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18화
“얘 손힘이 장난 아니에요. 반죽을 순식간에 해치워요. 무슨 반죽만 만 번은 한 것 같이. 작은 사장님이랑 비슷하게 천재 끼가 있어요.”
화면 속의 청년은 부리를 다물 줄 모르는 종달새처럼 쉴 새 없이 불어로 재잘거렸다.
-마카롱은 진짜로 만들기 쉬운 과자로, 세상에서 제일 만들기 쉽다고 할 수 있죠. 재료도 많지 않아요.
순식간에 머랭을 만들고 아몬드와 설탕 가루를 넣은 후 바로 반죽한다. 순식간에 짤주머니로 짜낸 마카롱 반죽이 접시 위에 뾰롱뾰롱 올라왔다.
“솜씨가 깔끔하고 손도 빠르네.”
아버지가 평했다.
“잘 하는구만.”
“허.”
일봉이 말했다.
“맛만 있는 것도 아니고 데코도 너무 잘해서. 걔가 입학한 다음부턴 우리 학교가 올킬이에요. 향경전도 지고, 시즌 디저트 페어도 졌고, 윈터 스위트 케이크 페스티벌에서도 졌어요. 봄딸기빙수전도 졌고요.”
화면 속의 남자는 다 만들어진 마카롱 위에 조그맣게 얼굴을 그려 넣었다. 점이 톡, 톡, 톡. 점묘법인데 순식간에 유명한 그림이 되었다.
“흠.”
“선배가 지금 졸업하신 것도 아니고 휴학하신 상태면…… 솔직히 제가 사퇴하고 그 자리에 선배가 있으시면 걔를 완전 깨부술 수 있을 거 같거든요.”
일봉이 열성적으로 말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 눈을 보면서 진혁은 아득한 옛날 자신이 다니던 학교와 1학년 때의 향경전을 기억해보려 노력해 보았다.
‘너무 옛날이라 생각이 잘 안 나.’
드높은 푸른 하늘, 그리고 펼쳐져 있는 크고 작은 하얗고 파란 천막들. 그 아래에서 열성적으로 달걀 빵이나 핫도그 같은 것을 구워 파는 학교 축제였던가.
수십 년 동안 잊고 살던 학교다. 마음속 깊숙이 남아 있는 아주 흐릿한 라이벌 의식…… 과연 여기에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을까?
진혁은 잠시 생각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됐다, 애들 놀이도 아니고 무슨. 아버지 가게 돕는 것만도 바빠.”
흥미롭게 듣고 있던 아버지가 말했다.
“그거 나가면 상품 같은 건 없냐?”
“상이 있긴 한데 사실 이미 학교에는 있어서, 필요 없는 물건이에요.”
“그게 뭔데?”
“상업용 대형 제과용 오븐이…….”
진혁이 갑자기 눈을 빛냈다.
“그 오븐을 나한테 준다고 하면 나가 보지.”
“오븐은 팀전이 아니고 개인전 상품이에요.”
“개인전 출전 자격은?”
“향인대 학생이면 돼요.”
“휴학 중이어도 상관없어?”
“아마 괜찮을 텐데…… 제가 물어볼게요.”
일봉이 열렬하게 말했다.
“이번에 작은 사장님이 만드신 크림슨 트리플 케이크요, 우리 교수님들도 먹어 봤거든요. 장난 아니게 칭찬했어요. 작은 사장, 아니 선배님이 나가신다고 하면 다들 쌍수 들고 환영할 겁니다. 지금 강 마리오를 이겨준다고 하면,“
선후배의 대화를 지켜보던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자, 이번에는 팥빵을 할 시간이다.”
아버지는 아까 숙성시킨 반죽들을 꺼내며 일봉에게 물었다.
“그럼 뭘 준비해야 하지?”
“아까 만들어 놓은 팥 속이요.”
“그렇지. 보통은 빵을 발효하는 도중에 팥 속을 만들어. 그런데 우리는 씹히는 맛을 주려고 안에 팥 알갱이를 추가하느라…….”
“아! 이렇게 만들어서 그 맛이 나는군요.”
“그렇지. 그렇게 하는 거다.”
일봉을 가르치면서 아버지는 웃음이 늘었다. 아버지가 드러나게 웃지는 않아도 계속해서 눈이 웃고 있다고나 할까.
‘……아버지는 누군가를 가르치면서 즐거워하시는구나.’
진혁은 뒤늦게 깨달았다. 진혁 자신이 배우고 있을 때는 몰랐다. 옆에서 지켜보니까 알겠다.
진혁은 아버지에게 뛰어난 능력을 선보여 드렸다. 아버지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놀라운 모양과 맛의 음식들. 크림슨 트리플 치즈 케이크. 그밖에도 많은 과자와 빵들.
지금은 마늘 아이스크림을 곁들인 치킨 파이까지 내놓았다.
‘멋지고 훌륭한 음식을 만들어내고 매출이 늘어나면 아버지께서 무조건 좋아하시리라 생각했는데.’
물론 기뻐하시고 자랑스러워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 젊다. 50 대 중반…… 한창 일할 나이에 아들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면 어떨까. 누구에게나 질투심은 있다.
‘혈도객의 아버지 같은 미친놈도 있었으니까.’
혈도객의 아버지는 정파의 인물이었다. 장남이 가전도법을 전수받으며 뛰어난 실력을 보이자 처음에는 기뻐했다. 하지만 십 대 소년이 자신의 성취를 뛰어넘으려 하자 한밤중에 아들을 습격했다. 뛰어난 무공 실력을 갖춘 꼬마 혈도객은 야밤에 쳐들어온 자객의 몸을 반으로 갈라 죽였고, 자신을 죽이려 든 자가 아버지였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아버지의 시체를 묻어버리고 부친을 실종 처리하는 편이 제일 좋았겠지만, 혈도객은 그렇게 주도면밀한 자가 못 되었다.
‘광안마였으면 아비와 함께 여자 하나를 묻어버렸을 것이야. 실종 발표를 한 다음, 적당히 수습해서 집안을 꾸려갔겠지.’
하지만 혈도객은 광안마 같은 놈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아비를 죽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집안을 떠났다. 어미 다른 남동생이 추격을 위해 보낸 자객에게 쫓기며 진혁을 만났다. 정확히는 열흘간 동안 자객들을 따돌리고 죽이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피 칠갑이 되어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진혁이 주웠다.
‘부하 놈들 중에서 가장 정파에 어울리는 놈이었지.’
자신은 하늘을 가르는 패륜을 저질렀다며 울부짖는 놈의 뒤통수를 때려서 기절시켰다. 깨어나서는 죽이라며 아득바득 외치다가 자신을 죽이러 온 자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쪼르르 따라왔다. 만두와 죽엽청을 먹여 줬더니 알아서 이야기를 술술 토해냈다. 생각보다 도를 쓰는 솜씨가 좋아서 연습 상대로 계속 상대해 줬는데 광안마가 뭐라고 꼬드겼는지 아버지로 모시겠다며(?) 나이도 비슷한 놈이 무릎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천륜을 새로 짓겠다는 헛소리를 하면서 말이다.
어미 만난 오리처럼 졸졸졸 여기도 따라오고 저기도 따라오던 녀석. 알아서 잘 싸우고 있는데 자기가 양아버지(……) 대신 칼을 받겠다며 뛰쳐나오는, 융통성도 없고 대책도 없는 놈이었다.
‘광안마하고 혈도객을 반 섞어 놓으면 딱 정상인이 됐을 텐데.’
아차,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해 버렸다.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진혁은 모른다. 오해하기 전에 직접 물어봐야 한다.
‘나중에…… 나중에.’
차라리 새벽에 나와서 미리 많은 양의 반죽을 미리 해두고 청소를 하면 했지,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은 간지럽고 번거롭다.
‘혹시 제가 빵을 너무 잘 만들어서 신경 쓰이십니까…… 라고 말할 수도 없고.’
◈ ◈ ◈
그날도 빵은 잘 팔렸다.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하지만 일봉을 가르치는 아버지는 손님을 대할 때보다 더 신나 했다.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원래는 저 자리에 내가 있었는데.’
기초부터 꼼꼼하게 하나하나 가르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진혁은 생각했다.
‘확실히 가르칠 때 더 좋아하셔. 장년이 되면 누구나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고 싶어지는 건가.’
일봉이를 보내고 돌아가는 길, 아버지가 말했다.
“진혁아, 상품 때문에 무리하게 대회에 나가느니 어쩌느니 할 필요는 없다. 정말 필요한 물건이면 돈을 주고 사면 되니까.”
“음.”
“너는 지금도 충분히 잘 해주고 있어.”
“네.”
“아비가 낡은 오븐을 고집하니까 새 오븐을 들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잘 알겠다.”
‘사실은…… 저는 빵을 굽는 데 오븐이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
극단적으로 말하면 구석에 진법을 하나 설치한 다음 거기에 빵을 놓고 구워도 된다. 보건소에서 주방 점검을 나온다면 빼도 박을 수 없으므로 그렇게 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제 저희도 구워내는 빵 개수도 늘고. 주방에 사람도 하나 늘었고. 중간중간 기다리는 시간 생각도 하면 작은 오븐이 하나 더 있어도 나쁠 건 없죠. 어떤 모델이냐에 따라서 다르지만.”
진혁이 새로운 빵을 양강지기로 구워내는 동안 능력 좋은 오븐인 척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미 기존 오븐의 화력을 전부 알고 있는 아버지 앞에서 기존 오븐에 수작을 부릴 수는 없다.
‘화염기망진(火焰欺妄陣)을 설치해서, 화력을 좀 더 올리고 안정적으로 만들고 싶은데.’
화염기망진은 진혁이 한창 사술을 찾아 헤맬 때 익혔던 잡기 중의 하나다. 몇 가지 촉매를 이용해서 불꽃을 자유자재로 피워올려 조절할 수 있다. 보통 목재 주택에 화공을 사용할 때 쓰는 경우가 많다.
“내가 왜 계속 괜찮다, 괜찮다 했는지 좀 생각해 봤다.”
아버지가 말을 꺼냈다.
“아비는 그 낡은 오븐이 좋아. 이런 말 하면 주책 같지만…….”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 가게를 처음 세울 때부터 쓰던 오븐이야. 내 친구 놈이 사준 거지. 그리고 산에 가서 죽어버렸어.”
“아.”
“원래 그 산악회에 나도 같이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 느이 엄마가 애를 임신하고 있어서. 김천욱 그놈이 나도 그 곁에 있으라고 하더니…….”
“예.”
“가다가 크게 교통사고가 나서, 산악회에 간 모든 사람이 다 죽어버렸어. 아홉 살짜리 애랑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내를 남기고…….”
아버지가 쯧쯧, 혀를 찼다. 이마의 주름이 깊어졌다.
“천욱이 그놈은 의사였으니까. 돈이 좀 있었어. 내가 가게를 차릴 때도 많이 도와줬지.”
“그렇군요.”
“내가 빵집을 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막말로 빵집은 내가 급사를 해도 아내가 물려받아서 어떻게든 운영을 할 수 있으니까. 늬 엄마가 제빵기능사 자격증도 갖고 있는 건 알지? 내가 그때 빨리 따 두라고 난리를 쳤지.”
이미 들었던 이야기다. 하지만 고통스러워 하며 죽은 친우 아들의 배신을 말하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말하면서 조금 더 편해 보였다.
“하지만 의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지. 부잣집 외동딸로 곱게 자라 의사 사모님으로 불리던 분이 고생을 많이 했어. 찬욱이가 그렇게 가고, 충격을 많이 받았는지 정신을 놓은 것 같더라고. 남은 재산이 집 두 채인가 있었는데 그나마도 사기를 당했는지 금방 날렸고……“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우울증이 치매로 발전하기도 한다던데, 그래서일지도 모르겠군…….’
“나는 은혜를 갚으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더구나. 병문안을 갔는데 찬일이 그놈이 죄송하다고 울더라. 어미 모시고 어디 지방에 내려가기로 했나 보더라고.”
‘내가 말한 대로 이 근처에서 사라지기로 했군.’
“잘 됐군요.”
아버지가 진혁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곳을 보며 말했다. 담장 위에서 회색 고양이가 이파리들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이제 이십 대 초반, 내가 그 나이 때는 뭐 했나 생각하면 부끄러울 정도야.”
“…….”
마치 그 고양이에게 이야기를 거는 것처럼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면 약간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기초는 물론이고 빵을 만들어내는 솜씨도 훌륭하고. 여기에만 있기에는 아까워.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했으면 좋겠어.”
“…….”
“나는 네 발목을 잡고 싶지는 않다. 이제 아르바이트생도 구했으니, 대회건, 호텔 인턴십이건, 네가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하려무나. ”
어렵게 속에 꾹꾹 뭉쳐 놓았던 속마음을 풀어놓으며 홀가분하게 아버지가 웃었다.
“아비가 이 가게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아버지는 나에 대해 질투를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었어. 아들에게 부족한 아버지가 발목을 잡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계셨다.’
진혁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왜?”
“감사합니다.”
“뭐가.”
“그냥요.”
“자식, 실없기는.”
가로등에서 아스라이 내리쬐는 빛이 두 사람을 비추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