게 주문한다고 가격 맞춰줄 수 있냐고 하셨는데, 아버지한테 미리 운을 띄웠더니 마침 나이 든 닭들이 있다고 좋아하셨어서.”
“흐으으으음.”
“그런데 정식으로 거래가 오간 것도 아니고, 괜찮아요. 그리고 사실 작은 사장님 치킨 파이는 보통 토종닭을 써도 맛있으니까 굳이 저희 농장 닭을 안 쓰셔도 괜찮고.”
괜찮다, 괜찮다고 말하는데 얼굴은 시무룩하기 그지없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치킨 파이는 오늘 몇 개나 나갔지?”
“오전에 매진이요.”
일봉이 바로 대답했다.
“오늘은 블랙 어니언 타르트보다 치킨 파이가 훨씬 더 빨리 없어졌어요. 그리고 오후에 찾는 사람도 많았고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혁이 말했다.
“너희 농장 이름이 뭔데?”
“평화 일봉 농장이요.”
“샘플을 가져와 봐.”
“예? 무슨 샘플요?”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콜라보레이션 같은 거지. 자연 방목하는 평화 일봉 농장의 닭을 사용해서 만든 프리미엄 치킨 파이, 라고 해서 값을 더 받으면 좋겠지.”
“작은 사장님……!!”
“덥다, 저리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일봉이 기뻐하며 마치 포옹이라도 할 듯 달려들었다. 진혁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신체 접촉을 미연에 방지했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일봉이 바닥에 고꾸라질 뻔했다.
“샘플을 써 보고 맛이 안 좋으면 안 받을 거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일봉은 수없이 허리를 숙이며 고마워했다.
“됐고 일이나 해.”
“감사합니다!”
특별히 아이를 돕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일봉이 곤란해 보여서 챙겨 주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가게를 정리하기 위해 물건들을 나르다가 일봉이 말했다.
“저는 작은 사장님이 애를 데리고 주방에서 들어가 요리를 하게 시켜서, 애 엄마가 부탁한 줄 알았어요.”
“업무 체험도 아니고, 그런걸 애 엄마가 왜 부탁해?”
“그러니까요.”
일봉이 환하게 웃었다.
“사장님 같은 분하고 같이 일해서 너무 좋아요. 진짜 많이 배웁니다. 아참, 그리고 데코레이션 페어에 나가는 건 다음 주 금요일입니다.”
“교수들이 허락했어?”
“예, 진짜로 좋아하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이리로 한번 찾아오신다는데요?”
“호.”
“가게 때문에 바쁠 텐데, 학교까지 오라고 하면 그날은 가게 문을 닫아야 하니까. 다음 주에 사흘을 빠지셔야 하니까요.”
“사흘? 그렇게나?”
무표정한 얼굴이다. 하지만 며칠 동안 진혁을 살펴보았던 일봉은 진혁이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큰 사장님도 이미 알고 계세요. 그리고 그 사흘 동안 제가 와서 계속 도울 거예요. 사모님도 나오신다고 하더라구요.”
“그래.”
이미 나가기로 한 것을 취소할 수는 없다.
‘사흘 치의 반죽은 미리 전부 해두고 가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