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12화
“잠시만요, 아버지. 금방 깨어날 것 같아요.”
진혁은 찬일의 명문혈과 백회혈을 동시에 짚으며 진기를 살짝 흘려보냈다.
“커흑, 컥!”
영문도 모르고 의식을 되찾은 찬일이 멍한 눈으로 눈을 깜빡였다.
“퀘엑, 퀙!”
진혁이 컥컥대는 찬일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몸이 안 좋은 거 같은데 병원이라도 가보는 게 어때요?”
“허흠, 흠. 내가 갑자기 왜 이러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찬일이다.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찬일을 바라보았다. 진혁이 얼굴을 찡그리며 찬일을 업었다.
“요 앞에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자식, 힘세네.”
아무렇지 않게 자기보다 덩치가 큰 찬일을 업어 올리는 진혁을 보며 아버지가 눈을 끔뻑였다.
“빵 가게 말고 아예 병원까지 데려다 놓고, 괜찮은지 보고 와라.”
아버지가 진혁의 주머니에 지폐를 쑤셔 넣어 주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찬일을 업고 스위트 바게트 앞에 간 진혁이 가게 문을 탕! 하고 두드렸다. 큰 소리가 나며 아르바이트생 일봉이 고개를 내밀었다.
“어, 앞집 형님! 저희 사장님은 왜… 아니, 어디 안 좋으세요? 이마가 완전히 깨졌잖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 정 많은 아버지 앞에서 머리를 바닥에 쾅쾅 부딪히며 애를 썼지. 진혁이 대수롭지 않게 얼버무렸다.
“저 혼자 넘어지더라고.”
“넘어져도 하필 이마가 깨지나… 제가 데리고 병원에 갔다 올게요, 아니다. 형이…….”
일봉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라이벌 가게(?)의 형에게 이 가게를 맡겨도 되는 걸까?’
진혁이 선을 그었다.
“우리 가게에서 다쳤으니까 내가 병원에 데려가지. 그냥 알고 있으라고.”
정리해주자 일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이 문득 생각나 물었다.
“아참, 그리고 너 혹시 너희 사장네 긴급 연락처 같은 것 있냐?”
“여기, 여기 있어요!”
10㎞. 진혁에게는 결코 멀지 않은 거리를 가면 동화의원이 나온다. 이 동네에서 삼십 년째 개업하고 있는 작은 병원이다. 그 짧은 거리를 걸어가며 무심코 천마강림보를 써버렸기에 거의 순식간에 의원 앞에 도착해 버렸다. 그 짤막한 시간 동안 진혁은 갈등했다.
‘이 새끼를 백치로 만들어버릴까.’
아직 진혁이 어렸을 적, 진혁은 찬일을 싫어하지만은 않았다. 새벽같이 일어나 고된 일을 하는 게 대단하다고 느꼈다. 가끔 갓 구운 마들렌을 구워 진혁의 주머니에 집어넣어 주는 것도 좋았다. 갑자기 힘들다고 때려치우고 나간 이후에 소식이 없어 걱정하기도 했다.
‘월 십만 원 받고 부려먹는다고 생각했다고? 그렇다면 직접 물어보기라도 하든가! 우리 아버지의 인성 자체를 의심한 거지. 완전 떼어먹는다고.’
호감을 느꼈던 사람이기에 더 배신감을 느꼈고 더 화가 났다.
‘우리 집을 완전히 망하게 한 장본인이라고 들었다.’
왜 하필 여기에 가게를 열었느냔 말이다.
‘그것도 아주 보란 듯이. 우리 가게가 망할 때까지 신나게 영업했지.’
“접수하시겠어요?”
‘벌써 도착해 버렸군.’
백치로 만들고 싶었다면 바로 시행했어야 했다. 중원이었다면 아무 무리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되었을 일이다.
‘하지만 여기는 더 이상 그곳이 아니지. 그리고….’
진혁이 심원한 눈으로 찬일을 바라보았다.
‘저 자식. 한때 형이라고 불렀던 놈이지만… 저놈이 백치가 되면 분명히 아버지는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책임감을 가지실 것이다.’
“네, 네. 찬일이…… 형 어머니 되시죠? 네, 저 진혁입니다. 임운정 씨 아들요. 네, 찬일 형이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데리고 왔습니다. 접수하게 주민번호랑 개인정보가 필요한데 제가 모르니까요. 네, 간호사를 바꿔드리겠습니다.”
익숙한 남자 직원이 찬일을 부축해서 안으로 데려갔다. 접수가 진행되는 동안 진혁은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내가 사고 났을 때도 저 직원이 날 데려갔지.’
나중에 집안이 거덜 났을 때는 더 이상 큰 병원에 입원해 있을 돈이 없었다. 그때 받아준 병원이 이곳이었다. 이 병원으로 옮겨와 오래 입원해 있었다. 할아버지 의사가 거의 돈을 받지 않다시피 하고 진혁을 입원시켜주었다고 들었다.
‘여기에도 은혜를 갚아야 해.’
형이라고 부르기도 아깝다.
‘찬일이 새끼네 어머니만 아니었어도.’
그 어머니는 너무나 선량한 사람이다. 하나뿐인 아들놈은 저렇게 은혜도 모르는 놈인데.
진료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몸이 멀쩡하기 때문이다.
‘아까 진기를 흘려서 상태를 다 봐놨으니까 오히려 더 좋을 수밖에 없지.’
이마에 까진 부분에만 반창고를 붙인 찬일이 부들부들 떨면서 대기실로 나왔다.
계속해서 진혁을 피해 움츠러들고 있는 모습이다.
굳이 그 두려움이 가시게 할만한 행동을 하지 않은 진혁은 그대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아버지. 형은 괜찮다네요. 네, 네. 저는 가게로 갈게요. 찬일 형 어머니가 오신다네요.”
아버지 앞에서 형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야, 아버지를 안심시킬 수 있다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곧 달려온 찬일의 어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많이 다쳤대?”
“그냥 겉에만 살짝 까졌고 아무 문제 없대요.”
“애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아주 이상한데…….”
“잠깐 몸이 안 좋았나 봐요.”
진혁이 어깨를 툭툭 쳐주자 찬일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기합이 들어 말했다.
“어, 응! 엄마! 난 진짜 괜찮아!”
찬일 어머니가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훔치며 말했다.
“허세 부리긴. 애가 겉멋이 많이 들어서. 얘가 너희 집에서 일하다가 민폐를 많이 끼쳤지. 내가 교육을 잘못해서 그래. 미안하다.”
갑자기 허리를 숙이는 찬일 어머니. 진혁은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물어보았다. 정말로 궁금했다.
“저기, 찬일이 형이 가게 낸 거 아시죠.”
“응, 맡겨놓은 돈 다 가져갔지.”
“그 돈이 저희 집에서 일하면서 받은 돈이라는 거, 찬일이 형은 왜 모르셨어요?”
“응? 내가 말을 안 했나? 했을 텐데?”
순간 어리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찬일 어머니였다. 진혁이 눈을 부릅뜨며 찬일 어머니의 손목을 잡았다.
“괜찮으신지요?”
진기를 보내어 뇌를 살폈다.
‘……보통 사람의 뇌보다 압도적으로 위축되어 있어. 이건…… 분명히 치매 증상이다.’
진혁은 눈을 감았다.
‘이런 짐승 같은 놈에게도 돌봐야 할 어미가 있다.’
제 어머니에게는 끔찍한 효자였다고 들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솟구치던 살기가 가라앉았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세상, 진혁네 가게를 망하게 한 후에 이자는 어머니의 치매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더 이상 가게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평생 어머니를 돌봐야 하겠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 병원비만 좀 결제해 주세요.”
그렇다고 해서 병원비를 대신 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 그래. 당연히 내가 내야지.”
진혁의 어머니가 바지춤에 손을 넣어 전대를 꺼냈다. 진혁은 그 모습을 보지 않고 병실로 돌아갔다.
찬일은 벌벌 떨며 진혁을 피했다. 진혁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머니 데리고 큰 병원을 가 봐.”
살기와 함께 퍼트리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찬일이 눈을 껌뻑하니 감았다. 조금 전까지 두려움에 떨면서 손톱을 깨물던 놈이 갑자기 이를 악물며 외친다.
“이 짐승만도 못한 자식! 우리 엄마에게 무슨 짓을 했어!”
“누가 누구더러 짐승만도 못한 자식이래?”
진혁이 눈을 가늘게 치켜뜨는 것만으로도 압도되어 더 이상 손끝도 까딱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아닌 녀석이다. 그저 이 자리에서 지워버려도 상관없는 놈.
그런데 이제는 눈빛이 살아있다. 눈꺼풀도 제대로 뜨질 못하면서 침을 질질 흘리며 뭔가를 말하려고 한다. 말도 못하고 무서워하던 놈이, 독기를 뿌려가며 제 어미를 걱정한다.
등을 돌려 나가려던 진혁이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가게 문 알아서 닫고.”
◈ ◈ ◈
“찬일아, 찬일아. 괜찮니?”
진혁이 나간 후, 멀쩡한 어머니가 들어왔다. 그것을 본 찬일이 눈물을 왈칵 쏟았다.
“엄마!”
“얘가 왜 이렇게 울어, 어디 잘못됐어?”
“엄마, 엄마. 진혁이가… 진혁이가 뭐 하지 않았어?”
한참 두리번거리고 나서 진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찬일이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열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뭐 했지. 널 여기까지 데려다줬지!”
“아니… 엄마… 걔가… 걔가 초능력자인 것 같아.”
“얘가 머리를 바닥에 박더니 헛소리를 하네!”
“진짠데….”
이미 의사에게 이마의 찰과상 외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를 들은 터다. 찬일 어머니는 아들 이마에 반창고가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아들의 뺨을 꼬집으며 잡아당겼다.
“그리고 너,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운정 씨네 집 앞에 가게를 열었다며! 이 몹쓸 놈아! 내가 운정 씨를 어떻게 봐! 네 아부지 돌아가신 후에 운정 씨가 어떻게 도와줬는 줄은 알아?!”
“아야, 아야, 내가 잘못헀어! 나도 몰랐다고! 그리고 엄마, 엄마도 검사 좀 받자. 큰 병원 가서, 건강 검진을 풀세트로.”
“돈 아깝게 무슨 소리야!”
“내가 이번에 쓰러져 보니까 알겠어.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얼렁뚱땅 갖다 붙이며 찬일이 생각했다.
‘진혁이 그놈은… 나라에서 키우는 숨겨진 초능력자가 틀림없어. 지옥에서 온 악마 같은 무서운 눈빛이었어. 어머니를 모시고 꼭 병원에 가야지. 그리고 가게도 닫고… 어디 가서 노가다라도 하면 굶어 죽진 않겠지.’
“가게는 닫을 거고, 다시 사과도 하러 갈 거야. 그러니까 엄마, 병원에 가자고.”
한편, 진혁은 천마강림보를 사용하여 빵집까지 빠르게 돌아왔다. 0.001초도 걸리지 않는 시간, 진혁이 지나간 자리에 있던 커플이 의아해했다.
“오빠, 여기 뭔가 지나가지 않았어? 오토바이라도 지나갔나?”
“그냥 바람 불었잖아.”
“이상하다… 인기척 같았는데.”
딸그랑, 딸그랑!
아버지가 돌아온 진혁을 맞이했다. 아주 반가워 보였다.
“내가 이미 한번 해 봤는데, 큼…… 네가 한 것만큼 맛있지 않더라.”
찬일이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셨다.
‘벌써 데코레이션 다 끝내고 맛까지 보셨군.’
반쯤 먹고 난 노오란 치즈케이크!
아버지는 진혁이 만들어 놓은 연한 노란색과 흰색, 쪽빛 젤라틴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조합한 색을 사용해 겉에 무스 코팅을 한 모양이었다. 마치 봄날 개나리처럼 선명한 노란색-식욕이 돋는다기보다 비 오는 날 신는 고무장화에나 어울릴법한, 묘하게 플라스틱처럼 보이는 색깔은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네가 구운 바닐라 시트, 그거로 다시 만들어 봤으면 하는데. 흠흠. 네가 좀 도와주면.”
“지금 보여드릴게요.”