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17화
진혁이 씩 웃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아버지가 조심스레 작은 것에 손을 가져갔다.
“그거, 입안에서 육즙이 터지거든요. 스푼에 육즙이 새어 나오게 한 다음에, 파이지에 육즙을 적셔서 고기와 함께 드셔 보세요.”
“우와…… 이건…….”
제일 작은 것은 생강으로 잡내만 잡아서 간을 해둔 치킨 경단 빵이다. 아버지가 눈을 감고 맛에 집중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고서야 아버지가 감탄하며 말했다.
“완전히 소금구이 통닭 맛인데? 같이 들어 있는 바삭바삭한 이건…….”
“따로 바삭바삭하게 구운 닭 껍질이죠.”
“그래. 빵이라기보다 안줏감이야. 맥주하고 같이 먹으면 딱 좋겠는데.”
짭조름한 국물이 입안으로 퍼지고, 얇고 바삭한 빵 껍질이 함께 녹아가며 춤춘다. 순식간에 조그맣게 구워나온 경단 크기의 파이가 다 없어졌다. 진혁도 한 개를 맛보았다.
‘어제 그 치킨보다는 맛을 살려놓았지만, 아무래도 조금 부족해. 역시 재료 때문인가.’
하지만 진혁의 냉정한 평가와 달리 두 사람은 극찬했다.
“겉에는 바삭바삭하다가 안에 갑자기 국물이 나오는 게 진짜 신의 한 수네요.”
일봉이 중간 크기의 파이를 집었다. 경단 모양으로 동그랗게 뭉쳐 둔, 제일 작은 것과 달리 여기서부터는 평범한 타르트 모양의 은박지 위에 놓여 있다.
“이것도 안에서 국물 나와요? 젊은 사부님.”
입천장을 델 뻔했지만 너무 맛있었다던 일봉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갑자기 사장님에서 사부님이 됐지?”
“하…… 이런 걸 맛보고 어떻게 사부님이라고 안 부를 수가 있어요.”
눈치만 보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능청을 떤다. 맛있는 것을 먹고 약간 긴장이 풀렸는지 재잘재잘 잘도 떠든다.
“저랑 두 살 차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게…… 어렸을 때부터 계속 제빵을 배우신 거죠? 이렇게 얇게 반죽을 뽑아내는 솜씨가.”
일봉은 우물거리면서도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파이 껍질이 이렇게 얇은데. 껍질 밖으로 육즙이 새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파이지를 바삭바삭하게 유지할 수가 있죠?”
“안쪽 파이지는 촘촘하게 하면 되지. 국물이 바깥으로 나오지 않게.”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그냥 하면 돼.”
“……그냥…… 그냥이라고요…….”
진혁이 웃었다.
손바닥만 한 제일 큰 파이는 모양부터 다르다. 제일 작은 경단, 거기에 이어 은박지 위에 놓여 있던 미니 타르트 형태.
“이 미니 타르트는 양념치킨 맛이 나요.”
“그렇지?”
“뭐로 양념하신 거예요?”
“다진 마늘하고 토마토케첩, 고추장하고 고춧가루, 간장과 메이플시럽, 그리고 숨김맛으로 계피.”
“진짜 파는 양념치킨 같은데.”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손바닥만 한 치킨 파이들! 가늘게 뽑은 파이 반죽을 십자 모양으로 엇갈리게 쌓아두었다.
크림과 육수와 함께 볶은 닭고기에 고추장과 케첩으로 간을 보탰다.
“와……!”
정말로 맛있으면 맛있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이게 진짜 양념치킨 맛이네요.”
“마지막 건 영국식이네.”
“양념만 좀 바꿨죠.”
“좀이 아닌데. 이건 크림 파스타와 고추장 김치 파스타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생크림이랑 버터로 볶는 크림스튜를 양념치킨 맛으로 만들었잖아. 이건 정말로…….”
아버지가 말을 잇지 못했다. 일봉은 세 가지 맛을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큰소리로 외쳤다.
“소금구이 치킨, 갈릭 후라이드 치킨, 그리고 매운 양념치킨…… 이거 설마 처음부터 세 가지 맛 치킨을 전부 살려내려고 세 종류로 만드신 겁니까?!”
“그렇지?”
일봉이 눈을 껌뻑거렸다.
“와…… 진짜……. 젊은 사부님은.”
“사부님은 정말 아니다.”
“선배님!! 선배님이라고 부르게 해 주세요!!”
‘이런 성격이었냐?’
시럽 바른 블루베리처럼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가 매우 부담스럽다. 진혁은 화제를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세 번째는 사실 사이드로 아이스크림을 낼까도 생각했는데.”
“우와! 아이스크림까지 하세요?”
“아이스크림은…… 설마 그걸로 만들었냐?”
진혁이 설명했다.
“맞아요, 옛날에 아버지가 사두신 아이스크림 제조기 있잖아요.”
“아이스크림 샌드가 한창 유행할 때 샀던 거?”
“그거 냉매 아직도 살아있어요. 시험 삼아 만들어 봤는데 잘 되더라고요.”
진혁이 냉동실을 열어 작게 얼려 둔 작은 그릇을 꺼냈다.
“양념치킨 파이하고 같이 드셔 보세요. 마늘 아이스크림입니다.”
그릇 안에 담긴 것은 금방이라도 사각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 노오란 아이스크림이었다. 시판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보다 조금 더 진한 색깔에, 딱 먹기 좋게 부드러운 상태다. 진혁이 둥근 스푼으로 동그랗게 아이스크림을 말아 올려 두 사람에게 두 스쿱씩 떠 주었다.
갈색으로 노릇노릇한 치킨 양념 파이가 따뜻한 김을 피워올리는 옆. 간장 종지 크기의 하얀 도자기 그릇 위에 노오란 아이스크림이 소복이 담겼다.
“마아아늘?!”
일봉이 입을 쩍 벌렸다.
“마늘 후레이크를 올린 생크림 아이스크림이요? 마늘 후레이크가 보이지 않는데…….”
“아냐, 구운 마늘즙을 유크림에 섞어 만든 아이스크림이지.”
“생김새만 보면 조금 진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인데.”
아버지가 스푼을 들었다. 진혁이 말렸다.
“그거 말고, 이 티스푼으로 드세요. 파이 한 입 먹고 이 아이스크림 한 입 드시고 하면 됩니다.”
사각사각.
아버지는 진혁이 준 티스푼을 사용해 아이스크림을 맛보았다.
“구운 마늘이…….”
입술에 닿아오는 차가운 마늘의 맛!
보통 구운 마늘은 항상 따뜻한 때 먹기 때문에 차가운 구운 마늘이라는 것은 맛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 맛은 따뜻한 치킨 파이와 조화를 이루며 입안에서 사르륵 녹았다. 일봉이 눈을 꿈쩍꿈쩍 떴다 감았다.
“이, 이거 둘이 너무 잘 어울리는데요…….”
“더 없냐?”
음식을 더 먹고 싶어 하는 일이 없는 아버지까지 더 달라고 할 정도의 맛이다.
‘닭고기가 생기가 없고 경직되어 있어서, 양념에 덧붙여 아이스크림도 만들기를 잘했군.
“양념치킨 파이에 곁들일 용도로 소량만 만들어서요. 이만큼 더 있어요.”
“……너도 먹어야지, 흠. 흠.”
“전 만들면서 많이 맛봐서 괜찮습니다.”
“그렇다면야….”
아버지는 사양하지 않고 남은 아이스크림을 전부 드셨다. 마지막 남은 한 입! 조그마한 아이스크림 더미를 바라보며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한 마디 덧붙였다.
“이거 너희 엄마가 먹으면 아주 좋아할 맛이다.”
“…따로 만들어서 챙겨 드릴게요.”
“아냐, 아예 주면 안 돼.”
“예?”
“실은 너희 어머니도 요즘 건강을 생각해야 할 때라서.”
“무슨 일 있나요?”
진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요즘 당뇨 위험군이라는 진단을 받아서 단것은 조심해야 돼.”
“……좀 더 신경 써야겠군요.”
“네가 신경 써서 뭐하냐, 본인이 신경을 써야지. 워낙 빵이니 단 것이니 하는 것들을 좋아해서 원.”
‘추궁과혈 정도로는 신체 내의 탁기를 충분히 몰아내지 못한 모양이야…….’
“오늘 저녁에 어머니와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군요.”
“그래. 먹을 걸 조심하라고 너도 이야기를 좀 해봐. 내가 하는 이야기는 잔소리로만 들리는 것 같으니, 원.”
‘그런 면담은 아니지만요.’
아직까지 치킨 파이의 여운에 잠겨 입을 다물고 눈 감고 있던 일봉이 드디어 눈을 떴다.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선배님. 혹시 TV 출연 같은 건 생각해보지 않으셨어요?”
“뭐? 여기서 빵 만들기만 해도 바쁜데 무슨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
일봉이 조심스레 말했다.
“사실은… 저희 학교에서 이번에 데코레이션 페어에 출전하는데… 그게 TV에 나오거든요.”
“그런데…?”
“제 실력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저희 학교에서 좀 잘하는 편이거든요.”
“네가?”
진혁이 되물었다. 주근깨 많은 일봉의 얼굴이 빨개졌다.
“선배님이 무시무시하게 잘하시는 거지 제가 특별히 못 하는 편은 아니에요. 제가 저희 학교에서 나름 탑 텐인데….”
“뭐, 그래.”
진혁은 그 대회에 대해 흥미를 잃었다. 이번에 가게에서 처음으로 대용량 오븐을 사용해 오븐을 굽는 일봉이다. 학교에서 연습하면서 몇백 번 구워 본 정도가 다일 것이다. 회귀 전의 진혁보다는 훨씬 나은 실력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의 진혁이 보기에는 어설프기 그지없다. 일단 서 있는 자세부터가 다르다.
“아시잖아요. 이번 데코레이션 페어가 저희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경대랑 같이하는 거. 이번에는 특별히 라이브 대결을 하거든요.”
“경대?”
진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양아치들이라면 당연히 이겨 줘야지.”
진혁과 일봉의 출신교인 향인대와 경운대는 이 지역 조리과에서는 탑3에 드는 학교다. 전통발효 빵과 쌀가루 빵, 건강에 좋은 빵을 추구하는 모교. 프랑스식 전통 빵을 추구하는 경운대. 이념부터 다른 두 학교는 몇십 년 전부터 계속 대립해 왔다. 교수진부터 학생들까지 서로 라이벌 의식을 갖고 경쟁하고 있다. 매년 5월에는 향경전, 또는 경향전이라고 불리는 축제를 함께하며 다섯 종류의 빵을 만드는데, 이때도 누가 더 잘 만들었는지를 두고 싸운다.
“그게…….”
“이길 자신이 없어?”
“거기 작년에 새로 입학한 애가 있는데, 얘가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에서 정통 제빵을 배웠대요.”
“조기유학생이야?”
“그건 아니고 아버지가 외교관이라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는데, 프랑스에서 오래 있었대요. 어렸을 때 빵만 만들면서 자랐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잘하긴 잘해요. 유튜브에 빵 만드는 영상도 맨날 올리고.”
“그래서?”
진혁이 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분명히 향인대가 향경전에서 계속 이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당연히 우리가 경운대보다 잘하지’ 라고 믿었다.
“요즘은 웰빙이 트렌드고, 우리 것이 우수하다고 하고, 건강을 중시하니까…… 당연히 우리가 이기는 거 아니야? 도대체 거기서 왜 지고 오는 거야?”
“그것도 그런데 걔가 만드는 게 너무 맛있어서요.”
일봉이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냈다. 유튜브에 들어가 ‘마리의 빵뜰리에’ 를 검색하자 바로 시리즈가 주루룩 떴다. 일봉은 그 중 ‘원숭이도 만들 수 있는 마리의 마카롱’ 편을 틀었다.
띠롱띠랑띵땡 하는 국적 불명의 효과음이 지난 다음 바로 주인공이 등장했다.
동그란 눈에 까만 눈썹이 짙은, 이목구비가 명확한 남자다. 호탕한 목소리로 쩌렁쩌렁하게 외치며 도마에 반죽을 내려찍는다.
-여러분, 안녕!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는 마리예요!
유창한 불어로 이야기하는데 아래에는 한국어 자막이 뜬다. 진혁이 떨떠름하게 영상을 바라보았다.
“뭐야?”
남자 이름이 왜 마리냐? 라는 느낌의 물음이다. 하지만 일봉의 대답은 다른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