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20화
‘멍청한 놈들이었지. 하지만 기술은 쓸만해.’
그는 왼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작은 바람이 한 줄기 스쳐 지나가고, 새끼손가락에서 핏방울이 두 방울 떨어졌다. 강한 내공을 가진 자의, 진기가 서린 핏방울은 어린아이의 피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나이를 고려한다면 나도 동남이라고 할 수 있고.’
진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동자공을 익힌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자를 만나는 것은 바쁜 삶에서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초반에는 오직 생존만이 우선이었다. 소 교주라는 지위를 얻고 난 후에는 정략적으로 짝을 맺어주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그 음흉한 속내가 보여 전부 거절했다.
중력의 힘을 거스르고 하늘로 떠오른 핏방울은 거미줄처럼 가늘어져 허공에 두 줄의 시구를 그렸다. 주문(呪文)을 담은 글귀는 더 이상 붉은색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고 얇은 판막처럼 길게 늘어져 구두의 표면을 전부 감쌌다. 그리고 구두 안쪽으로 흡수되어 빨려 들어갔다. 주문을 입어 새로 다듬어진 양가죽이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어머니를 지켜라. 충격을 흡수하고 발이 편하게 해 드려.”
진혁이 말했다. 무언가 잊은 것은 없나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인다.
“……하는 김에, 구두 표면도 지키고.”
이제 이 구두는 어머니를 아주 편하게 해줄 것이다.
그때 바깥에서 아주 얕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기껏해야 35kg 정도일까, 타박타박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는 진혁이 이미 들어본 것이었다.
벨을 울리지 않고 문앞에서 서성이는 발걸음 소리.
‘부녀회장의 아들이군.’
설탕이 들어간 음식도 규제하는 어머니가, 밤 10시라는 시간에 아들이 혼자 남의 집 앞에 가도록 허락했을 리가 없다.
‘……흠. 어린애의 일탈인가.’
진혁은 문밖으로 나가 보았다.
“빠, 빵집 아저씨.”
아이가 절박한 얼굴로 말했다.
중원이라면…… 초등학교 5학년생이라고 해도 사실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백정의 아들이라면 돼지의 멱을 따고, 대장장이의 아들이라면 벌써 자그마한 말발굽 같은 건 직접 주조할 나이다.
일월신교의 제자라면 벌써 부모님과 헤어지고 수련을 시작해서 이미 첫 번째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역량을 증명했어야 할 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니까.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신을 두려워하며 존경하지 않는 아이를 보는 기분은 생경하다. 조금은 싫지 않다고나 할까.
‘보기만 하면 바닥에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려서 얼음같이 굳어버리니까. 얼굴을 본 적이 있어야지. 애들 얼굴이란 건 이렇게 조그맣구만. 확실히 여기 애들도 어른도 비리비리하긴 해.’
“이번 주 금요일에 올 빵은 언제 만드세요?”
“……당일날 굽지.”
진혁이 대답하는데 아이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무언가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같이 망설이다가, 간신히 말을 뱉어냈다.
“그거 안 구우면 안 돼요?”
“이유는?”
아이가 자기 머리카락을 꼬면서 어렵게 말했다.
“저는 그 애가 나아서 돌아왔으면 좋겠거든요…….”
“그 애?”
“진짜 전교 학생회장이요.”
“……남자애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영이만큼 전교 회장에 잘 어울리는 애가 없어요. 지금 잠깐 아픈 거고 금방 학교에 돌아올 텐데, 돌아와서 더 이상 회장이 아니면 안 되잖아요.”
진혁이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물었다.
“자, 생각해보자. 내가 빵을 안 만든다고 걔가 낫냐?”
아이가 손톱을 깨물며 대답했다.
“……아니요.”
“너희 어머니가 이미 빵을 주문했지?”
“예.”
“그런데 내가 빵을 안 만들면 어떻게 되겠어?”
“……돈을 못 받는다?”
“신의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 되니까 곤란해지겠지.”
“그렇…… 겠네요.”
아이의 어깨가 축 처졌다.
“사람은 어디서든 신의를 지켜야 하는 거야.”
쓸데없이 스승이나 할 법한 이야기를 해 버렸다.
“그럼 빵을 맛없게 만들어 주시면 안 돼요?”
“음?”
진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저씨가 만든 빵은 너무 맛있어요.”
“그래서?”
“그걸 우리 엄마가 잔뜩 사 오면 제가 회장이 될 수밖에 없다구요. 조금만…… 조금만 맛없게 해 주시면 안 돼요? 제가 도영이, 학생회장한테 네가 없는 동안 내가 학교를 잘 지키고 있겠다고 했는데요. 내가 회장을 해 버리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거잖아요.”
진혁이 입을 열었다.
“그럴 때는 말이지…….”
◈ ◈ ◈
아이를 보내고 온 다음, 진혁은 안방 문 너머에 섰다. 두 분이 잠들어 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진혁은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침대 곁에 다가섰다.
‘당뇨 전 단계라고.’
최근 들어 빵 맛이 좋다며 어머니가 빵을 드시는 일이 많았다. 진혁이 일부러 따로 챙겨서 가져다 드리기도 했다. 단맛을 즐기시는 어머니이기에 특히, 헌드레드 초콜릿 쿠키처럼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식을 많이 챙겨 드렸다.
‘내가 생각 없이 행동했어.’
어머니는 옆으로 누워 계셨다. 여름용 얇은 홑이불을 걷어내고, 어머니의 등에 양손을 가져다 댔다. 진혁은 아주 천천히 극미량의 진기를 흘려보냈다.
‘……확실히, 좋은 상태는 아니야.’
어떻게 보면 금 씨 할매보다도 더 몸이 안 좋다고 할 수 있다.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탁기가 가득 쌓여 있다. 특히 내장 부분이 좋지 않다.
진혁은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내공은 이미 전성기 때의 구 할을 회복하였다. 육체에는 완전히 익숙해졌다. 악력을 비롯한 신체적인 힘은 오 할을 회복하였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환골탈태를 하셔야 할 필요가 있어.’
암보험에 가입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미리 검진해서 암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되어도 가혹한 항암치료가 시작될 뿐이다. 병원에 오래 누워 있었던 진혁은 어머니가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예 암 따위가 발병할 생각도 못 하게, 건강한 몸으로 만들어 드려야 해.’
하지만 지금 순식간에 환골탈태가 이루어진다면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근골부터 바뀌는데 내장만 환골탈태를 할 순 없으니까…….’
진혁은 무학의 근본부터 다시 고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오늘은 진기로 탁기의 일부를 흩어 버릴 수밖에 없어. 앞으로 일 년. 그 안에 방법을 찾아내야 해.’
6장
다음날.
진혁이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부녀회장 연락처 알고 계시죠?”
“알지. 어제 주문하면서 따로 안 받았구나?”
어머니가 웃었다.
“우리 기특한 아들 녀석이 실수하기도 하네. 여기 있어, 이리로 연락하면 돼.”
“예. 아참, 어머니.”
“응?”
이제 막 나가려던 어머니가 뒤를 돌아보았다. 예전에 신던, 낡아빠진 검은색 단화를 다시 신으려고 한다. 진혁이 앞에 나가서 무릎을 꿇었다.
“제가 신발 신겨 드릴게요.”
“이건…….”
어머니가 난색을 보였다.
“너희들이 선물해 준 건데 신고 다니다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니.”
“어젯밤에 기름칠도 하고, 손질을 좀 해서 벗겨지지 않게 해 놨어요.”
“얘가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웠어?”
“봐요, 만져 보세요.”
진혁이 구두를 들어 올려 보여 드렸다. 구두를 만져 본 어머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구두 광택이 바뀌었어. 조금 더 고급스러워진 것 같은데?”
“그렇죠. 아주 특별한 광택제를 발랐거든요.”
어머니가 피식 웃었다.
“가죽 윤기 내는 게 거기서 거기지. 군대에서 가르쳐 줬어?”
“비슷해요. 자자, 속는 셈 치고 신어보세요.”
무릎을 꿇고 앉은 진혁이 구두를 들어 올리자 어머니가 피식 웃었다. 구두 안쪽에 발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게 구두 가게 사장님 같네.”
마디가 튀어나온 엄지발가락 발톱에는 반쯤 지워진 붉은 매니큐어가 얼룩덜룩하다. 얇은 살색 스타킹도 두 군데 줄이 나가 있다. 언제라도 올이 풀릴지 모른다. 진혁은 머리 한구석에 기억해 두었다.
‘어머니가 신는 스타킹도 싹 갈아서 새로 사 두라고 할 것.’
“어머! 구두 안쪽에도 뭘 발랐니? 구두가 아주 발에 착 달라붙네.”
어머니가 탄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새 구두라서 길이 아직 안 들었는데, 밤사이에 구둣볼을 넓혔어? 볼 넓히는 기구 없잖아.”
“밤 동안에 해 뒀어요.”
“그래, 고맙다. 역시 우리 아들밖에 없네.”
어머니는 시계를 보고 급히 일어났다.
“벌써 이 시간이네. 너도 어서 준비해서 나가렴.”
“네.”
“오늘도 수고해.”
새벽 4시 30분. 어머니가 첫차를 타고 파출부로 일하러 멀리 가는 시간. 진혁이 빵집에 나가는 시간보다 20분 더 이른 시간이다.
5시까지 가서 빵을 만드는 진혁보다 더 일찍 나가시는 어머니.
집에 돌아오면 밤늦게까지 다음날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만드신다. 빨래와 청소는 평일에 하루, 몰아서 한다. 이틀 쉬는 날 중 하루는 빵집에 나와서 일을 도우신다. 하지만 이번에 진혁이 계속 일을 도우면서, 어머니는 집에서 하루를 쉬시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좀 더 일찍 암이 발병하지 않은 게 이상한 정도의 일정이야.’
“엄마.”
“응?”
나가던 어머니가 등 뒤를 돌아보았다.
“가게 매출이 점점 더 오르고 있으니까, 어머니도 이제 일 그만두셔도 돼요.”
“에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어머니가 말했다.
“가게 매출은 좋다가도 나쁘다가도 하는 거라서, 만약을 위해서 엄마가 일을 하는 게 좋지. 건강한 몸뚱어리로 놀아서 뭣에 쓴다니.”
타닥, 타닥, 타닥.
어머니는 구두를 신고서 경쾌하게 뛰어가셨다. 날아갈 것처럼 신나 보인다.
“엄마 진짜 간다!”
“네!”
◈ ◈ ◈
저녁 6시경. 보통은 빵이 다 떨어져 갈 시간. 마지막 굽기도 한 시간 전에 끝났다.
“오후가 아니라 저녁에 오라고 한 이유가 뭐예요?”
부녀회장은 인사보다 먼저 질문을 던졌다.
“네?”
나가서 인사하던 일봉이 당황했다.
“저희 사장님하고 약속하셨어요?”
“네. 블랙어니언 타르트 따로 빼놓는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우리 애하고도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꼬마 주방장님 어머님이시구나! 지금 주방에서 같이 만들고 있어요.”
“뭐요?! 우리 애가 지금 주방에 있다고요?!”
부녀회장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선명하게 화장한 얼굴이 일그러지며, 정장이 구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우리 애는 어렸을 때 화상을 입었던 적이 있어서 불을 무서워한단 말이에요! 환희야!”
“드, 들어가시면 안 되는데,”
일봉이 막으려 했지만 부녀회장은 밀치고 주방 쪽문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의자 위에 올라서서 양파를 내려다보며 젓고 있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하얀 스카프를 에이프런처럼 허리에 둘렀고, 거기에는 이미 여러 얼룩이 져 있다. 훌륭한 꼬마 요리사처럼 보인다.
“환희야!”
부녀회장이 일그러진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환희는 두려워하고 있지도, 무서워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조심스럽게 뒤집개로 양파를 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